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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백질에 맞춰 신약을 디자인하라
“보세요. 단백질에 딱 달라붙어 단백질 기능을 억제하기도 하고 촉진하기도 하는 물질을 설계해 만들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황금알을 낳는 신약이 됩니다.”
지난 21일 낮 대전 대덕연구단지 안 생명공학기업 크리스탈지노믹스의 연구실에서 노성구 박사(연구이사)는 컴퓨터의 가상현실 프로그램에 나타난 거대한 단백질 그림들을 입체안경으로 바라보며, 단백질에 잘 붙는 신약 물질을 찾느라 골몰하고 있었다. 그 모양이 마치 자물쇠와 열쇠를 맞추는 아이들의 놀이와도 같다. 노 박사도 맞장구를 친다. “그래요. 모든 약의 공략 대상이 되는 질환 단백질의 3차원 구조를 요즘엔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으니까, 신약개발도 단백질의 생김새를 직접 따져가며 신약의 분자 구조를 설계하고 있어 자물쇠와 열쇠 맞추기와도 비슷해지고 있죠.”
신약 개발은 자물쇠·열쇠 맞추기
생명과학의 단백질 연구는 흔히 신약 개발의 지름길로 통한다. 비만 단백질, 암 억제 단백질, 면역 촉진 단백질 등 갖가지 단백질의 기능을 규명하는 연구성과가 잇따르는 것도 엄청난 부가가치를 안겨줄 신약 개발의 목표 때문이다.
영양소인 단백질은 뼈와 살, 머리카락과 손·발톱 등 우리 몸을 이루는 필수성분이기도 하지만, 단백질의 핵심임무는 따로 더 있다. 단백질은 우리 몸 안에서 3만~4만가지 유전자의 단백질 설계도에 따라 갖가지 모양새로 만들어져 생명을 작동하는 생체 조절과 신호의 매개자 구실을 한다. 나쁜 단백질은 병을 일으키기도, 좋은 단백질은 병에 저항하기도 한다. 당연히 질환 단백질을 필요에 따라 제어하는 물질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병을 정복하는 약이 되는 것이다.
노 박사는 “이 때문에 질환 단백질에 잘 달라붙는 특정 물질을 설계해 약으로 쓰려는 것이 모든 질환 단백질 연구의 궁극적 목표”라며 “특정 단백질에만 들어가 달라붙는 약물 열쇠를 설계하고 디자인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라고 말한다.
이 기업은 지난해 발기부전에 관여하는 단백질(PDE5)에 비아그라 약물이 어떻게 결합해 약효를 일으키는지의 ‘자물쇠와 열쇠’ 약효과정을 원자 수준에서 처음 규명해 저명 과학저널 <네이처>의 표지논문으로 발표한 바 있다. 최근엔 지방대사에 관여하는 단백질의 3차원 구조를 규명한 뒤, 이에 달라붙어 지방대사 기능을 촉진하는 비만치료 후보물질을 설계해 개발하기도 했다. 노 박사는 “앞으로도 여러 가지의 후보약물을 선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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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기부전에관여하는 단백질(PDE5)의 3차원 구조와, 이 단백질에 달라붙어 기능을 억제함으로써 발기부전을 치료하는 비아그라 약물(포도송이 형상)의 결합체 모습. 지난해 9월 〈네이처〉 표지에 실렸다. 크리스탈지노믹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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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백질 디자인으로 신약 개발” 새 흐름
아예 단백질 모양을 직접 바꿔 단백질의 기능을 약처럼 쓰는 일도 가능해졌다. 이른바 ‘단백질 신약’은 의약시장에서 새로운 흐름으로 등장하고 있다.
고규영 한국과학기술원 교수(의과학센터)도 생체조절 단백질의 ‘자물쇠와 열쇠’를 찾는 연구자다. 최근 허혈증·뇌졸중의 예방·치료에 도움이 되는 혈관 생성 단백질(안지오포이에틴)의 약효를 높이기 위해, 이 단백질의 불안정한 부분을 통째로 떼어내고 대신 안정적이며 활성도가 큰 구조를 끼어 새로운 치료 단백질을 만들었다. 일종의 재조립이다.
질환단백질 구조보며 억제물질 설계해 결합
때론 단백질모양 조작으로 치료기능 내기도
부작용 줄였지만 성공확률 아직은 1% 미만
단백질 신약은 자연상태의 단백질을 흉내내어 질환 단백질을 속이는 수법으로 세포를 보호하기도 한다. (그림참조) 고 교수는 “예컨대 염증은 염증 질환 단백질이 세포 수용체에 달라붙어 세포 안에 염증 신호를 전달해야 일어나는데, 세포 수용체를 닮은 단백질을 넣어주면 질환 단백질이 이것들에 달라붙어 세포는 안전하게 보호된다”며 “실제로 이런 단백질 신약이 해외에서 악성 류머티즘 치료제로 개발됐다”라고 말했다. 고 교수 연구팀은 치료 단백질을 여러 개 붙여 효능을 높이는 단백질 이중체·삼중체 등의 독특한 설계 기술을 개발해 확보하고 있다.
이봉진 서울대 교수(약학·생체막단백질구조연구실)도 ‘단백질 디자이너’다. 그는 토종 개구리에서 내성에 강한 세균에도 작용하는 항생물질(단백질)을 찾아낸 뒤, 약효를 높이기 위해 이 단백질의 구조를 고치는 데 성공했다. 이 교수는 “단백질이 세포 안으로 더 빨리 흡수돼 약효가 높아지도록 세포에 잘 달라붙는 구조로 단백질을 디자인했다”라고 말했다.
류성언 세포스위치단백질구조연구단장(생명공학연구원 박사)은 “예전에도 단백질 구조를 바꿔 새로운 치료 기능을 얻으려는 노력은 있었지만 최근 들어 단백질 구조에 대한 지식이 늘면서 효과적인 단백질 디자인이 가능해지고 있다”라며 “앞으로 새로운 디자인 단백질은 더 많이 출현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일한 나의 짝 찾기’가 관건
그러나 여전히 신약 개발은 쉽지 않은 길이다. 애써 찾은 신약이 독성과 부작용을 일으켜 실패하는 일이 부지기수다.
20가지 아미노산 수백개가 특정 서열로 연결된 사슬 구조의 단백질은 나노미터(㎚·10억분의 1m) 수준의 매우 작은 고분자이다. 이들은 세포 안팎에서 엄청나게 빠른 분자 운동을 하면서 다른 물질들과 수시로 부딛힌다. 이봉진 교수는 “무수한 분자 물질들이 우연히 무수하게 부딛히다가 자물쇠와 열쇠의 짝을 만나면 덥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며 “이 때 약물이 목표 단백질이 아닌 엉뚱한 단백질에도 결합하게 되면 부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약물이 아무 단백질에나 달라붙었다가는 큰 일이 나는 것이다.
노성구 박사는 “예컨대 비아그라는 공략대상인 ‘피디이5’ 단백질은 물론 구조가 비슷한 ‘피디이6’에도 6~7배 정도 약하게 결합하는데, 이렇게 되면 눈이 파랗게 보이는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며 “자물쇠와 열쇠는 유일한 짝을 갖도록 하는 게 신약 개발의 성패를 좌우한다”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단백질의 3차원 구조를 세세히 관찰하면서, 신약을 설계·조립하면 부작용의 확률은 크게 줄일 수 있지만 여전히 신약의 안전성은 또다른 중요한 문제로 남는다. 무수한 후보물질들도 동물실험은 물론, 다단계의 임상실험까지 거쳐야만 검증된 의약품으로 시장에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신약 성공 확률은 1% 미만이다.
노 박사는 “단백질 구조를 눈으로 보며 신약을 디자인할 수 있게 되면서, 단백질과 화합물의 신약 개발 경쟁은 ‘속도전’이 돼가고 있다”며 “단백질 구조 관측장비와 정보기술을 탄탄히 갖춘 한국도 이제 신약 개발에서 뒤지지 않는 경쟁력의 기반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한다”라고 말했다.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