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
우애령 지음 / 하늘재 / 2005년 2월
평점 :
품절


몇 해 전 <여자, 정혜>라는 영화 포스터를 본 적이 있다. 어떤 영화일까 대강의 줄거리는 친구에게 들었고, 주인공을 맡은 두 배우도 마음에 들어 영화관을 찾으리라 마음먹었는데 어쩌다가 영화를 놓치고 말았다. 그 후 비디오가 나오기를 손꼽아 기다렸으나 우리 동네 조그만 비디오 가게 아저씨는 아직 비디오로 출시되지 않았다는 말을 했다가 다음 방문에서는 찾는 이가 적어 반품했다는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었다.

몇 해 전만 해도 눈에 밟히는 것이 비디오 가게였는데, 이럴 수가. 그 많던 비디오 가게는 어디로 갔을까. 각종 할인 혜택 덕분에 영화관에서 보나 비디오로 보나 가격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이유에서인지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져 비디오 가게가 많이 문을 닫아버렸다. 동네에 유일한 비디오 가게에서 구할 수 없다니 영화 채널에서 한번 보게 되기를 소망하는 수밖에.  

그러다가 신문을 통해 <여자, 정혜>의 원작 소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알게 된 사실로부터 읽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지만, 지금에라도 만나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다. 장편소설 쓰는 것보다는 단편을 쓰는 것이 훨씬 힘든 일이라고 누군가 이야기했다. 나는 우애령의 단편 <정혜>를 보고 이 말에 수긍하게 되었는데, 단편은 정말 힘이 셌다. 이 짧은 분량의 글에서 어떻게 그토록 강렬한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걸까. 나는 내 눈을 의심하며 다시 한번 읽었다.

방금 감동적으로 읽었는데 다시 읽으니 아까는 미처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내용들이 고스란히 새로 각인되었다. 다시 한번 읽으면 또 발견할 수 있을까. 영화를 보지 못했지만 소설을 읽으며 영화의 두 주인공이 소설의 주인공에 자꾸만 겹쳐지며 읽히는 것이었다. 김지수의 하얀 얼굴과 매력적인 황정민의 모습 때문에 영화를 본 것만 같은 착각이 자꾸만 일렁거린다.

정혜는 세상과 소통하기를 꺼린다. 우체국에 근무하면서 유리문 밖의 사람들을 늘 응시하면서도 정작 그들 사이에서 살아가지 못한다. 아주 작은 일에도 쉽게 상처받는 여린 아이 같은 사람이다. 어쩌면 어린 시절 받은 상처 때문에 어른이 되는 일이 고통스러웠을지도 모른다.

정혜는 단정하게 흰 셔츠에 검은 바지를 갖추어 입고 기름을 부은 듯한 매끄러운 음성으로 다가오는 구둣방의 남자 점원들이 부담스러웠다. … 그녀는 여자들을 능숙하게 다루며 접근하는 이런 부류의 남자들이 싫었다. 그녀의 인생을 산산조각 내버린 남자들과 이들은 다 비슷한 부류들이었다. … 그녀는 점포를 나오면서 카운터에 앉은 젊은 여자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좀더 인간적으로 손님을 대하면 좋겠어요. 여자 구두를 파는 데 꼭 남자를 고용해야만 되나요? 어리둥절한 카운터의 여자의 얼굴 앞에서 돌아서 허둥지둥 문을 빠져나오는 정혜의 뒤로 떠나갈 듯한 폭소가 터져 나왔다. 정혜는 귀를 막고 걸었다. - 본문 중에서

세상에 나가 사람들과 소통하려 할 때마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그럴 때면 읽던 어려운 책들을 덮고 안데르센 동화와 같은 책으로 정혜는 마음의 평안을 되찾곤 했다. 그렇게 상처만 받아온 정혜에게도 운명처럼 사랑이 찾아온다. 정혜는 아니라고 되뇌이면서도 준석을 기다리는 자신과 종종 마주친다. 작가 지망생으로 비춰지는 준석은 때때로 우편물을 부치러 우체국에 들르면서 정혜에게 말을 건넨다. 오늘 입은 회색빛 스웨터가 잘 어울린다고. 정혜는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아본 일이 없기에 낯설기만 하다.

그 후로도 날씨가 좋다던가 비가 온다던가 하는 말을 건네며 정혜의 얼굴에 짧은 미소가 번지게 만드는 준석을 정혜는 참 좋은 사람이라고 판단하고, 저녁 초대를 한다. 준석은 며칠 밤샘 작업을 한 덕에 힘들겠다고 했지만, 어렵게 이야기를 꺼낸 정혜를 거절할 수 없어 가겠노라 약속한다. 그러나 약속된 시간에 준석은 나타나지 않고 정혜는 상처받았다. 다시 만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쓸데없는 감정만 불러일으키는 사람이라고. 

준석은 정혜에게 자신이 약속을 못 지킨 이유에 대해 설명하지만 정혜는 냉정하다. 그 후 한동안 우체국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후줄근한 준석이 말끔한 모습으로 다시 정혜 앞에 나타났다. 응모한 작품이 당선되었다며 아직도 그 초대가 유효한지 묻는다. 정혜는 여전히 냉정했다.

자신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악마가 잘 살고 있다는 것을 텔레비전을 통해 환기하게 되자 정혜는 분노한다. 그와는 반대로 애꿎은 피해자는 불행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너무 부당하다는 생각에 친척 아저씨를 헤치려고 정혜는 길을 나섰다. 그때 준석이 집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혜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눈길을 하염없이 걸으며 소설은 막을 내린다.

아마도 정혜는 살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난날의 상처는 모두 잊고 준석과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을 것이다. 준석은 정혜의 아픈 상처들을 보듬어주었을 것이고, 준석으로 인해 모든 편견을 던져 버린 정혜는 새로운 삶을 이어갈 것이다. 그래야지 세상이 공평하지 않겠는가.

저자는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모든 장면을 방부 처리한다. 인물의 심리묘사는 물론이고 장면 장면마다 영화를 보고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끔 살아있는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정혜>는 상처로 얼룩진 가여운 영혼에 대한 이야기다. 읽는 내내 가슴이 뜨거워졌다.

저자가 소설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사랑은 모든 상처를 치유할 만큼 강한 힘을 가졌는지 오히려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남겨주는 것인지 의문을 던져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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