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 창으로 본 과학의 풍경
①신화와 우주론
②유전자복제
③뇌는 마음을 얼마나 알까
④인간, 동물 그리고 진화
⑤인간과 로봇, 몸의 철학
⑥동양철학의 디지털문명답사
⑦수학과 미술의 물음, 아름다움이란
⑧우주개척시대, 지구 밖 인간의 존재
⑨나노과학과 미시역사의 눈
⑩세계와 입자의 근원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철학)
·근대성과 탈근대성 등 연구, 문화론 연구
·저서: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노마디즘> <자본을 넘어선 자본> 등
황우석 서울대 교수(수의학)
·생명복제와 줄기세포 연구, 장기이식용 무균돼지 연구
·2004년 2월 치료 목적의 인간 복제배아 줄기세포를 세계 처음 확립
·1999년 2월 젖소 복제 성공(영롱이)
20세기 들어와 과학은 더욱더 우리의 일상에서 먼 곳으로 ‘도망쳤다’. 생물학도 그렇다. 이제 그것은 우리가 아는 생물들을 우리가 친숙한 방식으로 다루지 않는다. 분자생물학, 유전학, 화학의 분석 기호들로 분해하여 다룬다. 그리곤 놀랄 만한 힘과 능력을 갖고 우리가 사는 세계로 되돌아온다. 알 수 없는 곳에 사는 놀라운, 또는 무서운 힘의 소유자, 그게 어쩌면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생물학의 이미지인지도 모른다.
황우석 서울대 교수와 함께 들어간 실험실이 바로 그 이미지가 사는 장소일 게다. 방진복을 입고 쑥스런 모자를 쓰고 공기 샤워로 세상 먼지를 털어내고 들어가는 곳. 우리가 사는 세계와 그런 식으로 분리되고 격리된 세계다.
그곳에선 돼지난소에서 미성숙한 난자를 추출하여 체세포의 핵을 이식하는 과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난소에서 난자를 채취하는 큰 탁자에는 외국인 유학생도 두 명 있었다. 난자를 기구로 붙잡아 핵을 떼내고, 체세포의 핵을 밀어넣는 모습이 액정화면으로 생중계된다. 그것은 복제된 돼지가 되어 우리의 세계로 돌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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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과학자 황우석 교수와 철학자 이진경 교수가 서울 신림동 서울대학교 안 황 교수의 실험실에서 만나 유전자복제에 담긴 생물학과 철학의 의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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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생명은 기계경계 못넘고
다친 몸 자연상태화 기여뜻
원본중요성 시대 초월
● 사실 20세기 후반의 과학사에서 ‘유전자’라는 개념만큼 대중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개념이 있을까? 최근에는 ‘우울증 유전자’, ‘비만 유전자’, 심지어 ‘불륜 유전자’까지 발견되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범죄수사나 친자감별에 사용되는 유전자 감식도 그렇다. 어떤 것도 유전자 개념을 들이대면 할 말을 잃게 된다. 유전자는 이제 다른 개념들을 침묵 속에 가두는 거대한 권력을 갖게 된 것이다.
황 교수는 이런 ‘유전자 담론’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지금까지 유전자 연구를 통해 우리가 알아낸 것은, 언어로 치면 한글 자모음을 알게 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으로 생명의 비밀을 알았다고 하는 것은 엄청난 오만이고 과장이라는 것이다. 유전자 만능론 식의 생각이 대중매체를 통해, 그리고 유전자라는 개념 자체가 함축하는 ‘개념적 환상’을 통해 유포되고 부풀려진 것은 분명하다. 가령 유전자만 있으면 공룡도 복제할 수 있다는 것은 영화에서나 가능한 턱없는 상상이다. 살아 있는 공룡알(난자)이 없으면 복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흘러가는 시간은 복제본의 편
또다른 진화 시작된건 아닌가
● 그렇지만 분자생물학이나 유전공학은 생명과 기계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보던 오래된 통념을 깨부순 게 아닐까? 노벨상 수상 생물학자 자크 모노는 세포를 “화학적으로 작동하는 기계”라고 정의한 바 있고, 그의 동료 프랑소아 자콥은 생명을 특별한 실체로 보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며, 생명과 기계가 근본적으로 하나가 되었음을 역설한 바 있다.
그러나 황 교수는 유전학의 발전이 생명에 대한 고정된 통념으론 또 다른 생명을 이해할 수 없음을 알게 해주지만, 생명과 기계의 경계가 사라졌다고 볼 순 없다고 말한다. 생명이란 ‘물질+정신+알파’여서 기계적으로 볼 수 없는 영역이 있다고 말한다. 그게 생명이 숭고한 이유라는 것이다. 세간의 상식 안에 있는 것일까, 그것과 화해하려는 것일까?
“공룡복제 영화에서나 가능”
그래서인지 생명과 기계의 경계가 무너지는 또 하나의 지점인 인공생명에 대해서도 그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유전학이나 인공생명 연구가 그런 바람의 범위 안에, 생명과 기계의 넘을 수 없는 선 안에 머물러 줄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유전자 복제가 필경 함축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는 원본과 복제의 관계에 대한 것일게다. 단순화하면, 복제된 것이 원본보다 우월한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사실 원본의 우월성에 대한 관념은 서양의 경우 플라톤 이래 오래 지속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의 철학이 플라톤주의를 비판하면서 원본으로 회귀하는 길을 끊어버린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원본 없는 복제, 또는 원본보다 더 원본 같은 복제가 ‘포스트모던 시대’의 대표적 징후 아닌가! 더구나 유전자를 조작하고 변형하는 것은 좀더 나은 결과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황우석 교수는 원본의 중요성은 시대를 초월해서 강조되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적어도 지금 수준에서는 변형된 복제본은 원본과 비교하자면 자연환경에 대해 아주 열악한 능력을 지녀, 기형이나 원인모를 급사, 비자연적 발육 등이 빈번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반면 원본은 수천년 동안 환경에 적응한 것이어서 안정적이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 수준의 문제라면, 장기적으로는 어떨까? 이에 대해 장기적으로는 더 나아질 가능성이 있다고 그는 말한다. 시간은 복제본의 편인 셈이다.
● 그는 줄기세포를 이용한 세포치료나 장기이식용 복제동물의 생산은 “좀더 나은 것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손상된 (인간의) 신체를 자연상태로 되돌리려는 것”임을 역설한다. 물론 병이 없는 상태, 결함이 없는 상태가 자연상태인가 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로 여전히 남을 것이다. 여기서 그는 “개량이란 동식물의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고, 인간에게는 개량이지만 자연(‘당사자’)의 관점에서 보면 개악”이라는 인상적인 말을 덧붙인다. 지나치게 젖이 많이 나오게 된 젖소나, 너무 이삭이 많아 바람만 좀 세게 불어도 꺾어지는 벼가 그런 경우다.
이런 점에서 그는 개량이란 이름의 “반자연적이고 인위적인 노력”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여기서도 그는 세인의 ‘양식’에 훨씬 가까워보인다. 그의 ‘철학’이 그래서일까? 아니면 그동안 감수해야 했던 많은 비판적 시선 속에서 그렇게 보게 된 것일까? 세인의 양식(‘여론’)을 거슬러서는 실험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생물학 자체가 충분히 정치적인 것이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병 없는 상태가 자연일까
유전자 복제가 형질전환을 위해 상이한 종의 유전자를 이용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탄생한 것은 종의 벽을 넘어서는 것은 아닐까? 거미줄 원료를 생산하는 염소, 인간의 신장을 생산하는 돼지 등. 좀더 나아간다면 말의 발을 가진 개나 아가미를 가진 고양이 등이 탄생할 수도 있는 게 아닐까?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자연교배되고 대를 이어 재생산된다면 하나의 독립적 형질로 굳어질 것이다. 물론 아무 것이든 섞을 순 없으며, 수용 가능한 유전자와 그렇지 않은 것이 있을 것이다. 수용 가능한 것이란 상이한 유전자가 ‘공생’하는 것을 뜻하며, 그렇게 해서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은 자연생태계에서 수용 가능한 것임을 뜻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종의 벽을 뛰어넘는 것이라고 할 순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 하지만 다른 박테리아에게 잡아먹혔지만 ‘소화되지 않은 채’ 살아남은 박테리아가, 그를 잡아먹은 박테리아와 공생하게 되면서 핵이 있는 진핵생물이 탄생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 세포 속의 미토콘드리아나 식물 세포의 엽록체는 이처럼 다른 생물체 안에 살며 공생하게 된 박테리아에서 기원한다. 그렇다면 유전자의 ‘공생’ 역시 새로운 종의 탄생이나 종의 벽을 넘는 진화의 선을 그리는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는 자연적 진화와는 다른 또 하나의 진화의 경로가 존재하게 되었음을 뜻하는 게 아닐까? 이는 아마도 유전자 복제와 변형을 통해 생물학 자체가 변형되어야 함을 뜻하는 것일 게다.
유전자 변형은 이미 생물학의 경계를 넘어서기 시작한 건지도 모른다. <공각기동대>의 쿠사나기 소령 식으로 말해보자. “자, 어디로 갈까? 변이의 바다는 넓고도 광대해!”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