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털같은 나날.

류진운 소설집. p.21

林의 아내는 李이다.
결혼 전에는 눈썹이 수려하고 조용한 처녀였다. 키는 작아도 깜찍하고, 작은 눈은 늘 반짝거려, 누가 보아도 좋아했다. 그때 그녀는 말수가 적었다. 유행에 따라 화장을 하진 않았으나 늘 깔끔했고, 머리를 길게 길렀다. 그는 학교 친구의 소개로 그녀를 만나 연애했다. 그녀는 사람을 만나면 수줍어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조용해서, 서정시처럼 따뜻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자, 그 조용하고 시적인 아가씨가 잔소리를 좋아하고, 머리도 빗지 않고, 밤에 몰래 수돗물을 훔치는 주부가 되리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두 사람 모두 대학을 졸업했고, 둘 다 성취욕도 강했다. 서로 열심히 노력하면서 밤에는 등불을 밝혀 공부했고, 웅대한 이상도 갖고 있었다. 관공서의 처장이나 국장, 또는 사회의 크고 작은 기관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자 그들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얼굴을 한 군중의 새까만 대열 속에 빠져 있으리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당신도 두부를 사고 출퇴근을 하고, 밥 먹고 잠자며, 빨래를 하고 가정부까지 다루고, 아이를 돌보다 보면, 저녁이 되어도 책 한 장 뒤적이고 싶지 않게 되고, 웅장한 꿈이나 이상이라는 것은 개방귀 같은 소리고 철없던 때의 일이 되어 버리고 만다. 모두들 이렇게 섞여서 한 평생 사는 것이 아닌가? 큰 뜻이 있으면 어쩔 거고, 설사 꿈이 있다면 또 어쩌겠다는 것인가? 그 많던 장군과 재상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모두 황폐한 무덤의 풀숲 아래에 있을 뿐이다. 한 세대만 지나면, 누가 누굴 알겠는가? 그는 가끔 이렇게 생각하면서 위안하곤 했다.

중국 <평론전선>이 선정한 20세기 20대 중국작가 중 하나라는 류진운의 소설 중 일부다. 아~ 진정 닭털같은 인생이 아닐 수 없지만, 재밌는 소설이다. 별 네 개.

@ 그러나 지금, 나름대로 최상의 순간. 배도 부르고 모짜르트를 듣고 있으며 오늘 할 실험을 모두 마친. ^^ 닭털중에 섞인 공작새 깃털같은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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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6-16 20: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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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 nobody's darling

누구의 '다알링'도 되지마

Alice Walker

Be nobody's darling;
Be an outcast. 
Take the contradictions
Of your life
And wrap around
You like a shawl,
To parry stones 
To keep you warm.

누구의 '다알링'도 되자 마./추방자가 되렴./삶의 모순들을 숄처럼 둘러/돌을 피하고/너를 따뜻하게 감싸는 거야. 

Watch the people succumb
To madness
With ample cheer;
Let them look askance at you
And you askance reply.

사람들이 격렬한 환호 속에서/미쳐 죽어가는 것을 봐./그들이 너를 흘겨보면/ 너도 같이 흘겨 봐. 

Be an outcast;
Be pleased to walk alone
(Uncool)
Or line the crowded
River beds
With other impetuous
Fools.

추방자가 되렴./홀로 걷는 걸 즐거워하는 거야./(촌스럽겠지)/아니면 다른 맹렬한 바보들과 함께/강바닥에 같이 서보는 거야.

Make a merry gathering
On the bank
Where thousands perished
For brave hurt words
They said.

그러고는/수천 명이/자신이 내뱉은 용맹스런 상처의 말 때문에/죽어가는/ 그 강둑에서/즐거운 집회를 꾸며보렴.


Be nobody's darling;
Be an outcast.
Qualified to live
Among your dead.

누구의 '다알링'도 되지 마./추방자가 되렴./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 자격이 있는 그러한.

(p.29, 현경과 엘리스의 신나는 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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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ice 2004-06-09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다가 다시 '미래에서 온 편지'를 읽고 있다.

 Follow your bliss.

 Follow your heart.

 Follow your love.

 Then,

 The Universe will play music so that you can dance.

 

http://www.hani.co.kr/section-010100007/2004/06/010100007200406012133643.html

단백질에 맞춰 신약을 디자인하라

“보세요. 단백질에 딱 달라붙어 단백질 기능을 억제하기도 하고 촉진하기도 하는 물질을 설계해 만들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황금알을 낳는 신약이 됩니다.”

지난 21일 낮 대전 대덕연구단지 안 생명공학기업 크리스탈지노믹스의 연구실에서 노성구 박사(연구이사)는 컴퓨터의 가상현실 프로그램에 나타난 거대한 단백질 그림들을 입체안경으로 바라보며, 단백질에 잘 붙는 신약 물질을 찾느라 골몰하고 있었다. 그 모양이 마치 자물쇠와 열쇠를 맞추는 아이들의 놀이와도 같다. 노 박사도 맞장구를 친다. “그래요. 모든 약의 공략 대상이 되는 질환 단백질의 3차원 구조를 요즘엔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으니까, 신약개발도 단백질의 생김새를 직접 따져가며 신약의 분자 구조를 설계하고 있어 자물쇠와 열쇠 맞추기와도 비슷해지고 있죠.”

신약 개발은 자물쇠·열쇠 맞추기

생명과학의 단백질 연구는 흔히 신약 개발의 지름길로 통한다. 비만 단백질, 암 억제 단백질, 면역 촉진 단백질 등 갖가지 단백질의 기능을 규명하는 연구성과가 잇따르는 것도 엄청난 부가가치를 안겨줄 신약 개발의 목표 때문이다.

영양소인 단백질은 뼈와 살, 머리카락과 손·발톱 등 우리 몸을 이루는 필수성분이기도 하지만, 단백질의 핵심임무는 따로 더 있다. 단백질은 우리 몸 안에서 3만~4만가지 유전자의 단백질 설계도에 따라 갖가지 모양새로 만들어져 생명을 작동하는 생체 조절과 신호의 매개자 구실을 한다. 나쁜 단백질은 병을 일으키기도, 좋은 단백질은 병에 저항하기도 한다. 당연히 질환 단백질을 필요에 따라 제어하는 물질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병을 정복하는 약이 되는 것이다.

노 박사는 “이 때문에 질환 단백질에 잘 달라붙는 특정 물질을 설계해 약으로 쓰려는 것이 모든 질환 단백질 연구의 궁극적 목표”라며 “특정 단백질에만 들어가 달라붙는 약물 열쇠를 설계하고 디자인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라고 말한다.

이 기업은 지난해 발기부전에 관여하는 단백질(PDE5)에 비아그라 약물이 어떻게 결합해 약효를 일으키는지의 ‘자물쇠와 열쇠’ 약효과정을 원자 수준에서 처음 규명해 저명 과학저널 <네이처>의 표지논문으로 발표한 바 있다. 최근엔 지방대사에 관여하는 단백질의 3차원 구조를 규명한 뒤, 이에 달라붙어 지방대사 기능을 촉진하는 비만치료 후보물질을 설계해 개발하기도 했다. 노 박사는 “앞으로도 여러 가지의 후보약물을 선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 발기부전에관여하는 단백질(PDE5)의 3차원 구조와, 이 단백질에 달라붙어 기능을 억제함으로써 발기부전을 치료하는 비아그라 약물(포도송이 형상)의 결합체 모습. 지난해 9월 〈네이처〉 표지에 실렸다. 크리스탈지노믹스 제공

“단백질 디자인으로 신약 개발” 새 흐름

아예 단백질 모양을 직접 바꿔 단백질의 기능을 약처럼 쓰는 일도 가능해졌다. 이른바 ‘단백질 신약’은 의약시장에서 새로운 흐름으로 등장하고 있다.

고규영 한국과학기술원 교수(의과학센터)도 생체조절 단백질의 ‘자물쇠와 열쇠’를 찾는 연구자다. 최근 허혈증·뇌졸중의 예방·치료에 도움이 되는 혈관 생성 단백질(안지오포이에틴)의 약효를 높이기 위해, 이 단백질의 불안정한 부분을 통째로 떼어내고 대신 안정적이며 활성도가 큰 구조를 끼어 새로운 치료 단백질을 만들었다. 일종의 재조립이다.

질환단백질 구조보며 억제물질 설계해 결합
때론 단백질모양 조작으로 치료기능 내기도
부작용 줄였지만 성공확률 아직은 1% 미만

단백질 신약은 자연상태의 단백질을 흉내내어 질환 단백질을 속이는 수법으로 세포를 보호하기도 한다. (그림참조) 고 교수는 “예컨대 염증은 염증 질환 단백질이 세포 수용체에 달라붙어 세포 안에 염증 신호를 전달해야 일어나는데, 세포 수용체를 닮은 단백질을 넣어주면 질환 단백질이 이것들에 달라붙어 세포는 안전하게 보호된다”며 “실제로 이런 단백질 신약이 해외에서 악성 류머티즘 치료제로 개발됐다”라고 말했다. 고 교수 연구팀은 치료 단백질을 여러 개 붙여 효능을 높이는 단백질 이중체·삼중체 등의 독특한 설계 기술을 개발해 확보하고 있다.

이봉진 서울대 교수(약학·생체막단백질구조연구실)도 ‘단백질 디자이너’다. 그는 토종 개구리에서 내성에 강한 세균에도 작용하는 항생물질(단백질)을 찾아낸 뒤, 약효를 높이기 위해 이 단백질의 구조를 고치는 데 성공했다. 이 교수는 “단백질이 세포 안으로 더 빨리 흡수돼 약효가 높아지도록 세포에 잘 달라붙는 구조로 단백질을 디자인했다”라고 말했다.

류성언 세포스위치단백질구조연구단장(생명공학연구원 박사)은 “예전에도 단백질 구조를 바꿔 새로운 치료 기능을 얻으려는 노력은 있었지만 최근 들어 단백질 구조에 대한 지식이 늘면서 효과적인 단백질 디자인이 가능해지고 있다”라며 “앞으로 새로운 디자인 단백질은 더 많이 출현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일한 나의 짝 찾기’가 관건

그러나 여전히 신약 개발은 쉽지 않은 길이다. 애써 찾은 신약이 독성과 부작용을 일으켜 실패하는 일이 부지기수다.

20가지 아미노산 수백개가 특정 서열로 연결된 사슬 구조의 단백질은 나노미터(㎚·10억분의 1m) 수준의 매우 작은 고분자이다. 이들은 세포 안팎에서 엄청나게 빠른 분자 운동을 하면서 다른 물질들과 수시로 부딛힌다. 이봉진 교수는 “무수한 분자 물질들이 우연히 무수하게 부딛히다가 자물쇠와 열쇠의 짝을 만나면 덥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며 “이 때 약물이 목표 단백질이 아닌 엉뚱한 단백질에도 결합하게 되면 부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약물이 아무 단백질에나 달라붙었다가는 큰 일이 나는 것이다.

노성구 박사는 “예컨대 비아그라는 공략대상인 ‘피디이5’ 단백질은 물론 구조가 비슷한 ‘피디이6’에도 6~7배 정도 약하게 결합하는데, 이렇게 되면 눈이 파랗게 보이는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며 “자물쇠와 열쇠는 유일한 짝을 갖도록 하는 게 신약 개발의 성패를 좌우한다”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단백질의 3차원 구조를 세세히 관찰하면서, 신약을 설계·조립하면 부작용의 확률은 크게 줄일 수 있지만 여전히 신약의 안전성은 또다른 중요한 문제로 남는다. 무수한 후보물질들도 동물실험은 물론, 다단계의 임상실험까지 거쳐야만 검증된 의약품으로 시장에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신약 성공 확률은 1% 미만이다.

노 박사는 “단백질 구조를 눈으로 보며 신약을 디자인할 수 있게 되면서, 단백질과 화합물의 신약 개발 경쟁은 ‘속도전’이 돼가고 있다”며 “단백질 구조 관측장비와 정보기술을 탄탄히 갖춘 한국도 이제 신약 개발에서 뒤지지 않는 경쟁력의 기반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한다”라고 말했다.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



단백질 3차원 구조 규명으로 신약개발 시간 2배이상 단축


‘자물쇠와 열쇠 맞추기’에 비유되는 신약 개발에는 다양한 방식들이 시도돼왔다.

먼저 단백질의 구조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선 자물쇠인 단백질의 활성 부위에 잘 달라붙어 약효를 내는 열쇠 약물의 후보물질들을 모두 끼워맞춰보는 방식으로 신약 개발이 이뤄졌다(그림1). 이를테면, 모든 열쇠들을 열쇳구멍에 끼워보는 일을 되풀이하면서 자물쇠에 맞는 열쇠를 찾아내는 방식이다.

독특한 꼴의 분자 구조를 지닌 후보물질이 약효를 발휘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면, 비슷한 부류의 분자 구조를 지닌 물질로 후보를 압축하면서 가장 약효가 뛰어난 열쇠 약물을 찾아나서는 것이다. 여기엔 컴퓨터가 이용돼 고속검색이 이뤄진다. 이른바 후보약물의 ‘대량검색’ 방식이다.

그러나 단백질의 3차원 구조를 파악하게 되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다. 단백질의 3차원 구조는 방사광가속기에서 나오는 강한 에너지의 엑스(X)선을 단백질 결정체에 쏘아 굴절되는 빛의 각도 정보를 분석하거나, 핵자기공명기(NMR)에서 단백질을 이루는 원소들에 공명을 일으켜 원소들의 거리 정보를 포착하는 방식으로 규명되고 있다.

노성구 박사(크리스탈지노믹스 연구이사)는 “이는 자물쇠의 내부 구조를 훤히 들여다보면서, 여기에 잘 맞는 열쇠 약물을 찾는 것과 같다”며 “이로 인해 신약 후보물질을 찾는 데 걸리는 시간도 평균 5년에서 1~2년으로 크게 줄었다”고 말한다(그림2). 최근엔 컴퓨터 기술의 발달로 가상현실 프로그램에서 단백질의 입체화면을 보면서 신약 후보물질의 화합물 구조를 설계하는 방식이 도입되고 있다.

최근에 성공사례들이 이 분야에서 주목받고 있다. 많은 항암제들이 여러 부작용을 일으키는 데 비해, 글리벡은 암 질환 단백질의 3차원 구조가 규명된 이후 질환 단백질에만 달라붙도록 하는 ‘선택성’을 높여 설계돼 부작용을 크게 줄였다. 에이즈 치료약으로 개발된 프로테이즈 억제제 역시 에이즈 바이러스가 생존하는 데 필수적인 단백질의 3차원 구조가 1989년 밝혀진 뒤에야 본격 개발되기 시작했다.

오철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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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ice 2004-06-04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보통 연구계획서를 쓸 때 이 단백질의 3차원 구조를 구함으로써 신약개발의 가능성을 열 수 있다고 '기대효과'란에 써오곤 했다. 그런데 3차원 구조가 그렇게 뚝딱뚝딱 구해지는 것도 아니고 구해진다 한들 신약개발까지는 멀고먼 길이 남아있어서 연구계획서를 쓸 때마다 좀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곤 했었다. 아는 분들 이름이 기사에 한 바닥씩 나오니 뭐랄까, 좀 어색하달까. 쉬운 일은 아닌데 다들 열심히 하시니 해뜰날도 오겠지. 하는 생각이다. 나도 좀 잘 나가보고 싶건만! ^^

머털이 2004-06-06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에도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논문들 가운데 과연 생체 내에서 정말 중요한 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하는데, 단백질의 구조에 의한 기능 예측은 '의미'있는 '과학'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나중에 신문에서 진스..님이 아니고 초이스님의 이름을 보게 될 날이 올 수도 있겠군요? ^^
 

http://h21.hani.co.kr/section-021015000/2004/05/021015000200405060508036.html

문화포커스- ‘우머니스트’의 꽃을 피워라

5월 말 한국 찾는 흑인 여성작가 앨리스 워커… 수필집·강연회·평화 음악회·평화 기행 등 어디서 만날까

‘제3세계 유색인종 여자’의 꽃을 피운 사람이 있다. 방한 예정인 흑인 여성운동가 앨리스 워커와 함께 평화기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앨리스 워커(Alice Walker)는 한국 독자들에게 익숙한 이름은 아니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감독한 영화 <컬러 퍼플>의 원작 소설을 쓴 작가라고 한다면 ‘아하!’하는 이들이 있을까. 소설가이자 시인인 그는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과 함께 현대 흑인문학을 대표하는 여성작가이며, 또 60년대 흑인민권운동부터 지난해 이라크 침공 반대 반전시위까지, 사회를 바꾸는 실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회운동가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1980~90년대에 그의 작품이 가장 많이 알려졌으며 퓰리처상을 받은 소설 <컬러 퍼플>과 <여인들의 신전>(문학사상사) <은밀한 기쁨을 간직하며>(문학세계사) 등이 번역됐지만 지금 서점에서는 거의 구하기 어렵다.


△ 5월 말 한국에 오는 앨리스 워커는 많은 소설과 시를 통해 여성의 역사를 재해석하고 여성의 영적 변화를 제안한다. 또 백인 중산층 중심의 서구 페미니즘의 한계를 지적하며 ‘제3세계 유색인종 페미니즘’을 키워냈다.(사진/ 이프토피아)

현대 흑인문학 <컬러 퍼플>로 퓰리처상

앨리스 워커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들이라면 눈이 번쩍 뜨일 행사들이 열린다. 그가 5월26일부터 6월6일까지 한국에 와 강연과 공연으로 한국의 독자와 만난다. 또 66년부터 88년까지 앨리스 워커가 쓴 에세이, 기사, 리뷰 들을 모은 수필집 <어머니의 정원을 찾아서>(구은숙 옮김, 도서출판 이프) <사랑의 힘>(박정오 옮김, 이화여대 출판부) <현경과 앨리스의 神나는 여행>(마음산책) 등 3권이 한꺼번에 번역돼 나온다.

문화기획법인 이프토피아(www.msiftopia.or.kr 02-717-9247, 717-9215)가 주관하는 이번 프로그램은 5월27일 서울 아트선재센터 아트홀에서 열리는 ‘앨리스 워커의 작품세계’ 특강으로 시작된다. 28일에는 이화여대, 29일에는 홍익대학교에서도 강연이 열린다. 가장 많은 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행사는 29일 오후 7시30분부터 9시까지 서울 문예진흥원 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열리는 ‘평화음악회-어머니의 정원을 찾아서’, 엘리스 워커와 신학자이자 여성·환경·평화 운동가인 현경 유니온 신학대 교수의 시 낭송, 재즈 보컬리스트 나윤선, 비올라 연주자 김정연, 해금 연주자 강은일, 무용가 멜빈 밀러의 공연과 설치미술이 어우러지는 무대다.


△ 올해 2월 쿠바 아바나에서 열린 <메리디안> 출판기념행사에 참가한 워커.(사진/ AP연합)

또 6월 5~6일에는 신청자 35명과 함께 ‘앨리스 워커와 함께하는 평화기행’을 떠나 경남 하동 백련리 새미골 도요지에서 400년 전의 조선 막사발을 재현하고 있는 여성 도공 장금정씨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막사발을 빚어보는 행사도 있다. 또 가산오광대 탈놀음을 보고, 명상과 연꽃차 퍼포먼스를 벌이고 돌아오는 행사도 마련된다. 6월2일 교보문고에서는 새로 번역된 책 3권의 싸인회를 하고, 6월3일에는 부산시립시민도서관과 부산대학교에서 강연회가 열린다.

‘제3세계 유색인종 페미니즘’ 일으켜

흑인 여성들의 삶이 지금보다 훨씬 힘겨웠던 1944년 미국 남부 조지아주에서 태어난 워커는 여덟살 때 오빠가 쏜 장난감 총에 눈을 맞아 한쪽 시력을 잃었고, 그래서 남들의 시선을 피해 외톨박이로 지내면서 독서와 시에서 위안을 찾았다. “나는 항상 외로운 사람이었다. 나의 한쪽 눈을 멀게하고 상처를 냈던 충격적 사건의 희생자가 된 여덟살 이후 나는 아이들과 친척들의 믿기 어려운 잔인함을 알게 되었고, 고독하고 외로운 소외자의 처지에서 사람들과 물체를 진실로 보게 되었다. 나는 고독 속으로 뒷걸음질 쳤고 이야기를 읽고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녀는 장애학생에게 주는 장학금을 받아 애틀랜타의 흑인 여자 대학인 스펠만에서 공부하면서, 급진적인 역사가인 하워드 진과 스토튼 린드의 영향을 받아 60년대 흑인 민권활동에 뛰어들었다. 1964년 첫 시집 <언젠가(Once)>를 냈으며, 1967년 함께 민권운동을 하던 유대인 법률가 멜빈 로즈벤 리벤톨과 결혼했다. 이들은 미시시피주 잭슨에서 다른 인종끼리 합법적으로 결혼한 첫 부부였다. 1970년 첫 번째 장편소설 <그레지 코플랜드의 제3의 삶>을 낸 이후 많은 소설과 시집, 수필집을 내놓았고, 웨슬리 대학과 매사추세츠 대학교에서 문학 강의를 했으며 80년대에는 글로리아 스타이넘과 함께 페미니스트 저널 <미즈>의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특히, <미즈>에서 그녀는 백인 중산계층 중심의 서구 페미니즘의 한계를 지적하며, 흑인들의 페미니즘을 대변하는 많은 기사를 실었다. <어머니의 정원을 찾아서>를 번역한 구은숙 청주대 교수는 “워커는 흑인뿐 아니라 유색인종 여성들의 권리를 옹호하면서, 인종과 계급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채 일반적인 여성 억압만을 강조해온 서구 백인 페미니즘에 대해 저항했고, ‘제3세계 유색인종 페미니즘’을 꽃피우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워커는 피부 색깔로 여성을 분류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흑인 페미니스트’라는 용어 대신 ‘우머니스트(womanist)’라는 용어를 쓰면서 “우머니스트는 흑인 또는 유색인종의 페미니스트를 의미하며 용기 있고 과감하며 자기의지를 갖고 행동하는 여성”이라고 설명했다. 그녀는 또 모든 종류의 차별에 저항하면서 여성뿐 아니라 남녀 모두가 공존하면서 총체적 인간성을 회복하자고 주장한다.


△ 앨리스 워커. 글로리아 스타이넘 <미즈> 편집장. 현경 유니언 신학대 교수(왼쪽부터). (사진/ 이프토피아)

워커의 소설들은 신화적인 구성 때문에 읽기 쉽지는 않지만, 대신 매우 강렬하고 독특한 방식으로 세계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게 한다. 세 쌍의 부부를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 남성과 여성, 인종과 인종이 벌인 50만년의 로맨스를 여성의 시선으로 바라본 <여인들의 신전>에서 여주인공인 미스 리씨는 고대의 여신으로 무수한 윤회를 거치며 흑인 여자, 백인 남자, 사자 등으로 살아왔다. 리씨가 겪어온 첫 ‘역사’는 남녀가 완전히 다른 부족으로 살면서 여인들이 스스로를 통치하던 시기였지만, 세월이 흐르자 남자들이 전쟁을 일으키고, 유럽과 이슬람이 아프리카의 여신에 도전해 전쟁을 벌이면서 백인과 흑인, 남성과 여성, 아프리카와 유럽의 위치가 전복되는 신화가 펼쳐진다.

“누구의 연인도 되지 마라"

여러 작품 속에서 워커는 인종과 성, 계급 등 다중적 억압을 경험하는 흑인 여성의 문제를 다루면서 백인뿐 아니라 흑인 남성들의 폭력과 착취에도 시달렸던 여성들의 삶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또 어머니, 할머니, 아프리카의 조상들로 이어지는 여성들의 삶, 가장 차별받고 아무것도 가질 수 없었지만 끈질기게 생명력과 예술적 능력을 보여주었던 여성들의 영혼을 보여준다. <어머니의 정원을 찾아서>에서 그녀는 “무지하고 타락한 백인 감시자의 채찍 아래 죽어간 고조 할머니의 천재성을 당신은 가졌는가? 또는 석양과 풀잎에 떨어지는 피, 그리고 평화로운 들판을 수채화로 표현해보고 싶어 마음속으로 울면서도 게으른 시골뜨기를 위해 과자를 구워야만 했는가? 또는 그녀의 유일한 즐거움이 혁명을 일으킨 영웅들을 돌이나 진흙으로 만드는 것이었을 때도, 육신은 망가지고 여덟명, 열명, 열다섯명, 스무명의 아이를(종종 그 아이들은 팔려서 그녀로부터 떠나갔다) 낳도록 강요받았는가?”라고 물으며 삶과 예술에 대한 욕망을 빼앗겨야 했던 흑인 여성들을 우리 곁으로 데려온다. 그리고 그 삶은 우리 할머니, 어머니의 삶과도 멀지 않다.

그 여성들의 역사를 굽이굽이 들려준 뒤 그녀는 지금 여기 살고 있는 여성들에게 외부에 휩쓸리지 않고 ‘외롭게’ 자신의 길을 떠나라고 노래하는 이런 시를 선물로 준다.

“누구의 연인도 되지 마라/버림받은 자가 되어라/당신 인생의/모순을/숄처럼/당신 몸에 두르고,/돌을 막기 위해/당신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사람들이 광기에/환호하며/굴복하는 것을 보라/그들이 곁눈질로 당신을 보게 하라/그리고 당신은 곁눈질로 대답한다. 버림받은 자가 되라/혼자 걷는 것을 즐거워하라/(품위 없는)/그렇지 않으면 혼잡한 강바닥을/다른 성급한/바보들로 가득 채워라…”(<누구의 연인도 되지 마라(Be Nobody’s Darling)>)

여성은 여성의 멘토다

[앨리스 워커의 문학세계]

구은숙/ 청주대 영문과 교수


△ 영화 <컬러 퍼플>의 한 장면.

앨리스 워커의 글은 오랫동안 사회에서 금기시했던 문제를 파헤치고 들어가 신화를 해체하고 그로 인해 여성이 겪게 되는 고통과 슬픔을 재현한다. 소설 <환희의 비밀을 간직하며>는 아직도 수많은 여성에게 행해지고 있는 여성 성기 절제 관습을, <컬러 퍼플>은 근친상간과 동성애, 흑인 여성에 대한 흑인 남성들의 폭력을, <메리디안>에서는 흑인 모성신화의 억압성을 그린다. 이 소설들은 흑인 공동체 내부의 문제를 생생하게 드러냄으로써 흑인 남성 비평가들의 비판 대상이 되었다.

그녀가 다루는 중요한 주제는 ‘변화’(transformation) 모티브다. 그녀는 가부장제 안의 권력관계가 변한다고 해서 여성의 억압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 주체의 자기 변화가 사회적 변화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컬러 퍼플>의 여주인공 씰리는 내적 변화를 통해 정신적 해방에 도달한다. 가장 최근 소설 <이제 우리의 마음을 열 때이다>는 자신의 삶을 관조하기 위해 아마존으로 여행을 떠난 한 여성 작가의 영적 깨달음을 그리고 있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남녀, 인종, 노소의 갈등을 초월하고 결국 대지에 대한 사랑을 깨닫는 영적 변화를 주제로 다룬다.

수필집 <어머니의 정원을 찾아서>는 흑인 여성으로서 부딪쳐온 다양한 현실 문제를 다루고 있는 앨리스 워커의 고전이다. 이 책은 여성의 정체성과 글쓰기, 여성과 육아, 여성 정치운동 참여의 중요성, 세대간 의사소통의 필요성, 여성 문학전통의 발굴, 흑인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억압적인 피부색 차별주의 같은 다양한 문제를 솔직하게 다룬다. 작가는 온갖 역경 속에서도 창조의 불꽃을 간직해왔던 흑인 여성 조상들이 남겨준 소중한 정신적 유산은 바로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사랑, 내적 강인함에 대한 존경심이라고 말한다. 그는 “개개의 여성은 다른 여성을 다시 태어나게 할 수 있다”며 여성들 사이 멘토링(mentoring) 역할의 중요성을 지적한다. 특히 이 책에 인용된 마틴 루터 킹의 부인인 코레타 킹의 “여성들은 과거의 부패와 관련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이야말로 새로운 리더십과 인류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부여할 수 있다… 여성들은 연민과 사랑, 용서를 실천함으로써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은 현재 한국 상황에서 여성의 역할을 생각해볼 때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또한 일하는 여성의 육아에 대한 두려움에 대해서도 아이들은 우리에게 장애가 되기보다는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일 안에서의 의미 있는 탈선’이라는 새로운 시각을 전해준다.

그녀는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글을 쓴 흑인 노예 여성들을 현대 흑인 여성 문학의 대모로 간주하고 필리스 휘틀리, 조라 닐 허스턴과 같은, 흑인 문학사에서 오랫동안 잊혀졌던 흑인 여성 작가들을 재발굴해왔다. 흑인 여성의 자아 발견과 글쓰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그녀는 <어머니의 정원을 찾아서>에서 평범한 흑인 여성들이 자서전 쓰기를 해봄으로써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자기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참여하는 것이며… 우리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라고 주장한 워커는 지금도 환경보존, 인디언 권익보호, 평화, 반핵운동 등 모든 종류의 억압에 맞서는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나아가 그녀는 지구화 현상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유색인종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착취를 고발하고 물질지상주의의 현대사회에서 자연과 영혼의 중요성,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인종문제에 대한 교육이 아직도 매우 부족한 한국 사회에서 워커의 작품들은 우리 안의 파시즘이라 할 수 있는 타인에 대한 가시적, 비가시적인 억압과 차별 문제를 똑바로 보게 한다. 그리고 다양한 인종, 세대, 남녀가 공존하며 서로 의사소통할 수 있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나갈 수 있을지 일깨워줄 것이다. 특히 진정한 여성해방은 여성 자신의 주체적 변화에 있다는 그녀의 메시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앨리스 워커(Alice Walker) 방문안내 site

http://www.msiftopia.or.kr/alice_main.asp

앨리스 워커(Alice Walker)에 관련된 최근 기사들

http://www.hani.co.kr/section-009000000/2004/05/009000000200405251826176.html

http://www.hani.co.kr/section-009100003/2004/05/00910000320040528182265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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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http://h21.hani.co.kr/section-021113000/2004/05/021113000200405270511008.html

'안전'은 실험되어야 한다

폭발사고 1년 뒤, KAIST 실험실을 가다… 안전을 위한 제도적 정비 · 예산 지원 여전히 부족

▣ 대전= 글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5월13일 대전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선 두 건의 추도식이 열렸다. 학교쪽이 공식적으로 준비한 ‘고 조정훈 학우 1주기 추모식’과 학생들이 마련한 ‘풍동실험실 사고 1주기 추모제’였다. 같은 사고를 놓고 벌어진 행사이지만 차이가 있었다. 학교의 초점이 ‘희생자’인 데 반해 학생들은 ‘사고’를 주목했다.


△ 공장기계가 가득한 카이스트 응용공학동 실험실. 안전관리 요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폭발의 상처는 깊었다

학교가 이미 세상에 ‘없는’ 이의 넋을 기렸다면, 학생들은 아직도 현실에 ‘있는’ 위험을 기억했다. 학생들에겐 아직도 ‘사고’가 계속되고 있었다.

추모제 1주일 뒤인 5월20일, 폭발사고가 일어났던 항공우주공학과 풍동실험실을 찾았다. 참혹했던 기억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았다. 파손된 건물은 수리를 마쳤고 실험실은 깨끗하게 정리돼 있었다. 목숨을 잃은 조정훈씨와 함께 사고를 당해 두 다리를 잃은 강지훈(29)씨는 “실험에 쓸 질소통을 구하려고 실험실 통로를 막고 있던 가스통을 들었다가 폭발이 일어났다”고 증언했다. 사고가 일어나기 전엔 실험실 안에 가스통을 쌓아두는 것이 예사였던 탓에 약간의 스파크만 일어도 폭발 위험이 있는 혼합가스조차 다른 가스통들과 뒤섞여 있었던 것이다. 사고 뒤 문제가 됐던 가스통들은 건물 밖 고압가스캐비닛에 놓였고, 실험실 안에 놓인 가스통도 쇠사슬로 묶여졌다. 겉으로 보기엔 말끔한 실험실이지만 연구원들에게 새겨진 상처는 깊어 보였다. 실험실 설비에 대해 물으려고 하자 한 학생이 취재진에게 다가와 “아무것도 답해줄 수 없다”며 나갈 것을 요구했다. 그동안 언론에 많이 시달린 탓인지 나름대로 기자들에게 냉담하게 대처하는 요령을 익힌 듯했다.


△ “크고 작은 사건이야 늘 있는 거지요” 선반 가득 화학약품이 얹혀 있는 자연과학동의 한 실험실.

현재 이 사건은 법적으로도 끝나지 않았다. 업무상 과실치상 혐의로 지도교수를 비롯해 실험실 내 박사후연구원(Post-Doctor) 1명과 학교 안전팀 직원 2명, 가스업체 직원 등 모두 5명이 피고자 신분에 놓인 채 재판이 진행 중이다. 피해자인 강지훈씨는 1년 남짓 지루한 입원 생활을 마치고 22일 병원에서 퇴원해 학교로 돌아왔으나 아직 보상금 액수가 정해지지 않은 상황이다. 풍동실험실 옆에는 조정훈씨 아버지인 조동길 교수(공주대 국어교육과)가 세운 추모비가 애잔함을 더했다.

안전관리 요원 절대 부족

풍동실험실을 나와 자연과학동의 한 실험실에 들렀다. 각종 시약이 책상 위 선반에 빼곡히 얹혀 있었다. 화학약품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솔벤트류의 약품인데 별다른 해는 없어요.” 실험실을 안내해주던 연구원은 “본래 실험실에 소화기가 5대 있었는데 얼마 전 다른 실험실에서 화재가 일어나 빌려줬다”고 예사롭게 말했다. “크고 작은 사건이야 늘 있는 거지요.” 그는 무엇보다 수소반응기가 실험실 안에 놓여 있고, 약품창고가 따로 없어 선반 위까지 약품이 들어차 있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외국 실험실에 가보니 수소반응기는 야외에 따로 방을 만들어 사방에 안전벽을 둘러쳐놓았더라고요. 우리는 이처럼 실험실 입구에 놓고 별다른 경고 표시도 없이 사용하고 있지요.”


△ 폭발 사고 이후 쇠사슬로 묶어놓은 풍동실험실 가스통.

그는 되레 나이가 많은 박사급 연구원들이 안전사고에 대처하는 요령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각 실험실 학생들이 맡도록 돼 있는 ‘안전담당자’는 서류 처리, 검수영수증 챙기기 등 자질구레한 일들이 많아 주로 연차가 낮은 연구원들이 담당한다고 했다. 안전담당자가 학교에서 주관하는 안전교육을 받고 온다고 해도 책자를 나눠주는 정도이지 실질적으로 실험실 학생들에게 안전교육을 하기는 무리라고 했다.

그다음은 응용공학동의 공동실험실. 층고가 3층 정도 되는 커다란 실험실엔 선반, 굴삭기 등 공작기계가 가득했다. 응용공학동에서 장비 유지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직원(테크니션이라고 부른다) 홍석구씨는 “안전관리 요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과학기술원은 2000년 응용공학동의 실험실에서 진공펌프 가열로 재산피해 5천여만원 상당의 화재가 발생한 이후 안전체계를 새로 짰다. ‘안전팀’이란 별도 부서를 신설했으며, 학과장을 위원장으로 하고 3~5명의 교수와 테크니션이 참여하는 학과안전위원회와 그보다 더 상위 기구인 총괄안전위원회를 만들었다. 교수회의와 겸한 학과안전위원회 회의는 형식적인 업무 보고에 그치기 일쑤다. 안전팀에는 9명의 직원이 있는데, 이 중 보안담당·카드키·예비군민방위 담당자와 팀장을 빼면 가스·화공 등 안전분야의 직원은 4~5명밖에 되지 않는다. 이 인력만으로 300여곳이 넘는 실험실의 안전을 전적으로 책임지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엔 홍석구씨처럼 학과마다 소속된 테크니션들이 실험실을 순찰하며 문제점을 지적하는 정도인 것이다.

예산도 법령 제정도 도루묵


△ 고 조정훈씨 아버지가 세운 위령비.

홍씨는 “응용공학동만 해도 교수별로 27개 실험실이 있다. 100억원이 넘는 자산을 관리하며 장비를 보수하는 것이 테크니션의 주업무다. 여기에 안전담당까지 모두 책임지기는 무리”라며 학교가 연차적으로 예산을 확보해 기본적인 안전시설을 갖춰가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은 몇몇 유독가스 빼고는 대부분 가스통을 실험실 안에 두고 쓰고 있지요. 모든 가스통을 건물 밖에 둘 수 있도록 배관을 연결하고 가스나 연료라인을 설치할 때 중간밸브를 여러 개 둬야 합니다.” 14년 전 카이스트가 대전으로 옮겨오면서 지어진 건물들이 애초부터 실험실 용도로 설계돼 있지 않아 대피시설 같은 물리적 환경을 갖추지 않은 것도 지적했다.

한국과학기술원은 지난해 감시·방화·안전장비를 교체하는 내용의 ‘세이프 캠퍼스’ 계획안을 과학기술부에 요청했다. 공교롭게도 폭발사건이 있던 2003년 5월13일 ‘세이프 캠퍼스’ 예산설명회가 열렸다. 그러나 3개년에 걸쳐 80억여원이 드는 이 계획안은 예산을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폭발사고를 계기로 한동안 부산했던 실험실 안전관리 법령 제정 움직임도 부처간 갈등으로 잦아든 지 오래다.

한국과학기술원 학생회 산하 ‘안전쟁취특별위원회’ 활동을 하고 있는 한희석(27·전자과)씨는 “서울대 폭발사고(1999년)와 풍동실험실 사고는 이공계 명문대학에서 벌어진 대형 사고였기 때문에 관심을 모은 것이다. 그동안 어떤 사고가 있었는지 사례조차 제대로 수집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실험실의 위험은 카이스트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제는 전국 대학 실험실의 안전을 위해 서로 힘을 뭉쳐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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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ice 2004-05-30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고후 무엇이 달라졌나. 나는 학교에서 가입을 권유한 상해보험에 하나 들었고 (나는 강력하게 랩비로 랩원 모두를 가입시켜줄 것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내돈 내고 나만 들었다.--;;) 사고후 잠깐 총학 모임에 나갔었다. 진짜 너무 무서웠다. 새로 발족한 안전쟁취위원회에는 바쁘다는 이유로 참여를 못하는게 못내 아쉽다. (사실은 이것도 핑계겠지.)
지난 달에 안전팀에서 하는 안전교육을 대학원에 들어와서 처음(!) 받았는데 아저씨가 여러가지 문제가 많은 실험실의 사진들을 보여주며 "여기 어딘지 말안해도 다 알겠죠." 하는데 음. 정말 알 거 같았다. 사실 우리 실험실만 잘 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우리 층은 생화학과 이론화학랩들이 있어서 겉보기 등급은 우수하지만 우리 발 밑에는 위에 그림(자연과학동 이라고 나온..--;)과 같은 랩들이 수두룩하다. 만약의 사고를 대비해서 대피연습 같은 것도 필요할텐데 그런건 좀처럼 안하니 불안은 계속된다.
2001년에 영국의 MRC-LMB 라는 곳에 잠깐 가 있었는데 가서 제일 처음 받은 책이 실험실 안전지침이었고 직원이 여러 코스의 대피로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나서 매주 월요일 아침마다 사이렌이 울리면 정해진 대피로로 대피하는 훈련을 했다. 사실 그 연구소야 전부 분자생물학 연구실만 있으니 지금 내가 있는 화학과 건물보다 폭발 위험따위는 훨씬 적을 것이다. 그때는 한달에 한번만 해도 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이런 건 과한게 나은 것 같다.
지난 번에 학교 신문을 보는데 우리 학교 총장이었다가 열린 우리당 비례대표가 된 홍창선 당선자가 학생들과의 대화에서 안전문제에 대해 매우 안이한 태도를 보였다는 얘기를 보았다. 실험 하는 사람들이 조심해야지. 라던가? 시스템이 안되니 각자 알아서 조심하라는 건가? 헛. 실망이다. 이상한 과학기술진흥정책에 예산 쓰지 말고 세이프 캠퍼스나 해줬으면 좋겠다. 일단 살고 봐야 될거 아닌가.

zaniface 2004-06-01 0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창선이 뭘 해줄거라고 기대한적도 없다. 운좋게 때마침 총장이어서 금뱃지 다신 것일뿐. 쳇.

Choice 2004-06-01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기는. 그런 거 보면 나는 되게 순진한 거 같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