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과 흑 -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69
스탕달 지음, 임미경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쥘리앵 소렐의 두 차례 연애를 통해 1830년 즈음 프랑스 사회의 면모를 드러낸다. 그리고 한 젊은 영혼의 가치 선택을 기리는 내용이다. 어릴 때 축약판으로 줄거리만 알고 있다가 뒤늦게 읽었다. 나에게 이 고전 소설에 대한 균형잡힌 글을 쓸 역량은 없다. 그저 쥘리앵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 두서없이 떠오르는 생각을 적어 본다. 


이야기가 끝날 때 쥘리앵 소렐의 나이는 23세이다. 이야기가 시작될 때 그는 19세인데, 아버지로부터 게으름 피운다고 머리를 얻어맞곤 하는 책을 좋아하는 어린애에 불과했다. 제재소 집의 쓸데없이 영리한 막내아들에게는 인생의 경험이랄 것이 없었으나 그에게는 몇 권의 책이 있었고, 암기력을 밑천으로 해서 다른 삶을 접촉하게 된다.


주인공이 이토록 젊은 나이의 인물이라는 것은 양가적인 마음을 갖게 한다. 1800년대는 지금과 수명이 다르고 어른으로 치는 기준도 다른 사회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스물 언저리는 인생에 대해 깊게 알 수 있는 나이는 아니다. 쥘리앵의 나이는 이 인물의 물불을 가리지 않는 변덕스러운 연애감정을 이해할 수 있게 하지만 그가 주변 귀족과 성직자 개인을 평가하고 계층 의식을 갖고 비판할 때 신뢰가 어려운 마음이 들게도 한다. 이 인물의 시각을 과연 믿을 수 있는지. 그런데 이상한 점은 독서 과정에서 그 나이 인물이 충분히 할 법한 연애의 밀당 부분은 재미가 없었고 주인공 경험이 부족해서 신뢰가 어려운 타락한 계층 사회에 대한 비판의 눈을 보이는 페이지들에서는 재미를 느끼곤 했다. 


한편 곰곰 생각해 보니 나이 때문에 주인공을 신뢰 못하는 것은 부당한 면이 있었다. 쥘리앵의 시대는 물론이고 교육 기간이 길어서 성인 취급이 늦은 현대라 해도 이십 대 초반에 가졌던 시각이 미숙하다고만 치부할 수는 없다. 그런 부분도 당연히 있지만 전적으로 그렇게 치부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 이 시기에는 자신의 입장에 대해서 그럴 듯한 근거나 경험을 제시하여 논리로 뒷받침하기가 어려울 뿐, 훼손되지 않은 바른 감각으로 판단한다는 특별한 장점이 있다. 안정과 안주와 타협으로 빛바래기 이전의 예리함에서 나온 생각들은 세월이 가도 끝까지 인정될 것들이 많다. 세월의 흐름을 타며 나이든 사람들은 이십 대 초반의 생각들을 간직하고 있는지, 아니면 버렸는지, 버렸다면 그보다 나은 생각을 하고 살고 있는지... 각자 돌아보면 알게 되는 지점이 있을 것이다. 나는 쥘리앵의 시선을 신뢰하며 이야기를 따라가기로 했다. 이 소설의 쥘리앵에게는 어릴 때 은사 역할을 한 퇴역 군의관이 물려주어 외우다시피하는 책 삼사십 권이 있고 명민함이라는 큰 무기가 있었다.


쥘리앵은 귀족을 보좌하며 그들 세계를 들여다 보게 된다. 그는 의지와 용기와 두뇌의 우수함에 있어 자신이 어떤 귀족보다 못하지 않음을 느낀다. 그러니 그는 신분 상승을 강렬하게 원한다. 하지만 쥘리앵은 투서 한 장 때문에 한순간 모든 것을 무화시켜 버리는 선택을 한다. 그렇게 쉽고 단호하게 포기하다니 독자가 의아할 정도이다. 이 선택을 이해하려 조금 앞서 있었던 일들을 살폈다.  

현실 세계에서 기득권을 나누어 갖고 지배 계층이 된다는 것은 정말 가치 있는 일일까. 쥘리앵은 귀족들이 소중하게 두르고 있는 예의와 격식의 우스꽝스러움 너머에 진정한 가치가 있는 무엇인가가 있는지 확인할 기회를 가진다. 

쥘리앵은 고용주인 라몰 후작의 서기 역할을 하기 위해 집권 귀족과 성직자들의 비밀 회의에 참석하였다. 작가는 정치 얘기가 지루하지만 그래도 건너뛰어 버리면 이야기의 구멍이 되니...라며 회의 내용을 십 페이지 이상 할애한다. 1830년 즈음은 나폴레옹 몰락 후의 반동기였는데 회의에서 프랑스 사회의 기득권들은 당시 시민 의식이 커지는 상황에서 이 위기를 어떤 식으로 누르고 가야 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의논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기득권 집권 세력의 대처는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이들의 주적은 말 많은 소시민이고, 단순한 농부들을 자기편으로 생각하고 있다. 지방 구석구석 들어가 있는 교회를 통해 농부들을 조종하는 것은 쉽다는 것을 알고 있다. 농부들을 자기들 쪽으로 교화하는데 더 노력하자, 지역별로 귀족 직속 군인들을 키우는 동시에 영국을 위시한 외세의 힘을 빌어 소시민들의 저항을 진압하자, 라는 논의를 한다. 구체적인 결론 없는 이 회의는 신분 사회가 조금씩 무너지는 과정의 발버둥이다. 여기에서 쥘리앵은 자기 사회의 최고위층 사람들의 마음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한다. 그에게 생생한 앎이 보태진다.


쥘리앵은 열정과 자존심이 자신의 모든 것이고 그것은 어떤 귀족들에 지지 않을 자신만의 가치라고 여긴다. 두 번의 연애가 단지 부와 계층 이동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만천하에 그리고 스스로에게 증명하고자 한다. 부와 신분은 필요한 만큼 중요하지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자신의 명예가 되지는 못한다고 여긴다. 쥘리앵은 귀족들 틈에서 생활하며 다만 신분이 그 인간을 증명해 주는 것이 아님을 충분히 확인한 것 같다.

쥘리앵 소렐의 이야기는 한 인물의 독서 경험이 실제 현실의 경험 속에서 어떻게 우위를 점할 수 있는지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대략 현실 경험의 부실함과 부조리함을 확인하면서도 현실만이, 현실적인 것만이 무소불위의 힘이 있는 것인 양 스스로를 속이는 경향이 있지 않은지. 투서 한 장에 방향을 돌려 죽음을 향해 달려간 이 인물의 선택은 매우 비현실적으로 보이는데, 어째서인지 우리의 머리 속에서 영영 떠나지 않는 의문의 한 장면이 되고 만다. 나는 자꾸 쥘리앵의 독서로 그 탓을 돌리게 된다.



인상적이었던 것 한 가지만 더 보탠다. 쥘리앵이 처음 연애를 시작할 때 자신이 해야 할 적절한 말이나 행동을 알지 못하는데, 첫눈에 반했다거나 하는 식으로 감정이 먼저 찾아온 것이 아니어서 마음가는 대로 행동하는 자연스러움이란 없었기 때문이다. 연애란 어떻게 진행되는지 아는 게 없었다. 상대가 관심을 보이자 자존심 드높은 자신이 구박을 일삼던 자기 가족 관계에서는 느끼지 못한, 인간 관계에서 특별한 존재로서의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여 부인에게 접근하게 된다. 어떻게 접근할지는 모르는 채로 말이다. 그래서 뭔가 궁리해야 하고 항상 계산해야 한다. 여기에 큰 도움을 주는 것이 책에서 본 구절들이다. 책의 내용을 떠올려 연기를 하다가 점점 그 역할에 익숙해지는 식이다. 역할에 익숙해진다, 관계에서 일정한 위치가 만들어진다, 그러다 보니 감정도 무르익어 간다,인 것이다. 

책 그 중에서 소설이 낭만적 사랑의 전파에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확인하게 되는 부분이다. 이것은 이 작품의 본문에도 언급 되고 있지만 나역시 그랬던 기억이 있다. 어릴 때 책을 통해서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거나, 사랑이라면 이래야 한다거나 하는 기준이 세워진 것 같다. 심지어 상대에 대한 반응도 책에서 모방한 것이 있었다는 게 기억난다. 감정도 모방을 통해 배우게 된다는 것과 습관을 통해 안정적인 것이 된다는 깨달음은 이제는 익숙하지만 그때는 잘 모르던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