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시립 미술관 샤갈 전시회장 옆에
천경자 화가의 그림을 전시하는 갤러리가
작은 골목길 처럼 붙어 있었다.
어마어마한 그림들을 보고 나온 후여서 그랬는지
인파에 시달렸기 때문인지 조금 현기증이 났다.
휴식공간에 들어선듯,
천경자 화가의 그림이 걸려 있는 갤러리는 편안했다.
주최측에서 쉬어가라는 메모지를 건네 받은 것처럼
그 작은 갤러리에 걸린 그림들은
강렬한 색을 입고 있는데도 고요한 기운이 감돌았다.
아주 오래전, 6,70년대 뉴욕의 풍경,
이방인의 눈으로 스케치한 세계의 도시들...
연습장에 휙 그려낸 것 같은 그림들...
그녀는 가는 곳마다 그림을 그렸구나 싶어서
나는 그 마음도 참 부러웠더랬다.

내 맘에 쏙 들었던 것은 모델하우스처럼 만들어 놓은
천경자 화가의 방이었다.
그림을 그릴 때 입는 작업복과 널려 있는 붓, 팔레트, 물감은
금방이라도 화가가 그림을 그려낼 수 있을 것 처럼
생기 충만이었다.
희미하게 천경자의 실루엣이 보이는 것도 같았지, 아마...

친정 엄마가 쓰시는 아주 오래된 사기그릇의 모양과 닮은
그릇은 화가에게는 물감을 짜서 쓰는 용도였다.
실감나게 하기 위해 짜놓은 물감인데도
한참동안 그 유리방을 들여다보니
화가의 열정이란 물감을 짜는 순간마다
막 직조한 옷감을 입듯 살아나겠구나 싶었다.

같은 그릇이지만, 그릇에 담는 내용물이 다른 인생.
저 높은 우주에서 바라보면 인생의 작은 알갱이는 보이지 않을거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사람이 살고 있을거라 짐작되는
터전만 보일게 뻔하다.
타인의 시선도 내게 그러지 않을까.

타인의 짐작은 두렵다. 

고독한 시간을 화폭에 담아내던 화가는
자신만의 꽃을 들고 키우는 개와 산책을 나선다.
세상의 시간과 다른 시간을 걷고 있는 화가에게는
자신의 외로운 두 발을 꽃에 파묻는다.
고독을 들키고 싶지 않다.
화가가 꽃을 들고 있는 까닭이다.

내가 만들어낸 예술 작품은 기꺼이 보여주지만,
내가 살았던 고독의 시간은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 예술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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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i 2005-01-27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경자,의 그림을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시립미술관을 참 자주 들락거렸지요. 어느 위치에 어느 그림이 걸려 있는지, 이미 제 머리 속에는 훤히 동선에 따라 그림이 움직입니다. 지금은 '생태'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처음, 시립미술관에 천경자 실이 생기고서는 그 그림이 맨 처음에 걸려 있었는데, 그 뒤로 잘 안 보이더군요. 생태,가 시립미술관 소장인데, 다른 전시회로 빌려(?) 갔는지, 아니면 반대로 잠시 시립미술관에서 빌려서 전시를 했었는지 말이지요. '생태'야 워낙에 유명한 그림인지라, 그렇게 '보았다'라는 사실만으로 혼자 감격스러워했더랬죠.
제가 좋아하는 그림은 '내 인생의 - 페이지' 시리즈의 그림들입니다. 그림 속의 여인들, 똬리 튼 뱀들과 함께 서 있는, 정면을 응시해서 나와 눈이 마주치게 되는 그 그림들의 여인들을 좋아하거든요.
아무튼, 천경자 화백 때문에 시립미술관을 사랑하게 되었다면 과장일는지. 아무튼, 사실이기도 한걸요. 천경자 그림 보고, 반가워서요-

플레져 2005-01-28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경자의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샤갈전 때문이었어요. 내 인생의 - 페이지 시리즈, 찾아봐야겠네요.

hanicare 2005-01-28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같은 보통사람은, 남루한 고독 한 벌로 일생을 나나봅니다.

플레져 2005-01-28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니님, 가끔 그 한 벌 빌려주세요. 다른 사람의 고독은 어떤가 너무 궁금해요 ^^

비로그인 2005-01-28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 말을 잊었어요..^^;)

플레져 2005-01-28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요, 난니님?

잉크냄새 2005-01-28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예술입니다.^^

kimji 2005-01-28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경자,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ㅡ 제가 제목을 잘못 알려드렸군요. 혹시나, 해서 저도 찾아보았는데, 그래서 다시 알게 되었네요. '내 슬픈 전설의 - 페이지' 49페이지, 보다는 이 22페이지 그림이 참 좋습니다. 여인의 눈동자와 그녀의 머리를 감싸고 있는 저 뱀의 똬리도 마음에 들고요.


비로그인 2005-01-28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도 좋은데 플레져님의 글도 너무 좋아서요^^*

플레져 2005-01-29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 김지님, 난니님, 때로 저는 그 순간에 바로 대답하지 못하곤 합니다. 저의 무심함이 아니라, 저의 건망증을 이해해주실거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