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해볼까.
...
꽃이 피었겠지. 어쨌든 봄이니까.
봄은 도둑처럼 찾아오고, 봄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꽃샘추위가 왔단다. 그러니까,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샘내는 봄은 꼭 '아수라 백작'을 닮았다.
'밥벌이의 지겨움'을 다시 꺼내는 일도 충분히 지겨운 일. 그래서 입을 다물고 묵묵히 바라봤다. 몇 초쯤. '소소한 일상'을. 그 '일상적인 삶'을. 그 안에서 '겨우 존재하는 인간'을. 그건 마치 '코너'에 몰린 복서가 커다랗고 텅 빈 링을 바라보는 일과 비슷하다. 조금 '병들어' 있다는 말이다.
이크, 조심해!
나는 늘 패배하는 3류 복서를 닮은 가수를 알고 있다. 그의 이름은 엘리엇 스미스. 속삭이듯 읊조리는 그의 노랫말도. 그는 이렇게 노래했다.
마지막이 어떨지, 아무도 말해주진 않아요. 당신이 직접 보기 전까진.
no one says until it shows and you see how it is.
편히 잠들었기를.
갑자기 인간은 '놀이하는 동물'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팔자 좋으시네요, 호이징하 씨! 그래도 역시 놀아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 들지 않는 건 또 아니어서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그러니까 내 방을. '읽GO 듣GO 달렸던(?)', 그래봤자 어쩔 수 없는 작은 방을.
물론 '검은 백조' 같은 게 나타날 리 없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고, 내일의 바지를 입어야한다. 변함없이. 그래도. 작은 생각이 뇌 한쪽 구석에서 뇌까린다. 그래도.
그건 이런 말이었다.
책을, 오오, 내게 더 많은 책을!
이라고 하면 물론 거짓말이고. 결국 계속해서 늘어만 가는 '바벨의 도서관' 같은 책들에 대한 이야기. 보이는 게 결국 책이니, 어떻게든 해야 할게 아닌가. 훗날을 대비해 비축한 땔감으로 치기엔 빙하기가 너무 멀다. 가뜩이나 지구온난화가… 그래서, 별 수 없이, 조금 놀아주기로 했다. 명절날 조카들의 습격을 받은 삼촌 같은 기분으로.
뭐? 놀자고? 그래, 그래 알았어… 뭐 할까, 응? 뭐?
(얘네 엄마는 영영 안 올 건가… 나는 뭐 백순가…)
그건 아마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놀이가 될 것이다. 물론 읽은 책이 더 많다. 진짜로… (?) 하지만 읽은 책에 대해 말하는 건 놀이는 아닌 것 같다. 무슨 학술대회도 아니고. "그러니까 이 부분이 바로 전작을 통해 홈즈가 제임스 왓슨을 왓슨이라 부르지 않고 '제임스'라고 부르는 유일한 장면입니다. 제 견해로 이때 홈즈의 의도 혹은 무의식은…" 보어~링!
어쩌면 '소설처럼' 아니면 '통상관념사전'처럼, 툭툭 던지는 두서없는 이야기들. 마이클 더다처럼 서평으로 퓰리처상을 받자는 것도 아니고, 책을 열심히 홍보해 '2009 소비자가 뽑은 최고 브랜드MD상'을 받자는 것도 아니니. 그렇다고 주체할 수 없는 책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도 아니다. 그대로 무용한 것. 그러니까 다시, '소설처럼'.
이건 결국 몸부림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할 때의 그 몸짓. 사실 나는 소리라도 질러야 할지 모른다. "우리들의 광기를 참고 견딜 길을 가르쳐 달라!" 하지만 대답은 없고, 나는 그냥 몸부림치기로 한다…
'우리 앞에 놓인 생'. 그게 진정 '상품화된 사회에서 찍어내었을 뿐인 그저 그런 인생'이라 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돌을 굴리는 일이다. 별 수 있나? 별 수 없는 건 별 수 없는 거고, 별 수 있는 건 별 수 있는 거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별 수 없는 일에 속한다. 대부분의 일처럼 이 역시 "아무 도리 없"는 것이다.
영차, 영차, 영차! 끄응. 아버지 돌 굴러가…
거창하게 '인생사용법' 따위의 이름을 붙일 생각은 없다. 별 수 없는 인생에 사용법씩이나! 굳이 따지자면 흥에 취해 끄적이는 '환상수첩'에 가까울까. 좀 더 쓰자면 총체적이고 역사적이며 폭압적인 동시에 매혹적인 인생에 대한 '미완에 그칠 뿐인 프로젝트' 혹은 나와 '당신 인생의 이야기' 정도? 라고 하면 역시 거짓말이고…
그냥 이렇게 물어야겠다.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을, 한번쯤 바라보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
...
......
없다고 치고.
그리하여 우리의 놀이는 이곳에서 시작해 이곳에서 끝난다. (아직 시작도 안했기에 언제 끝날지는 모른다. 물론 끝에는 많은 것이 달라져있겠지만…)
모든 놀이가 그렇듯 여기에도 최소한의 규칙은 필요하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의 <블랙 스완>을 다시 불러 보자면-
움베르토 에코는 박학다식하고 재기 발랄하면서 통찰력을 갖춘 몇 안 되는 학자의 반열에 든다. (3만 권의 장서를 자랑하는) 큰 서재를 갖고 있는 그는 방문자를 두 부류로 나눈다고 한다. 첫째 부류는 다음과 같이 반응한다. "와, 시뇨레 에코 박사님! 정말 대단한 서재군요. 그런데 이 중에서 몇 권이나 읽으셨나요?"
두 번째 부류는 매우 적은데, 개인 서재란 혼자 우쭐하는 장식물이 아니라 연구를 위한 도구임을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들이다. 맞다. 이미 읽은 책은 아직 읽지 않은 책보다 한참 가치가 떨어지는 법이다. 재력이 있든 없든, 장기 대출 이자율이 오르든 말든, 최근 부동산 시장이 어려워지든 말든, 서재에는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과 관련된 책을 채워야 한다.
박학다식도 재기발랄도 통찰력도 그렇다고 씨뇨레도 나랑은 상관없는 얘기지만 그럼에도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읽은 책'은 그의 현재를 말해줄 수도 있겠지만, 미래는 그가 '읽으려 하는 책'으로 더 잘 설명할 수 있기에. 어제의 문학소녀가 오늘부로 재테크 서적을 쌓아 놓기 시작한다면? 답은 뻔하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에서 피에르 바야르는 책을 네 가지로 분류한다. UB(Unknown Book 전혀 접해보지 못한 책), SB(Skimmed Book 대충 뒤적거려 본 책), HB(Heard Book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알게 된 책), FB(Forgotten Book 읽었지만 내용을 잊어버린 책). 나는 여기에 하나를 보탠다. OB(Owned Book 가지고 있던/혹은 있는 책).
실로 서재는, 그러니까 책장은, 매우 미묘한 공간이다. 그것은 '추가'될 것이 아니라 '팽창'해야 될 것이지만 실제 우리의 현실에서 추가되지 않고 팽창하는 것은 몸무게 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직 읽지 않은 책이 집에 어느새 한가득 쌓이는 순간,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처분할 것인가?
이때 처분의 일 순위는 이미 읽은 책이다. 일차적으로는 불유쾌한 독서를 제공한 책- 한 마디로 재미없는 책이 버려진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책은 점점 더 늘어나고, 책꽂이는 처녀 때 입던 치마처럼 요지부동이라면… 이 답도 뻔하다. 결국, 진정으로 신실한(?) 독자라면 읽지 않은 책으로 가득한 책장을 가지게 된다고 나는 믿는다. 할렐루야!
물론 어떤 이를 '알기' 위해선 오늘의 책꽂이를 보아야 하는 동시에 어제의 책꽂이를 함께 보아야 할 것이다. 한때 그곳에 자리했다 지금은 사라진 책들을. 그 그림자를. 우리의 오늘은 결국 어제와 내일의 사이이므로, 우리의 독서 역시 읽은 책과 읽지 않은 책의 사이에 존재하므로.
... 뭐 어쩌자고?
허튼 소리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냥 책장을 훑어보고 꽂혀 있는 책에 대해 담소라도 나누자는 이야기를 이렇게. 하여 길고 지루하고 실은 책 얘기도 별로 안 나오는 이 프롤로그를 한 편의 시로 이만 마무리하기로 하자. 그러니까, 꺼실꺼실하고 지저분한 손에 대한 변명으로. 끝이 좋으면 다 좋은 법이니까.
해가 빛나고 새가 울고
여기 저기 졸참나무 숲도
흐려 보일 때
꺼실꺼실하고 지저분한 손을
나는 앞으로 가지게 된다.
- '봄', 미야자와 겐지, <봄과 아수라 제3집>
바야흐로,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