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 강준만 고종석 박노자. 21세기의 첫 십 년도 어느덧 저물어 가는 오늘, 이 이름들을 같은 자리에 쓰고 있자니 조금 묘하다. 마치 "옛날 옛날"로 시작해서 "그리하여 강호, 그 네 명의 고수는…"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라도 해야할 것 같은 기분. 무협지 비유가 너무 386 처럼 느껴진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꽃보다 논객'! F4 재결성!" ('죄송합니다'를 덧붙이는 전제 하에서만 가능하다)
기억의 책꽂이에서 몇 권의 책을 뒤적여 본다. <Why Not?>(00년 2월), <대중 문화의 겉과 속>(00년 2월), <코드 훔치기>(00년 10월), <당신들의 대한민국>(01년 12월). 각기 다른 성향의 책들을 비슷한 이유로 읽었던 게 (조금 보태) 벌써 십 년 전 일이다. 그렇다면 물어야겠다. 오늘, 무엇이 당신들을 다시 한 자리에 모았나요?
사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호들갑에 가깝다. 강준만은 말할 것도 없고, 고종석과 박노자 역시 꾸준히 책을 내오지 않았는가. 엄밀히 말해 제목에 쓰인 '귀환'의 말뜻에 맞는 것은 유시민 하나 뿐. 그렇다고 이들 네 명이 의기투합해서 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도 아닌데. 하지만 이들이 '동시에' 또한 '바로 지금' 나왔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지 않을까? (개인적으론 '매출'을 의미한다…)
먼저 지난 십 년을 돌아봐야 할 것 같다. 두 번의 대통령 선거와 한 번의 정권 교체. 단군이래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학력과 IMF와 근접조우하는 경제 위기. 몇 번의 소동과 난리. "브루투스 너마저" 하는 실망과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하는 절망. 나아진 것 하나 없는 살림과 해준 것 하나 없는 사회. 뭐 그런 것들.
점점 좁아지는 살 길과 얇아지는 삶의 기반 위에서 보낸 십 년 동안 '한국식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어느새 우리의 뼛속 깊이 자리 잡았다. 농담처럼 던지는, 그러나 웃을 순 없는 이런 명제(혹은 '절대명제')들.
① 사람은 선행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자본에 의해서만 의로워진다.
② 인간은 자본보다 우위에 있지 않고 오히려 자본에 의하여 기초가 부여된다.
③ 자본가와 노동자의 구별을 배제, 자본 앞에서의 평등- 엄밀하게는 자본을 통한 것만이 권위를 갖는다.
그러니 정치 논객의 시대는 가고 경제 논객의 시대가 왔다는 말이 떠돌던 것도 당연하다(정확히 얼마나 떠돌았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이 말을 지난 연말 Y*S24의 *** 대리에게 들었다). 우리는 미네르바를 '선지자'로 여겼던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제 밧모 섬에 유배되었던 누군가가 남긴 것과 같은 '계시록'을 기다릴 차례인가?)
하지만 미네르바를 잡아들인 것은 결국 '정치'였다. 용산을 재개발하려던 것은 '경제논리'였겠지만, 그것이 용산참사를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설명하지 못하기는 경제논객도 마찬가지. 그리하여 결국 '정치논객 F4'가 돌아오고야 말았던 것이니… 이것이 책을 파는 '소명'에 부응해 열심히 팔고 닦고 조이며 '사람노릇'하는 인문MD의 짧은 소견.
결국 우리는 한 번쯤 우리 자신을 포함한 이 사회를 돌아볼 필요가 있고, 이 책들은 그러라고 나왔다는 말이다. 설령 어떤 호기로 우리 경제가 상승곡선을 그린다고 해도 그게 해답은 될 수 없을 테니까. 30년 쯤 후에 '버릇없는 요즘 애들'한테 "그래도 그 분 덕에 경제가… 아니면 니가 지금 이렇게 밥 먹고 있을 줄 알아?"라고 타박할 희망에 부풀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생각하면 할수록 이 글에서 쓴 정치논객/경제논객의 프레임은 이상하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그 얘기를 들은 건 Y*S24의… 사실 이상하기로 치면 이 글 전문이 그렇다. 하지만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나는 마치 백스페이스 키가 고장난 것처럼 이 글을 반성하지 않기로 한다)
이 책들을 넣고 보니 위의 경제/정치 프레임이 혼란스러웠던 이유를 알겠다. 이게 다 '말' 때문이다. 알라딘에는 사회과학과 경제경영 분류가 따로 있고, 경제학은 경제경영의 하위 분류다. (덧붙이자면 출판계에서는 흔히 사회과학 분류를 교X문고 식으로 '정치사회'라고도 부른다) 여기까진 좋다. 그런데 이 '경제학'이란 것이 실로 애매한 것이니, 이것 참, 굳이 얘기를 하자면.
기왕 경제학 분류가 따로 있으니 경제학이란 제목이 붙은 것은 경제경영으로 가면 문제가 없겠지. 굳이 만세를 부를 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만사 OK, <경제학 콘서트>나 <행동 경제학>, <상식 밖의 경제학> 등등 경제학 분야의 스테디셀러들. 나심탈레브의 <블랙 스완>, <2009 공황전야>, 폴 크루그먼, 토머스 프리드먼… 역시 모두 경제경영에 속하는 저자들이다. 그래.
그렇다면 '경제학자' 우석훈의 책들은 어떨까? <88만원 세대>, <조직의 재발견> 등등. '한국경제대안'이라는 시리즈 명도 붙어있으니 역시 경제경영이겠죠. 하지만 이런! 애석(?)하게도 알라딘에서 우석훈은 사회과학 저자다. 인문 및 사회과학 및 역사 및 과학 분야를 맡고 있는 MD에겐 참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아무튼 그렇다. (덧붙이자면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원래 경제경영 도서였다가, 불온서적이 화제가 되면서 사회과학으로 추가 분류를 하게 된 케이스)
자, 그렇게 해서 <프로메테우스 경제학>과 <살림의 경제학>은 '경제학'이란 제목을 당당히 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에 놓이게 된 것이니. (함께 놓고 보는 저 네 권의 표지는 어쩐지 데칼코마니 같다)
<프로메테우스 경제학>은 '새로운 세대를 위한 맑스경제학 강의'라는 부제에서 보이듯, 작금의 경제상황을 맑스 경제학의 틀로 바라보도록 돕는 책이다. 이를테면 관점의 전환? 지난 연말 출간되어 많은 사랑을 받았던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과 함께 읽으면 좋겠다.
강수돌 교수의 <살림의 경제학>은 그보다 좀 더 '살림'에, 그러니까 '인정'에 와닿는 책이다. (조금 이상한 표현이긴 하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나아진 것 없는 살림살이, 더 바락바락 산다고 나아질까? 꿈깨!" 참으로 마음에 와닿지 아니할 수 없다…
'새로운 자본주의'의 폐해를 고발하고 있는 <뉴캐피털리즘>과 '신자유주의' 비판서인 <네오리버럴리즘> 역시 함께 읽으면 좋을 책들이다. 제목은 물론이고 표지도 비슷. '뉴'는 굳이 따지면 대중서에 가깝고, '네오'는 조금 더 '본격'적이다. (표지의 '달러'는 난이도 표시? 1달러 1장 vs 1달러 수백장… 물론 그 정도 차이는 아니다;)
"지금까지 어떤 사상가도 구조조정과 재조직화, 아웃소싱으로 대표되는 기업 문화의 끔찍한 변화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하지만 세넷만큼은 예외다. 그처럼 놀라운 통찰력을 지닌 지식인이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이 책에서 세넷은 사통팔달한 지식과 샘솟는 지성, 확고한 도덕적 세계관으로 새로운 기업 문화를 해부한다. 대단히 지적이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그러므로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이다."
- 바버라 에렌라이히, <빈곤의 경제> 저자 (<뉴캐피털리즘> 추천사. 개인적으로 '사통팔달'이라 옮긴 부분의 원문이 미친듯이 궁금;; 원문은 다음과 같다. "In The Culture of New Capitalism Sennett addresses the new corporate culture with his usual vast erudition, endlessly supple intellect, and firm moral outlook." 그야말로 '신묘한' 번역이다…)
"학술적이면서도, 참여적인 책이다. 신자유주의란 무엇인지, 신자유주의를 통해 부를 획득한 사람들과 그보다 훨씬 많은 피수탈자들에게 그것이 미친 실제 영향은 무엇인지 숨김없이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이 설정한 지리적 범위와 분석 범주는 이 책이 삶을 위협하는 복잡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진정 신뢰할 만한 가이드가 되도록 한다."
- 레슬리 스클레어, 런던정경대 교수 (<네오리버럴리즘> 추천사)
다시 강수돌 교수. <자본을 넘어, 노동을 넘어>는 스승 홀거 하이데와 함께 쓴 책으로 "하이데 교수가 먼저 각 부의 앞부분에서 노동의 세계화(1부)와 노동의 주체성(2부), 노동 사회로부터의 탈출구(3부)에 대한 이론적 서술을 열고 나면 바로 뒤를 이어 제자 강수돌이 한국 사회의 구체적 상황에 이 이론을 녹여 내 보여 주는 형식을"(알라딘 책소개) 하고 있다.
무엇보다 독일과 한국의 비교가 먼저 눈에 띄는데, OECD 가입국 중 '최장노동시간'을 자랑하는 한국과 '최단노동시간'을 자랑하는 독일의 연간 근무 시간을 비교하면 4~5개월 차이가 난다고 한다… 유후! 살림살이는 좀 나아들 지셨나요.
소스타인 베블런의 <자본의 본성에 관하여>와 막스 베버의 <경제와 사회 : 공동체들>은 고전이고, MD에게는 고전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면책특권'이 있다……………………………………………
<게으를 권리>는 <게으를 수 있는 권리>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어 있는 책이다. 개인적으론 <게으를 권리>라는 제목이 더 좋다. '게으를 권리'라는 말에는 "나는 게으를 거야!"라는 당당함이 느껴지는 반면, '게으를 수 있는 권리'라는 말은 "그래도 혹시... 게으를 수도 있잖을까요?"라고 하는 듯한 느낌이… (지극히 개인적인 언어취향이다)
저자인 폴 라파르그는 무려 마르크스의 사위에 프랑스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자였다고 한다. 1842년 쿠바의 산티아고에서 혼혈로 태어나 프랑스로 이주, 의사로 일하며 아나키스트 성향의 프루동주의자로 정치활동을 시작했으나 마르크스와의 만남으로 인해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고 69세가 되던 1911년, 노쇠함으로 인해 '운동'에 더 이상 기여할 수가 없다고 판단, 아내와 동반자살을 했다는 이력을 가지고 있다.
"노동계급이 자신들을 지배하고 자신들의 본성을 타락시키는 악덕을 자신들의 마음속에서 근절시키고 스스로 막강한 세력으로 등장해서 자본주의적 착취를 당할 권리에 불과한 '인간의 권리'나 비참해질 권리에 불과한 '일할 권리'를 요구하기보다는 누구에게도 1일 3시간 이상의 노동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하기로 결단을 내린다면 지구는, 이 오래된 지구는 자기 안에서 새로운 우주가 생겨나는 개벽의 기쁨으로 몸을 떨게 될 것이다." (48쪽 중에서) 같은 '낭만적인' 생각과
"자본주의가 여성을 집 밖으로 나오게 해서 사회적 생산에 투입한 이유는 여성을 해방시키려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남성을 착취하는 것보다 더 심하게 여성을 착취하려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여성을 결혼이라는 울타리에 가둘 목적으로 구축된 경제적, 법적, 정치적, 윤리적 장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조심했다.
자본에 의해 착취당하는 여성은 자유로운 노동자라는 비참한 삶도 감내해야 하지만 과거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족쇄도 감내해야 한다. 이로 인해 여성의 경제적 비참함은 더욱 심해진다." (209쪽) 같은 상당히 날카로운 통찰을 모두 만날 수 있다.
나 역시 마음 먹고 '실천하는 지성' 마냥, 마지막 부분에서는 조금 게을러 보기로 한다.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는 참 절절한 제목이다.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이런 노래도 생각나고(이유는 모름)… 따뜻한 봄날에 다시 읽어 봄직한 책이다.
<악! 법이라고?>는 프레시안 등에 연재되었던 카툰 릴레이를 책으로 모은 것. 온라인에 연재할 때 '무한펌질'을 장려했던 만화가들은 이번엔 인세를 받지 않기로 했다고. 덕분에 책값은 5,000원이다. (10%할인해서 4,500원…)
<권력의 병리학>의 부제는 "왜 질병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먼저 찾아오는가"이다. <센코노믹스>의 '아마티아 센'이 추천사를 썼고, 저자 폴 파머는 '동양인 최초 아이비리그 학장'으로 주목받은 김용 교수의 '절친'이라고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책의 제목으로 이 책을 다시 설명한다면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고 또한 병들었는가?"가 되겠다.
새물결 What's Up 총서 다섯 번째는 국내저자의 책이다. <말하는 입과 먹는 입>은 "복잡하고 온갖 것이 뒤엉켜 있는 상황에서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벤야민의 용어를 빌리자면) 새로운 사유의 성좌들 속에 새로이 배치해 앞으로의 사유의 항로를 탐색하려는 진중한 고민이라고 할 수 있다. 발터 벤야민과 조르조 아감벤 그리고 칼 슈미트가 저자가 호출하는 새로운 성좌들인데, 이러한 이름만으로도 벌써 우리 지식계에서는 논란이 되고도 남음이 있을"(알라딘 책소개) 것이라고 한다…
<자음과모음 2008 겨울호>에서 "발터 벤야민과 조르조 아감벤 그리고 칼 슈미트가 저자가 호출하는 새로운 성좌들"에 해당하는 꼭지를 먼저 본 일이 있는데, 재미있었다. 나는 게으르므로, 더 할 말은 없는 것 같다….
오늘 마지막은 한 편의 영화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최고작(이라고 나는 생각하는) <인썸니아>. 지난 화요일 아침, 비몽사몽간에 켠 TV에서 마지막 장면이 지나가고 있었다.
영화 속 알 파치노는 '늙은 개' 같은 인물이다. 과거의 신화 속에 존재했던 영웅들, '맹수' 같은 인간들이 멸종된 자본주의 사회에는 대신 '개 같은' 인간들이 존재한다. '개'는 살아가나 화해할 수 없기에 불행하고 그것을 결코 잊지 않지만 또한 끈질기게 살아간다.
안개 속에서 연쇄살인범을 쫓던 알 파치노는 앞서 가던 동료를 총으로 쏘아 죽이게 되고, 그 장면을 목격한 연쇄살인범이 집요하게 그를 협박하고 괴롭힌다. 알 파치노는 불면증에 시달리며 자신이 동료를 쏜 것이 실수인지 무의식적인 고의인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물어보지만 범인을 추격하는 것 또한 멈추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알 파치노는 후배 여형사와 함께 로빈 윌리암스를 체포 직전으로 몰아넣고, 그 과정에서 후배는 선배가 알 파치노의 총에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일단 로빈 윌리암스를 체포하는데 알 파치노는 그만 총에 맞는다. 그리고 죽어간다. (이것이 '늙은 개'들의 죽음의 형식이다)
여형사는 쓰러져 있는 알 파치노에게, 곧 구급차가 올거라고, 다 괜찮을 거라고, 범인이 갖고 있던 선배님의 총탄은 이 호수에 던져서 영원히 없에 버리겠다고, 선배님을 믿는다고, 울먹이지만 힘겹게 손을 든 알 파치노는 그녀를 말릴 뿐이다. "그러지 마" 놀란 후배가 묻는다. "왜요?" 알 파치노가 대답한다. "네 자신을 잃지 마" 그리고 물러선 카메라는 알라스카의 눈덮인 산과 깨질듯 투명한 호수 사이에 '작게 존재하는' 그들의 모습을 얼마간 비추고 이내 크레딧이 올라간다.
많은 찬사를 받았던 <메멘토>와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다크 나이트> 사이의 <인썸니아>를 최고작으로 뽑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기발한 트릭에 의존한 <메멘토>와 너무 거대해진 <다크 나이트> 사이에서, 이미 그는 인간 실존의 미세한 진동을, 불안을 그려내고 있었던 것이다. 일상이 어떻게 어그러지는지, 그리하여 그 작은 진동들이 어떻게 공명하여, 깨어지는 와인잔처럼, 한 인물을 무너지게 하는지, 그리고 그것은 왜 돌이킬 수 없는지를 거장의 솜씨로 잡아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물을 수밖에. 누군들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아, 이렇게 쓰고 나니 또 한명의 '늙은 개' 김훈 선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언젠가 김훈은 이렇게 썼다.
"친구들아, 밥벌이에는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러나 우리들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 이걸 잊지 말고 또다시 각자 핸드폰을 차고 거리로 나가서 꾸역꾸역 밥을 벌자. 무슨 도리 있겠는가. 아무 도리 없다"
* 대책 없이 온 봄, 아무 도리 없이 이번 주도 만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