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기억으로도 '마지막 황제'는 슬픈 영화였다. 무언가 저물어 가고 있다는 막연한 먹먹함- 그리고 그 앞에 놓인 너무나도 작은 황제 푸이의 모습은, 그보다 몇 살쯤 더 먹은 타향의 꼬맹이에게도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를, 애정을 갖고 옆에서 지켜본 이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자금성의 황혼>이 그 답이 될 것 같다. 군주제를 옹호했던 황제의 스승 존스턴이 그려내는 제국의 최후는 일종의 장엄한 애가(哀歌)다. 물론 귀한 사료들이 가득한 역사서이기도.

<한국의 주체성>의 탁석산이 21세기 첫 십년이 끝날 무렵에 다시금 내놓은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우리에게 말을 거는 책이다. 어느 순간, '사는 대로 생각'해 온 우리들에게 그가 제시하는 한국인의 상은 꽤나 흥미롭다. 그가 파악하는 한국인의 동력은 '실용주의'다. 실용주의라고? 윤리 시간에 익히 들었던 존 듀이 식의 프래그머티즘(pragmatism)? 아니면 얼마 듣진 않았지만 이젠 이력이 나버린 MB정부 식의 실용주의? 물론 그런 내용이었다면 이렇게 소개하고 있을 이유도 없겠지만.

한국인의 멘탈 구조를 허무주의, 인생주의, 현세주의의 꼴로 설명하는 그는 그것을 바탕으로 자기 나름의 한국적 실용주의라는 개념을 풀어 나간다. 결국 그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이 전부이니 감각적 즐거움이 소중할 뿐인데, 원래 인생은 허무하니 낙담하거나 좌절할 것 없이 좋은 것만 하고 살자'가 한국인의 멘탈이라는 것이고, 그것을 제1원리로 작동하는 한국인의 동력이 바로 '한국적 실용주의'라는 것이다. 동의를 하거나 말거나, 꽤나 '문제적 발언'임은 틀림 없겠다.

국내에 두 번째로 소개되는 아감벤의 책은 <남겨진 시간 -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관한 강의>이다. 사실 아직 <호모 사케르>도 읽지 못해 '아감벤이 어쩌고' 운운할 입장은 되지 못하니 그저 출간 되었음을 알리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한다. 한번 훑어본 소감으로는... 어렵다. '아감벤 사상의 결정판'이라는 출판사 측의 주장은 진위를 확인할 길 없어 그저 옮길 뿐인데, 읽는 이가 판단할 일이다.

<루시퍼 이펙트>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졌던 필립 짐바르도의 <타임 패러독스>는 굉장히 재미있는 책이다. 경제경영서를 주로 내는 출판사에서 출간 되었기에 얼핏 자기계발서(시간 관리는 중요하니까) 같은 느낌의 표지를 하고 있긴 하지만, 엄연한 심리학책. 물론 이 책을 보아야 하는 사람은 (심리학에 관심이 있거나) 시간 관리를 잘하고 싶은 사람이다! 자기계발을 하기 위해서 자기계발 책을 읽어야 한다는 건 (이건 정말 인문MD 입장에서 말하는 거지만) 분명 넌센스다. (홍MD님 죄송해요)

책 뒤의 추천사도 꽤나 흥미로운데, 추천하는 이의 성향에 따라 서로 다른 부분을 책의 장점으로 꼽고 있는 것을 보며 결국 '아는 만큼 보인다' 혹은 '누구나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다양한 층위에서, 의미에서 (이 말들을 지금 나는 '실용'적인 뜻으로 썼다)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좋은 책이라는 말일 것이다.

"<타임 패러독스>는 단단한 과학적 토대와 시대를 초월하는 지혜를 기초로 하여, 대체될 수 없는 자원인 시간을 유익하게 활용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 마틴 셀리그만, <긍정 심리학>의 저자

"<타임 패러독스>는 즉각적인 보상과 미래의 이익을 식별하는 데 중심이 되는 문제들을 다루고 있으므로 의사결정자라면 꼭 읽어야 할 책이다. 또한 포괄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감탄할 정도로 명쾌하고 즐거운 책이다." - 나심 니콜라스 탈렙, <검은 백조The Black Swan>의 저자 (국내 번역서 제목은 <블랙 스완>)














줄리아 크리스테바를 읽고 싶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읽어야 겠다'고 잠깐 생각한 것이지만… 물론 그 전에 읽고 읽고 또 읽어야 할 책들이 첩첩 구만리라 생각만 하고 말았다. 그대신 잡은 책은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이었는데, 갑자기 <사랑의 역사>가 재출간 되어 나왔다. 꽤나 즐거운 우연. 물론 그 두 책이 '공식적'으로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얘긴 아니다. 하지만 그 책들을 읽는 개개의 독자 입장에서라면, 이 두 책의 '커플링'은 분명 내밀하고도 멋진 만남이 될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제목과 난망한 표정의 광대의 조합은, 바르트의 크리스테바의 조합하고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강렬하다. '행복을 찾아 3천년'이라니, 눈물나는 부제다. 원제는 <The Secret of Happniess>지만 <시크릿> 열풍으로 차마 그대로 쓸 순 없었다고. (세상엔 '시크릿'을 부러 달고 나오는 책과 부러 빼고 나오는 책이 있는 모양이다) 제목과 표지의 느낌과는 달리 책은 철학서다. '행복을 찾아 3천년'이라는 부제는 결국 철학의 역사를 뜻한다. 꽤나 깊이 있는 책이다.

<안녕하세요, 기억력>과 <메커니즘을 알면 간단한 기억의 원칙>은 직접적인 제목에서 드러나듯 기억력을 다루고 있다. <안녕하세요>가 기억에 관한 에피소드와 지식을 위트있게 엮어낸 책이라면 <메커니즘>의 목적은 기억의 원칙을 파악함으로써 기억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목표다. 기억과 망각에 대한 교양을 원하시는 분은 전자를, 기억력 향상이라는 실용을 원하시는 분은 후자를 선택하시는 것이 좋겠다.

 

 

 

 

 

 

 

<쿠빌라이 칸>은 국내 최초로 소개되는 쿠빌라이 칸 평전이다. "Dsching-Dsching-Dschinghis Khan, hey Reiter, ho Reiter, hey Reiter, immer weiter"라는 가사의 추억의 팝송으로까지 불리우고 있는 할아버지 칭기스 칸에 비해 역사적으로 주목도가 떨어지는 쿠빌라이 칸이지만, '정복'에서 '통치'로의 발상 전환을 통해 중국 전역을 통치하는 최초의 이민족 중국 황제이자 몽골 세계 제국을 통치한 쿠빌라이 칸과 그의 시대는 칭기스 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한다.

<이사, 천하의 경영자>는 2006년 처음 인터넷에 연재된 이후로 중국 대륙을 뜨겁게 달구었던 책이다. 가히 중국역사계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 말하자면, 작품성의 문제가 아니라 '센세이셔널'함의 문제에서) '귀여니'라고 할만한 중국의 신세대 역사 스토리텔러 차오성은,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과거의 인물들의 심리를 '전방위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소설의 위화, 인문의 이중톈에 이어 한 번 만나볼만 하다.

<하워드 진의 만화 미국사>는 하워드 진의 역작 <미국 민중사>를 만화로 각색한 책이다. 물론 그렇다고 어린이나 청소년을 위한 만화는 아니다. 꽤나 두터운 분량을 자랑하는 <미국 민중사>를 한 권의 만화로 압축했기에 부분 부분의 생략은 불가피 했겠지만, 깊이를 잃지는 않았다. <미국 민중사> 혹은 하워드 진 혹은 미국의 진정한 모습을 알고 싶은 분이라면 읽어 보시길.

<육체의 탄생>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웰빙, 다이어트 열풍의 기원이 된 100년 전 조선의 모습이다. 조선은 자고로 '신체발부수지부모'라 하여 터럭하나 함부로 하지 않았다고 하던데? 하지만 서양 문명과 맞닥뜨린 근대개화기의 조선은, 그동안 무시했던 '육체의 역습'을 당하게 되었다고. 우리 몸과 그 안에 새겨진 근대의 자국을 탐구하는 과정이 꽤나 재미있다. 우리의 근대는 여전히 꺼내올 것이 많은 (오랫동안 무언가를 잔뜩 쳐박아 놓은 채 방치한) 다락방 같다.

* 오늘 들어온 따끈따끈한 신간들!

이제 자정이 지났으니 어제라고 해야겠지만 근무일 기준으로 치자면 아직 출근 시간이 안되었으므로 그냥 오늘이라고 하자면, 오늘은 정말 깜짝 놀랄 월요일이었다. 거창한 책들이 어찌 그렇게 쏟아지던지. 한정된 공간에 책을 '규모있게' 배치해야 하는 담당자의 입장에서는 조금 곤란할 지경. 그 중에서도 몇 권을 꼽아보자면 위와 같다. 이런 책들을 보면 경박하지만 마음 속으로 순위를 꼽아보게 된다. 아마 다음주 쯤엔 <***>는 *위, <***>는 *위, <***>는 *위, <***>는 *위를 하고 있을 듯… (고미숙의 <호모 에로스는 11/19(수) 부터 판매가 가능한 관계로 이미지만 넣었다)


* 잠을 자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깨있기는 피곤한 시간이네요. 왠지 정말로 새벽 출항을 하는 어선의 선원이 된 듯한 기분이;; 잠을 자거나 말거나, 오늘도 배는 출발합니다. 고맙습니다. 이번 주도 만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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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8-11-18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을 아니할 수가 없군요!

꼬마요정 2008-11-19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사랑의 역사 어렵게 어렵게 구했는데, 재출간되어 나왔군요~^^;;

글샘 2008-11-24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맨날 만선된 배를 보고 침만 삼키는 1인...ㅠㅜ

잉여인간 2008-11-29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rss 좀 열어 주세요.

활자유랑자 2008-12-01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 님 / 고맙습니다. 조금 부끄럽네요 ;
꼬마요정 님 / 종종 재출간 되는 책들은 잃어버린 옛친구를 만나는 기분이랄까요. :)
글샘 님 / 앞으로도 더 많은 침이 필요하실듯 ㅜㅜ
잉여인간 님 / 우측 메뉴 바의 하단에 있는 rss 구독하기를 누르시면 됩니다. 한 번 시도해 보시고 이상이 있으면 다시 말씀해주세요~

마늘빵 2008-12-17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궁금한 것 하나. 이 새벽에 일을 하신 겁니까? 페이퍼질을 하신 겁니까? ^^a

활자유랑자 2008-12-20 15:30   좋아요 0 | URL
그건 아마 보시는 분들에게 달려 있는 것 같아요. "이 사람 늦게까지 일 열심히 하네" 라고 생각하셨다면 일이고, "이 사람 늦게까지 페이퍼질 열심히 하네"라고 생각하셨다면 페이퍼질이겠지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