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도착했을 때 줄리 델피와 에단 호크의 <비포 선라이즈>가 떠올랐다. <비포 선라이즈>의 두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들에 대해, 나를 중심으로한 이야기로 서로를 끌어들이려 한다. 또한 서로 언쟁을 하면서도 자신의 매력을 잃지 않기 위해 조심스러워하고 속삭이고 친절하게 대한다. <사랑을 카피하다>는 끊임없이 서로에게 말을 걸고 있다. 가짜 연극을 하면서, 가짜 역할을 하면서 서로에게 말을 걸고 호소한다. 친절과 애정을 쏟기 보다는 쿨하다는 쪽이 더 가깝지만 지금 떠나게 될까봐, 혹은 떠난 나를 방치할까봐 두려워하는 불안이 엿보인다.

시시껄렁한 고민에 깊이 빠져있다가 불현듯 어른들께 조심스레 털어놓고나면 아주 명쾌한 대답을 듣게 될 때가 있다. 어른들은 (마치 나는 어른 아닌 것처럼...) 내 고민의 깊이에 관해서라기 보다는 사건의 액면만을 바라보고 단순한 대답을 툭 던진다. 순간 나는 류현진의 강속구가 글러브에 팍-! 꽂히는 것처럼 올커니 하며 그 대답을 주워 해결한다. 내 질문에 깊이 생각하며 대답하는 어른일수록 엉뚱한 대답을 할 때가 있긴 하다. 그러나 대부분 어른들은 가비얍게 해결해준다. 그게 바로 연륜이다. 예전엔 정말 몰랐다. 꼬꼬마 시절엔 더더욱 어른들의 답이 나를 명쾌하게 해준 적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깨닫는다. 어른들의 대답만큼 나를, 어른인 나를 속시원하게 해주는 물파스도 없다고.  

제임스는 얼마든지 그녀를 피해 도망칠 수 있었다. 엘르가 식당 아주머니의 착각 (두 사람을 부부로 곡해한다) 을 고쳐주지 않았다고 실토한 순간, 그는 얼마든지 벌컥 화를 내고 돌아설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도망치지 않았다. 노련한 배우가 하기 싫은 역할임에도 불구하고 매일 밥 먹는 것처럼 연기를 하듯 엘르의 남편 역할을 받아들인다. 식당에서 나와 골목에서 남편과 아내로 다투는 그들은 몹시 사랑스러웠다. 또한 외로워보였다.  

스탕달은 이탈리아를 '사랑도 있고 증오도 있는 나라' 라고 했다. 제임스와 엘르는 이탈리아 투스카니 골목에서 가짜 역할을 받아들이고 즐기고 앙큼한 연기를 펼친다. 그리고 문득 나는 카피와 진짜의 경계가 무엇일까에 대한 질문에 빠졌다. 사랑과 증오의 경계를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 증오의 기원을 나는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이 있었으므로 증오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미움이라는 것은 관심에서 비롯된 것인데 관심은 마음을 어느 정도 상대방에게 허락하고 풀어놓은 것이니만큼 사랑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엘르와 제임스가 가짜 부부 역할을 능청스럽게 끌어갈 수 있었던 건 진짜의 역할을 해봤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때 누군가를 사랑했었고 증오했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실망하고 원망하고 증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가짜란 진짜가 없으면 생길 수 없는 분신이다. 가짜는 진짜에 기대어 있는 셈이다. 오리지널리티의 혐의가 없을 뿐 가짜도 진짜에서 파생된 또하나의 진짜니까.   

영화에서 흥미로운 것은 엘르의 여동생 마리다. 마리는 엘르의 입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마리는, 진품은 잊고 좋은 짝퉁을 사라, 고 조언하는가 하면 아무도 변화시키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심플한 인생을 지향하고 있다. 마리는 영화에서 등장하지 않지만 그녀의 말은 꽤 파급력이 크다. 마리가 정말 존재하기는 하는지. 엘르가 그냥 끌어들인 인물인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믿게 된다. 엘르가 전하는 마리의 말은 진심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명쾌하게 고민을 해결해주는 어른의 말처럼. 엘르는 마리의 남편이 말더듬이라고 전한다. 사랑하는 아내를 부를 때 마,마,마,마, 마~리~! 라고 부르는데 그건 묘한 러브송처럼 들린다고 제임스가 말한다. 결국 마지막에 엘르도 제,제,제,제, 제임~스~! 라고 부른다. 그렇게 부르기 전까지 그들에겐 어떤 복잡한 감정들이 오고 갔다.  

멀리서 종이 울리고 그들은 한 곳에 있다. 더이상 진짜 가짜의 논쟁이 필요하지 않은 곳, 거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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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1-05-16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므흐흐..암튼 플레져님의 페이퍼는 언제 읽어도 참 좋다니까요..^^
(저언혀 상관없는 댓글이지만. 한화이글스가 이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나 봅니다. 사장단 등등 수뇌부 싹 갈아치우고 그룹차원에서 전면적인 지원을 한다고 하더군요. 초특급 에이스가 존재하는 팀이 만년꼴찌라니..이제 젊은 이글스가 날개를 펼 수 있겠습니다.)

플레져 2011-05-16 23:38   좋아요 0 | URL
앗. 감사합니다 ^^;;

(류현진 선수를 한번쯤 제 글로 초대하고 싶었어요ㅎㅎ 때마침 머릿속에 툭~ 나타나줘서 고마울뿐 ^^ 제발 꼭 그랬으면 좋겠어요. 저는 한화팬이라고 하기엔 애정의 연륜이 부족하지만 팀에 관심은 많거든요. 묵직하고 믿음직스런 팀이란 이미지에 걸맞게 꼭!)

바람구두 2011-05-17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을 떠나고 좋지 않은 점 중 하나는 세상이 온통 정치와 경제만으로 구성되어 있는 듯 착각하게 된다는 거였어요. 다른 생물들이 그러하듯 인간 역시 자신을 둘러싼 생태계의 영향을 받기 마련인 듯... ㅋㅋ

플레져 2011-05-17 11:16   좋아요 0 | URL
알라딘에 첫정을 들인 이유도 있겠지만
저는 알라딘 페이퍼의 행간, 자간...에 매료된 것 같아요.
그래서 좀 쉬었다가 다시 또 오게 돼요.
돌아오시면...안될까요?
바람구두님의 알라딘 행간을 읽고 싶습니다 ^^;;

stella.K 2011-05-17 13:51   좋아요 0 | URL
엇, 바람구두님이닷!

2011-05-17 1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17 1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18 0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24 14: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잉크냄새 2011-05-25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축하인사 드려요.
오랜 서재지기 복순아짐(현 이카루)님이 알려주셨답니다.
지금은 중국이라 판매량에 영향을 못드리지만 조만간 카운터 1 올려드리도록 하지요.ㅎㅎ
건강하시고 또 좋은 소식 전해주시길...

2011-05-25 14: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10 15: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11 1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