황야의 이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7
헤르만 헤세 지음, 김누리 옮김 / 민음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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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장기판' 위에서 움직이는 법 <황야의 이리 - 헤르만 헤세> 

 

 

 

 

 

"황야의 이리는 나에게 아주 짧은 시선을 던졌다. 그것은 연사의 말을, 나아가 그의 전인격을 비판하는 시선, 아 정말이지 그 의미에 대해서만해도 책 한권은 거뜬히 써낼 만한, 잊을 수 없는 무서운 시선이었다... 그 눈빛은 사실 빈정댄다기보다는 차라리 슬픈 쪽이었다 그건 정말이지 아무런 희망도 없는 심연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듯한 슬픈 눈빛이었다. 어느 정도는 안정된, 어느 정도는 습관과 형식으로 굳어져버린, 조용한 절망이 눈빛의 내용이었다. 그건 절망이 내뿜는 밝은 빛으로 허식에 가득찬 연사의 인간성을 관통했을 뿐 아니라, 그 순간의 상황을, 청중의 기대와 기분을, 어딘가 젠체하는 그 강연의 제목을 비꼬아버린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황야의 이리의 눈빛은 우리 시대 전체를, 바쁘게 돌아가는 모든 부질없는 짓거리들을, 모든 허망한 노력, 모든 허영을, 망상에 가득 찬 천박한 정신의 모든 표피적인 장난질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아아! 불행히도 그 시선은 더욱 깊어만 갔다. 우리의 시대, 우리의 정신, 우리의 문화와 궁핍과 절망보다도 더 먼 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가슴속을 파고드는 시선이었고, 어쩌면 이 세상을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한 사상가가 인간의 품격이라는 것에 대해, 나아가 인생의 의미 자체에 대해 품고 있는 회의를 한 순간에 웅변적으로 드러내는 시선이었다." -18p

 

 

헤세의 작품의 성격이 나뉘어지는 분기점이 되는 작품이 있다. 1920년대 헤세 그리고 많은 작가들은  계몽주의가 팽배하던 독일과 혼란스러운 세계 안에서 자아에 대해 강하게 성찰하기 시작했다.  첫번째로 <데미안>, 그리고 두번째로 이 <황야의 이리>라는 책을 보면  그 전의 서정적인 작품(모범적이고 교훈적인 작품)들과는 다르게 보다 헤세가 정신적인 혼란과 고통을 서술하고 존재와 문명에 대한 비판을 하게 되는 면을 확인 할 수 있다. 책은 편집자의 서문과 하리할러의 수기로 되어있다. 하리할러의 수기 옆에는 '미친 사람만 볼 것'이라고 적혀져있다. 혼란스러웠다. 리뷰를 쓸까 말까 엄청나게 고민했다. 하리할러의 수기, 이 황야의 이리가 남긴 글들은 의식에 따라 이야기가 서술되면서 그 의식속으로 쉽사리 내가 파고들 수 없었다. 특히나 하리할러의 수기 중 '황야의 이리론'은 도대체 집중이 안되어 입으로 읽으면서 넘어갔더니 다행히 그럴듯하게 책장을 넘길 수 있었다. 헤세의 작품을 여러 권 읽고난 후 이 <황야의 이리>라는 제목을 발견했을 때 어떤 내용일지 궁금하여 가슴이 뛰었었다.  그 당시 아주 과감하고 문제작이었던 <황야의 이리>는 그야말로 나에게 굉장한 작품이다. 어쩜 이렇게 감정과 의식이란 놈을 가지고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인상적인 구절들이 많아서 다소 지저분한 리뷰가 될지도 모른다..)

 

 

 

* 담아두기

 


하리 할러는 개성적 인간이다. 자신을 황야의 이리라고 지칭하는 이 인물은 또한 흔히 말하는 시민들의 가벼운 사회에 들어갈 수 없는 일종의 사회 부적응자이다. 그러나 그는 무조건적으로 그 사회를 비판하지 않는다. 그의 마음 한 쪽 구석에서는 그 사회에 대한 동경이, 그 사회의 존재로써 끼어있고 싶은 욕망이 숨어있다. 그리고 우연히 만난,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마술극장'과 세계로서의 연결자 헤르미네를 만나고 (헤르만의 여자이름, 헤르미네는 헤세의 생각이 투영된 존재가 아니었을까) 사회의 쾌락과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게 된다. 하리할러의 내면에는 '인간과 이리, 즉 <사상과 감정의 문화와 잘 길들여진 승화된 본성의 세계>와 <충동과 야성과 잔인함의 어두운 세계, ㅡ승화되지 않은 거친 본능의 세계>가 동거하고 있다.' 그 혼돈의 내면안에서 그는 고민한다.

 

 

 

 

 

이 사내의 고통스런 병은 그의 본성의 어떤 결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그의 천부의 재기와 능력이 너무나 풍요로워서 좀처럼 어떤 조화에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나는 할러가 고통의 천재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니체가 말한 의미에서 무한하고 무서운 천재적인 고통의 능력을 내면에서 길러왔던 것이다. 또한 나는 그의 이러한 염세주의의 토대는 세상에 대한 경멸이 아니라 자기 경멸이라는 것도 알았다. - 20p

 

과거의 유럽, 과거의 참다운 음악, 과거의 참된 문학을 잘 알고 존중하는 우리들은, 내일이면 잊혀지고 조롱당할, 어리석고 머리가 복잡한 소수의 노이로제 환자에 불가한가?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던 것, 우리가 정신, 영혼, 아름다움, 성스러움이라고 불렀던 것은 이미 오래전에 사멸한 한갓 허깨비에 불과하며, 단지 바보들이나 아직도 그런 것들이 살아 있고 실재한다고 여기는 것일까? 어쩌면 그런 것들이 실재한 적은 한번도 없지 않을까? 우리 같은 바보들이 애써 얻고자 하는 건 어쩌면 항상 하나의 환영에 불과한 건 아닐까? - 56p

 

 모래와 자갈 사이에서도 작은 행복의 꽃은 핀다. 황야의 이리도 그랬다. 그가 대체로 몹시 불행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는 또한 다른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이를테면 그가 그들을 사랑하거나 그들이 그를 사랑하는 경우에 말이다. 왜냐하면 그를 사랑한 사람들은 모두 항상 그의 한 면만을 보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섬세하고 이지적이고 괴팍한 인간으로 사랑하다가 갑자기 그의 속에 있는 이리를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실망했다.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 하리는 누구나 그렇듯이, 전(全) 존재로서 사랑받기를 원했고, 그래서 그가 사랑을 받고 싶어한 바로 그 사람들에게 이리의 모습을 감추고 기만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황야의 이리는 자기 자신의 이중성과 분열성을 그가 접촉한 모든 타인들의 운명 속에 불어 넣었던 것이다."(p62)

 

 

 

 

 

 

우리의 황야의 이리도 가슴 속에 두 개의 영혼을 품고있다고 믿고, 그래서 자신의 가슴이 이미 몹시 좁아졌다고 생각한다. 가슴, 즉 육신은 언제나 하나지만, 거기 살고 있는 영혼은 들도 다섯도 아니다. 영혼은 무수하다 인간은 수백 개의 껍질로 된 양파이고, 수많은 실로 짜인 천이다. - 85p

 

황야의 이리는 죽지 않을 수 없고, 자기 손으로 그 지긋지긋한 현존을 끝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지 않으려면 새로운 자기 성찰이라는 죽음의 불에 용해되어 자신을 변화시키고, 가면을 찢어버리고, 새로이 자기 자신이 되려고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 이런 과정은 나에게는 새로운 것도, 미지의 것도 아니었다. - 95p

 

그날 나는 다시 우연이 운명임을, 내 존재의 폐허가 신의 파편임을 알았다. 내 영혼은 다시 숨쉬기 시작했고, 내 눈은 다시 시력을 되찾았다. 스스로 형상의 세계에 들어가 불멸의 존재가 되려면, 흩어진 형상 세계를 함께 모아 저 하리 할러의 <황야의 이리>의 삶을 전체로서 형상으로 고양시키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나는 잠시나마 달아오르는 가슴으로 느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삶이 추구하고 시도하는 목표가 아니었던가? - 201p

 

인생이라는 유희의 수십만 개의 장기말이 모두 내 주머니에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고, 충격 속에서 그 의미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다시 한번 그 유희를 시작해 보고, 다시 한번 그 유희를 맛보고, 다시 한번 그 무의미 앞에서 전율하고, 다시 한번 내 마음속의 지옥을 이리저리 헤매고 싶었다. 언젠가는 장기말 놀이를 더 잘 할 수 있겠지 - 308p


 

하리할러는 시대의 교차로에서 헤매고 있는 방랑자이다. 시대의 변화속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의 갈피를 잃은 불쌍한인간이다. 그리고 그 모습은 우리 또는 과거의 사람들 속에서도 찾아낼 수 있다. 실제로 헤세는 이 작품을 쓸 당시 가족과의 관계나 우울증 때문에 정신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는 소설의 마지막 긍정적인 결과를 불러낼 하리할러의 말을 통해서 자신 또한 희망적인 삶을 그려낸다. 삶을 산다는 게 무엇일까. 진정한 '나'라는 게 무엇일까 그리고 인간이 된다는 게 무엇일까? 내 안에 시민적 영혼 그리고 이리의 영혼 또는 그 무엇들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통일될 수 없다. 결국 우리의 삶은 수없이 많은 생각의 뿌리인 영혼을, 그 영혼들을 충돌하지는 않게 마음 속 파도에서 떠다니는 것들 처럼 그렇게 남겨둔채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저 유머와 얘깃거리를 통해 의미있는 것과 무의미한 것을 가르고, 우연과 운명을 갈라 어떤 곳으로 나아가야 할지 선택하는 것. 그렇게 해서 심각하지 않게 세상 속으로 뛰어드는 것. 그것이 우리 모두가 삶을 살아가야 할 방향이 아닐까. 아마도 그것은 하리가 이제부터 나아갈 장기말 놀이의 winner로 가는 길일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모른다. 헤세는 이 혼돈의 자아에 대한 해결책으로 '유머'라는 키워드를 던졌지만 보다 상세한 것들에 대해서는 다음 작품인 <유리알 유희>에 집약해 놓았다고 한다. 어떤 이야기로 도움을 줄지 벌써부터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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