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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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법 2부작’으로 『한국의 문화적 문법』(정수복, 생각의 나무)을 다룰까 했다. 황우석 사태를 거론하며 오늘의 한국사회를 진단했다는 서평에, 때맞춰 심형래 감독의 영화 ‘디워 D-War’를 둘러싸고 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웬걸? 책을 집어드니 책값 18,000원이 발톱에 가시처럼 박혔다. 아마도 얼마 전 읽은 『남한산성』이 없었다면 속절없이 이 책을 사들고 나왔을 게다.

휴가시즌임에도 구원투수로 마운드에 긴급 투입된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시기 47일 동안 성안에 갇힌 말(言)들의 전쟁이다. 싸우자는 김상헌과 항복하자는 최명길. 쿠데타로 왕위에 오른 인조와 노회한 영의정 김류. 거기에 대장장이 서날쇠와 정복자 후금의 칸까지. 이들의 생사와 존엄을 건 말다툼 사이에 “말로써 정의를 다툴 수 없고, 글로써 세상을 읽을 수 없”다는 작가 김훈이 서있다. “이 책은 소설이며, 오로지 소설로만 읽혀야 한다”는 그의 소심한 말은 분명 진심이겠지만 진실은 될 수 없다. 소설의 제목이며 무대인 ‘남한산성’은 결국 소설의 주인공인 셈이자 그 자체로 세상에 대한 김훈의 지독한 은유이기 때문이다.

‘디워’는 용들의 싸움 대신 말들의 싸움으로 떼돈을 벌어들이고, 바야흐로 돈 대신 표를 벌어보려는 이무기들의 혹세무민이 난무한다. 어느 누가 난세에 침묵은 금이요, 웅변은 은이라 했던가.  

- 2007년 9월 씀. 제목은 조선시대 작자 미상의 시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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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의 문법 - 민주주의총서 01
조효제 지음 / 후마니타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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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색을 하고 논쟁해본 일은 없지만 대개의 편집자들처럼 격월간 <사람>(esaram.org) 편집인도 문법, 특히 맞춤법에 관한한 보수주의자인 듯하다. 좋게 말하자면 원칙에 충실한 것이지만 같이 잡지를 만드는 처지로서는 영 피곤한 일이 아니다.

문법도 법이기에 늘 그 언어를 사용하는 대중들과 긴장관계에 놓인다. 그러나 일반 법률과는 달리 문법은 언어대중의 변덕과 무원칙 앞에서 무기력하게 후퇴를 거듭한다. 본래 말과 글이란 옳고 그르고 하는 판단의 대상이기 이전에 소통의 도구인 탓이다. 하지만 말과 글의 질서가 혼란스러울 때 소통이 왜곡되거나 아예 차단된다는 데 문법의 존재이유가 있다.

저자가 “뜨거운 주제의 건조한 분석”이라고 밝히고 있는 『인권의 문법』은 인권을 둘러싼 소통을 염두에 두고 나온 책이다. 언어를 배울 때 문법은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듯 이 책은 인권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 쯤 고민해봄 직한 문제들을 대부분의 이론서들과는 달리 목에 힘주지 않고 조목조목 짚어낸다.

이 책의 미덕은 이론가 혹은 저자가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권위를 벗어버린 겸손함과 거기서 나오는 친절함에 있지 않나 싶다. 또한 “필자는 언젠가 지하철에서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못 참는다.’라는 광고를 본 적도 있다”는 각주처럼 통상적인 주석과는 다른 저자의 코멘트를 접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무엇보다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소통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 대중과 눈을 맞추고 인권운동과 함께 호흡하려는 노력이 딱딱한 문법책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어쩌면 이 혼탁한 속세에서 인권의 통속화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한다면 400여 페이지가 예상외로 쉽게 넘어갈 수도 있다. 물론 문법을 잘 안다고 해서 말하고 쓰기가 절로 되는 건 아니란 사실을 이 책의 저자도 우리도 이미 알고 있다.  

- 2007년 8월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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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연 여성 잔혹사
서명숙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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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 20주년을 즈음해 각 언론사들마다 작심한 듯 그때 그 시절을 들춰냈다. 당시 거리를 가득 메운 가공할 양의 최루가스와 후미진 골목이나 건물 화장실에서 내 허파를 한 바퀴 휘돌아 나왔을 담배연기. 이 둘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마는, 하여튼 87년은 내가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해이니 어느덧 20년이다.

이상하게도 어떻게 담배를 입에 물게 되었는지, 언제 입담배가 속담배로 바뀌었는지에 대한 기억은 없다. 다만 자율학습을 마치고 인적 드문 놀이터에서 끽연을 즐기다 아파트 경비에게 걸려 달밤에 ‘엎드려 뻗쳐’와 ‘쪼그려 뛰기’를 했던 일이나, 의기양양하게 대로변에서 담배를 물고 건널목을 건너다 틀림없이 부부싸움 끝에 집나왔을 형사를 만나 온갖 공갈협박을 당하고 마음 졸였던 그 수난들만큼은 생생하다.

이러한 나의 수난사는 명함도 내밀 처지가 못 된다는 것을 일깨워준 책. 수난이 아니라 잔혹이란 단어를 써야만 제대로인 이 땅 담배 피우는 여성의 숙명을 그린 책이 『흡연여성 잔혹사』(서명숙 지음. 웅진)이다.

담배를 핀다는 이유로 술잔과 따귀가 날아들고 욕설이 난무하는 에피소드들은 그나마 서정적이다. 목숨 걸고 옥상에 올라 담배를 피우다 마침내 병원 신세를 져야 했던 여고생에서부터 흡연을 이유로 이혼을 당해야 했던 한 어머니. 담배 피며 차를 몰던 중년여성이 음주단속 경찰을 보고 놀라 서둘러 담배를 끄고 창문을 내리며 무심결에 “저 담배 안 피웠는데요” 하고 말았다는 대목에까지 이르면 그 차별과 억압이 얼마나 뿌리 깊고 치밀한가를 1/10쯤 겨우 짐작할 수 있으려나. 여성이란 이유만으로 결혼하면 시부모의 눈치 보랴, 임신 전, 중, 후에서 육아에 이르기까지 남편과 아이에 시달리랴, 감히 남성인 나로서는 범접할 수 없는 고행은 끝날 줄 모른다.

오늘 이 순간 또 여러 사람 담배 물게 하는 <시사저널>의 편집국장이었던 지은이 서명숙은 책 말미에서 결국 달리기, 여행 등에 대한 중독으로 담배에 대한 중독을 물리쳤다며 금연을 권하고 있지만 아직 미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 여성동지들은 어찌할 것인가. 부디 이 땅 담배 피우는 여성들에게 복 있을지언저.  

- 2007년 7월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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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09-08-22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참 재미있죠. 저도 수십 차례의 금연시도에 항상 좌절하는데....

담배를 피우게 된 단초를 제공한 선배의 사고가 가슴이 아리네요. 김훈의 추천사도

괜찮고요 ^^

나무처럼 2009-08-22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김훈의 추천사는 까맣게 잊고 있었네요.. 다시 찾아봐야지...
 
우리학교 SE 일반판 (2DISC) - 2 디스크, 일반 케이스
김명준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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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있는 조선학교에 책을 기증한 적이 있다. 한 단체에서 활동할 때 일인데 단체 회원들이 우연히 그 조선학교에 들렸다가 유치원에서 고등학교까지 같이 쓰는 학교 도서관에 6,70년대 북한 서적들만 가득하고 무엇보다 어린아이들 볼 책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시작한 일이었다. 다행히 아이가 커서 처치곤란이 되어버린 책들을 갖고 있던 회원들의 전폭적인 참여로 책은 곧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막판에는 출판사 후원도 이어져 수천 권이나 되는 책이 모였다.  

예상 밖의 결과에 들뜬 우리는 교장선생님에게 조촐한 책 전달식을 제안했다. 이메일로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어쩐 일인지 고맙게 책을 받겠다던 선생님은 전달식 메일을 받고도 한참을 답이 없었다. 속이 탄 나는 전화를 걸었고 몇 차례의 이메일이 더 오간 후에야 사정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었다.

별 뜻 없이 감사한 마음에 책을 받겠다고 했던 선생님은 이메일 내용을 학교 운영위원회에 보고를 했고 운영위원회에서는 난상토론이 벌어진 모양이다. 당시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로 조선학교와 재일조선인이 말 못할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그 만큼 남쪽의 지원이 고맙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부담스럽고 염려되는 부분도 있었으리라. 우리는 긴급히 회의를 갖고 전달식은 물론 어떤 조건도 없이 책을 보내고, 무리한 제안에 대한 사과와 함께 그저 도서관 책꽂이에 꽂아만 달라는 당부도 덧붙였다.

들리는 말로는 혹가이도에 있는 조선학교를 다룬 다큐멘터리 ‘우리학교’가 선전하고 있는 모양이다. 인권영화제에서도 만원사례를 했단다. 다큐 속 아이들은 천진난만 했고 선생님들은 사려 깊었으며 그 어울림은 아름다웠다. 내내 미소를 짓게 하는 영화는 북한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돌아온 아이들이 남루한 북한의 겉모습이 아니라 인민의 마음씨를 이야기하는 대목에서는 어쩌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의 지혜가 남도 북도 아닌 제3지대, 가장 소외되고 고달픈 역사를 간직한 그 자리에서 싹트고 있다는 희망도 엿보인다. 본인의 미숙함을 먼저 돌아보며 남과 북 사이에서의 고민을 담담히 적어 내려간 그 교장선생님의 마지막 이메일에서처럼 말이다.  

- 2007년 6월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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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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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아이를 가졌다. 유유상종이라 어울리는 놈들 중에 반은 결혼을 안 했고, 결혼한 반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아이가 없다. 그래서인지 술자리에서 이 사건이 자주 술상에 오르내린다. 아예 대놓고 사내가 좋냐, 계집이 좋냐하고 물어보는 치도 있다. 대답은 그때그때 다르다. ‘나 같은 놈 나오면 어쩌누’ 싶으면 딸이고, 험한 세상 유난히 험난해 보일 때는 반대다. 문제는 이런 안주거리가 아니라 녀석이 아내 뱃속에 들고부터 ‘불안’이란 놈이 우리 주변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의 에세이 『불안』은 사랑의 결핍과 속물근성, 주위의 기대와 같은 개인적 이유에서부터 능력주의와 사회의 불확실성의 증가란 사회적 원인까지 불안을 야기하는 원인을 섬세하게 짚어놓은 책이다. 글 솜씨가 보통이 아닌 저자의 주장을 따라가 보면 결국 불안은 자본주의 삶의 조건이자 방식이다.

미국 사람들이 지금 총으로 구한 안전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절감하고 있다면 한국에 나는 아이를 갖게 되면서 돈으로 안전을 사는 일이 얼마나 피곤하고 또 빈곤하게 만드는 지를 새삼 실감하고 있다. 12주(새롭게 알았는데 이쪽은 대개 ‘주’ 단위로 따진다)를 넘긴 아내는 일단 유산 가능성이 확 줄었다며 안심했지만, 주위에서는 곧 조산의 불안에 시달릴 거라 예언했다. 한 20주 정도 넘기면 일찍 나와도 인큐베이터에 들어가 살릴 수 있지만 그때부터는 정신지체, 자폐 등등 돌은 지나야 알 수 있는 것들이 걱정꺼리가 될 거란 저주도 서슴지 않는다. 

그뿐인가. 이 사회는 온갖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요람에서 무덤까지 세상은 온통 지뢰밭이고 전쟁터라고 떠들며 불안을 마케팅하고 있다. 그러니 어느 영화감독 말마따나 불안은 영혼을 충분히 잠식하고도 남음이 있다. 영혼뿐만이 아니라 나의 지갑까지도 잠식당하고 말 것인가. “제 먹을 복은 다 갖고 태어난다”는 아내와 나의 팔자론(論)은 위태롭고 우리의 지갑은 몹시 ‘불안’하다.  

- 2007년 5월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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