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라스는 장 자크 아노 감독이 <연인>을 영화화하면서 자기 식으로 해석하여 책과는 다른 작품이 되었다고, 그의 남성성이 여성의 경험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형상화하지 못해 롤리타식의 선정적인 영화가 만들어졌다고 불평을 토로했지만, 그녀의 불평이 대부분 타당함을 인정하더라도 소재 자체가 센세이셔널한 까닭에 <롤리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편향적 오독과 얕은 읽기는 이런 책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노 감독의 해석이 피상적이고 뒤라스의 내면 깊은 곳에 접근조차 못했다는 비평을 모두 받아들인다 해도(책 몇 장만 읽어 봐도 뒤라스의 불평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아노 감독이 남긴 영화의 첫 장면, 처녀작으로 출연한 제인 마치(이 책 표지 사진에 실린)가 흰 원피스와 남성용 중절모를 쓰고 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베트남 사이공의 강을 연결하는 페리선 선상 펜스에 기대어 서서 강바람을 맞으며 먼 곳을 응시하는 장면만은 잊히지 않는 명장면으로 뒤라스의 작품에 빛나는 무대를 마련해 주었음은 인정해 주어야 할 것이다. 인트로 이후 영화는 하나의 계절뿐이 열사의 이국에서 벌어지는 소녀와 중국인 남성의 정사에 (어쩔 수 없이) 천착함으로, 그러한 표현 방식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한 여인의 도저하고 예민한 심리를 오히려 가리고 하나의 기이한 통속극으로 보이는 결과를 빚었으니 뒤라스의 비판이 이해가 될 만한데, 가령 소설 속 다음과 같은 문장은 이 책의 울림이 십오세 소녀의 특이한 경험이 아니라 인생을, 여자의 인생을 깊이 반추하고 있음을 예고한다. 


"늙어 간다는 것은 가혹했다. 나는 늙음이 내 얼굴에 찾아와 내 모습을 하나씩 하나씩 변화시키는 것을 목격했다. 얼굴 모양이 일그러지고, 두 눈은 더 커지고, 시선은 더 슬픈 빛을 띠고, 입 모양은 더 고집스러워 보이고, 이마에는 깊은 주름이 패었다. 그런 변화에 진저리치기는커녕 나는 오히려 내 얼굴의 노쇄 현상을 마치 이야기의 줄거리가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해하는 것 같은 호기심을 품고 지켜보았다..."


여자라면 더없이 공감하겠으나, 중년의 남자도 충분히 고개를 주억거릴 상념이 아닐 수 없다. 책은 얇지만(영화로 보는 것보다 빨리 읽을 수 있다) 이야기는 섬세하고(여성스럽고) 다양한 울림을 준다(삶의 핵심을 건드린다). 


지난해 북경의 한 서점에서 본 뒤라스의 회상집이 생각난다. 흑백의 사진이 주를 이뤘던 노년에 이른 뒤라스의 회상집은 회상의 형식을 취한 이 책과는 다르다고 봐야겠지만 뒤라스가 털어 놓은 이야기와 아노가 펼쳐 놓은 그림 사이에서 새롭고 풍성한 변주를 들려줄 듯싶다. 사진 몇 장만으로도 말이다. ㅡ2016.2.26.Beij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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