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자가 있었지. 그녀는 약혼자를 만나기 위해 비행기를 탔어. 지구에서 가장 커다란 대양 위를 날아가는 비행기. 그녀는 그 남자의 옆자리에 앉았지. 그 남자. 그녀가 계속해서 말을 붙여보려 노력했지만 고작해야 '블러드 메리'를 주문하는 것 밖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그 남자 말이야.

그녀는 그냥 앉아서 제3세계에 대한- 어떻게 발음하는지조차 모를 곳들에 대한 끔찍하게 재미없는 잡지 기사나 읽고 있을 수밖에 없었어. 그녀는 지루했고, 의기소침. 그런데, 그때, 갑자기 기계적인 결함으로 엔진 하나가 고장났고 비행기가 추락하기 시작했어. 삼천 피트 상공에서. 기내방송에서는 기장의 목소리가 울렸지.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아, 세상에! 미안해요." 그는 계속해서 사과할 뿐이었어. 그녀는 남자를 바라보았고, 이렇게 물었지.

"우리가 지금 어디로 가는 거죠?" 그러자 그제야 그녀를 돌아본 남자가 이렇게 말했어. "파티에 가요, 그, 생일 파티요. 당신 생일 파티 말이에요. 생일 축하해요, 달링. 우리는 당신을 너무, 너무, 너무, 너무, 너무 사랑해"


그리고 남자는 흥얼대기 시작했지. 이 작은 멜로디를. 아, 그건 이렇게,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 : 하나, 하나, 둘, 셋, 넷-

- Bright Eyes, 'At the Bottom of Everything'


그러니까 그 노랜, 어쩐지 이렇게 시작할 것 같았다.

책을 읽으며 내내 진심, 에 대해 생각했다. 진실과 거짓말은 그 다음으로. 한 때는 진심과 진실이 등가일 수 있다고 믿었다. 내가 무언가를 진심으로 원한다면 그것은 결코 거짓이 아닐 거라고. 이를테면 나는 진심으로 살아가고 싶었고, 그것 자체로 나는 진실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서투르지만, 간절하게. 

이제는 그것이 결코 같을 수 없음을 안다. 진실은 마음보다 크고, 진심은 결국 마음의 영역이므로. 마음을 벗어나는 순간, 더 이상 그것이 진실임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 그것을 이제야 알았다. 너무나 당연한 만큼 혼란스러운. 그런 것이 진실임을.

김해연의 진심과 정희의 진심과 나카지마의 진심과 박길룡의 진심 그리고 그 모두를 안고 있는 진실, 같은 것.

밤이었다. 김연수 작가를 만난 것은. 늦은 모기만이 지난여름의 추억을 힘겹게 지고 날아다니던 밤. 어디서도 노래는 들리지 않았지만, 왠지 그런 노래를 들을 수도 있을 것 같은. 부러 말을 하지 않아도 조용히 귀 기울이게 되는, 그런 밤.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무엇도 쉬이 입 밖으로 나오진 않았다.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는 그 무엇도 펴낼 수가 없었다. 입 밖으로 나온 말들이, 그 말들 중에 얼마가, 일말의 진심 나부랭이라도 담고 공기 중을 배회하게 될지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으니까. 애꿎은 모기만 쫓으며, 좋아하는 작가를 만난다는 것은 꽤나 무서운 일이라고 혼자 생각했다. 질문은 문학MD님께 맡기고 사진기나 만지작거리며 혼자, 그렇게 생각했다. 그저 무심한 척 귀를 쫑그리며.

실제로 만난 김연수 작가는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런저런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들이 어지러이 공기를 채웠다. 조도가 낮은 오렌지색 조명에서는 사진이 잘 찍히지 않아 속상해 했던 것 같다. 혼자서만. 한편으로는 그 말들을 바라보며 상상하기도 했다. 글 속의 그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그에 대해. 그의 진심과 내 귀로 와 닿는 그 말에 대해. 그 간극에 대해.

이를테면 "나는 원래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닌데 손이 말이 많다"라는 말에 대해. 하지만 말씀도 결코 적지 않은 걸요, 하고. "처참할 정도로 실패한 사람들. 그들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 나의 삶을 이해하는 것일 수 있다"는 말에 대해. 괜히 고개를 주억거리기도 하면서.

사실 나는 답이 듣고 싶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단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진정 살기 위해서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 같은 것에 대해서. 아니, 그 이전에, 살아남는 것과 살아간다는 것의 차이에 대해서. 그 차이가 때론 얼마나 얇고도 하찮은지에 대해서. 그러니까, 알고 있었던 셈이다. 결코 그가 대답할 수 없으리란 것을. 왜냐하면 그것은 진심의 영역이었으니까. 그것도 나의. 그래서 묻지 못했다.

그럼에도 참지 못하던 입술이 달싹일 때, 그가 말했다.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순간 오히려 따뜻해지는 그런 거라고 할까요. 희망 없는 삶을 산다는 거하고, 이루어지지 않는 희망을,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안고 산다는 건 분명 다르잖아요." 처음에는 100% 와 닿지가 않았다. 그래서 생각했다. 하루, 하루, 하루, 하루, 하루. 그래서 지금까지도.

그러니까 그것은, 진심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희망이 없다는 것이 진실이라면, 그것을 알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고 살아가는 마음은. 사실 희망이란 꽤나 바보 같은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순간 오히려 따뜻해지는 그런" 건 잘 모르겠지만.

그래서 이 밤, 다시 한 번 생각한다. 내가 살고 있는 날들을,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진실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그저 진심만으로. 그것뿐으로. 진짜 살아갈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살고, 사랑하고 싶은지에 대해서만.

그러니까 그것은, 삼천 피트 상공에서 추락하면서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마음 같은 것. "희망이 없음을 알면서도 그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마음 같은 것. 혹은 그런 마음을 담은 노래 같은 것.

그렇게 생각하자 어쩐지 그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것도 진심으로. 

 

* 공식 인터뷰 업데이트에 앞서 끄적인, 개인적인 감회를 담은 페이퍼입니다. 위 내용은 알라딘 혹은 문학MD님의 입장과 무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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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春) 2008-10-13 0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사진이 제대로 안(혹은 못) 찍혔군요. ㅋㅋㅋ 선명치 못한 조명 아래서 인물사진을 제대로 담아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 저도 절감하고 있습니다.

나무그늘 2008-10-15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히려 이렇게 흔들리는 지금의 이 사진이 더 글의 맥과 닿아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사진이 그저 '사실'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사실 이면의 '무엇'을 잡으려는 노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