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자연주의자의 죽음
셰이머스 히니 지음, 이정기 옮김 / 나라원 / 1995년 10월
평점 :
절판


 

사는 일이란 만만치 않으면서도 때론 그럭저럭 살아지게 되는 경우도 있다. 어쩌면 나에게 글쓰기는 신기루 같아서 쫓아 가다보면 허망하고 사치스러워 보이다가도 돌아서기에는 발이 잘 떨어지지 않아 계속 뒤돌아보게 되는 미련스러운 그 무엇이다. 그래서인지 되돌아보면 문학에 치열하지 못했던 순간이 못내 아쉽다. 그러나 더욱 부끄러운 것은 어느 순간 단호하지 못하고 나 자신과 타협하였던 순간들이었다.   


땅파기


내 손가락과 엄지 사이에 
몽당연필이 놓여 있다. 
내 나라 역사와 슬픔을 노래할 수 있는 무기처럼.

내 창 밑에서 쟁쟁한 쇳소리가 난다. 
자갈밭 속으로 삽이 파고드는 소리가. 


그래, 아버지는 땅을 파고 나는 내려다본다.

텃밭을 일구는 노동의 엉덩이가 
감자 이랑 사이를 파느라 나지막히 숙였다가 
되풀이 장단 맞춰 올라오기를 
이십 년.



거치른 장화가 자루를 스치고 손잡이는
 
무릎 사이에서 철통같이 버틴다. 
아버지는 높다란 잔가지를 뽑아내고 반짝이는 날을 깊이 박아
우리가 거둔 햇감자를 흩는다. 
손에 든 감자의 서늘한 감촉을 느끼며 
참으로, 아버지는 삽을 잘 다루셨다. 
아버지의 아버지처럼. 

할아버지는 토탄을 많이 파냈다. 
토우너 늪지 사람 그 누구보다도 
한 번은 우유를 병에 담아 가져다 드렸다. 
종이로 대충 막아. 할아버지는 허리를 펴고 
마신 다음, 곧장 몸을 굽혔다. 
메치고 깔끔하게 자르고, 어깨 너머로 흙을 
걷어내며 아래로 아래로 
질 좋은 토탄을 찾아 땅을 파낸다. 

감자 양토의 차가운 냄새, 
푸석푸석한 토탄이 타는 
소리, 
살아 있는 뿌리를 뭉툭하게 잘라놓은 
실뿌리들이 내 머릿속에서 깨어난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뒤따를 삽이 없다. 
내 검지와 엄지 사이에 
몽당연필이 놓여 있다. 
내 나라 역사와 슬픔을 노래할 수 있는 무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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