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망록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즈음, 깨어보니 스물네 살이었다. 신은, 꼭꼭 머리카락까지 조리며 숨어 있어도 끝내 찾아주려 노력치 않는 거만한 술래여서 늘 재미가 덜했고 타인은 고스란히 이유없는 눈물같은 것이었으므로,

스물네 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 꿈 밖에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성이는 것 같아 달려나가 문 열어보면 아무 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에 묻은 이슬 발을 툭툭 털어내며 인사했다. 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석류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네 살엔 좀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으련만. 굵은 입술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이리 많이 남은 행복과 거짓에 이젠 눈발 같은 이를 가진 아이나 웃어줄는지. 아무 일 아닌듯. 해도,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 문득 깨어나 스물다섯이면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무 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詩 : 김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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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5-04-13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 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이 구절 한동안 저의 MSN 아이디였답니다.
그리고 "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에 절망했고요.^^

플레져 2005-04-13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신저 아이디로 아주 적합하네요 ^^
김경미 시인의 시집을 읽고 싶은데 구하기가 너무 어려워요...

연우주 2005-04-13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플레져님. 저 김경미 시인 시집 있어요. ^^ (자랑이 되는 셈인가요?--;) 저도 이 시가 너무 좋아, 시집을 샀지요. 그때 염가 세일로 인해 절반값주고 샀어요.

플레져 2005-04-13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우주님, 염장성이에요! ㅎㅎㅎ
내일 알라딘에 전화해보려구요. 품절 상품이어도 출판사에 알아보고 재고가 있으면 풀어놓더라구요 ^^

연우주 2005-04-13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플레져님과 같은 시인 좋아한다니 좋은 걸요?

플레져 2005-04-13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주님~ **파* 에 시집이 있네요. 주문 했어요.
우주님과 통하는 게 있다는 건 기쁜 일입니다 ^^

2005-04-13 2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hanicare 2005-04-14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시가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을 때 최인호의 적도의 꽃도 연재되었던 것 같습니다. 미뇽이라는 이름에 저는 자꾸 공룡이 떠올랐었다는. 김 경미시인의 저 시는 아직도 제 머리에 귀절귀절 또렷이 박혀 있습니다.너무 오랫만에 보는군요.그 때의 나는 어디에 있는지.

플레져 2005-04-14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니님의 기억속에는 언제나 문학이 들어있네요... 그 기억마다에 있으신걸요,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