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이야’라는 말로 시작된 말이 공기의 울림을 타고 퍼지는 순간, 그것은 하나의 에피소드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누군가 에게는 고이 간직하고 싶은 것들이 결괴 되는 순간, 비밀은 그 안에 담고 있던 고유의 빛을 잃고서는 그저 평범해 져버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찬란했던 빛이 수 많은 사람들의 입을 타고서 전해지는 그 과정 속에서 비밀 속의 주인공이 누구냐에 대해서는 그리 중요치가 않다. 내가 그들을 직접적으로 아는 것보다는 그들과 나와의 연결고리가 건너 건너 알게 된 이들이라 해도 그들이 품고 있었던 행위 자체에 대한 비밀을 현재의 내가 안고 있다는 것에서 그것은 세상의 유일한 에피소드이자 흥미로운 것들이 되는 것이다.
“소소한 풍경”의 화자는 ㄱ이다. ㄴ과 ㄷ의 이야기를 화자인 ㄱ에게서 듣는다. 이런 호칭이 혹 이상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단지 하나의 풍경이라면? 풍경1, 풍경2, 혹은 풍경3에 불과하다면? 김춘수 시인의 <꽃>에 따르면, 누구의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불과하며, 이름을 물러주었을 때 그는 비로소 내게 와 ‘꽃’이 된다. 우주적인 함의가 담긴 비유가 아닐 수 없다. 나는 그러므로 고쳐 묻는다. –본문
그렇기에 이 책 속의 주인공들의 이름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성과 이름이 아닌 ㄱ,남자1, ㄴ, ㄷ이라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의 이름이 아닌 그들이 안고 있는 이야기이고 그들의 이야기 속에 어떠한 사연이 담겨 있느냐는 것이 중요할 뿐이며 주인공들이 ㄱ이든 A든, 세상 그 어떤 이름이든 상관 없이 그저 이 안의 사연을 담고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라는 것에서 그들은 이름이 아닌 이야기로 살아 있었고 그렇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다.
1+1+1이 3이 아니라 1이라는 ‘덩어리’가 되었을 때 그들은 가장 완벽한 구체를 만들어 완전체로 살고 있다. 물론 이것은 다분히 그들만의 시각에서 바라본 관점일 것이고 아직 나 역시도 그들이 관계에 대해서 100% 이해했다 확언할 수는 없지만 본능적으로 그들이 함께 있었던 그 순간이 가장 안정적인 때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에 그들이 아직까지 계속해서 하나의 덩어리로 있었더라면 이 이야기가 지금의 나에게 전해졌을까? 라는 질문을 해보게 되고 만약 그러했다면 이 이야기는 세상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다시 셋으로 되어 이들이 하나의 덩어리로 뭉쳐 있다가 다시 인수분해 되 듯이 조각조각의 개체로 태어나기 시작하면서 그 틈 사이로 그들이 각자 품고 있었던 아픔들이 흘러 나오게 된다. 그저 ㄱ, ㄴ, ㄷ으로 불렸던 초반에는 가벼이 그들의 관계를 마주하게 되었다면 하나 둘씩 덩어리에서 떨어져 나온 그 개인개인을 마주하게 되면서 그들은 ㄱ, ㄴ, ㄷ이 아닌 그 하나의 형상이 되어 나에게 묵직한 이야기로 살점이 더해지고 그러다 보면 그들은 그 어떠한 이름보다도 각인되어 잔상을 남기게 된다.
하나의 덩어리로 지기 전까지, 그들이 각자 안고 있었던 아픔은 ‘선인장’으로 표출되어 나타나는데 그저 선인장이라면 뾰족한 가시도 온 몸을 뒤덮고 있는 희한한 식물로만 생각하고 있던 나에게 다양한 사연을 안고 있는 수 많은 사람들처럼 선인장의 종류에도 그만큼의 숫자가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ㄱ의 인생에 ㄴ과 ㄷ이 나타나기 전까지, 그녀는 남자 1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둘이었지만 혼인신고가 되어 있지 않았기에 사회적으로는 부부가 아닌 동거인으로서 함께한 그들은 결국 선인장에 대한 서로의 견해의 차이를 시작으로 사랑의 종지부를 찍게 되었고 그리하여 지금 ㄱ은 다시 혼자가 되어 남겨져 있다.
오해의 시작이다.
그는 오래전 아버지가 노조 사무실에서 들고 나왔다는 금호를 가리키며 “요놈 아주 고집불통으로 생겨먹었어. 내게 적개심을 가진 것 같아 보여”라고 말한 적도 있다. 아버지의 ‘유일한 동지’가 그에겐 ‘적’으로 보였던 셈인데, 그때도 나는 문제의 근원은 간파하지 못하고 다만 가슴을 에는 통증을 느꼈을 뿐이다.
오해의 확장이다. –본문
처음 사랑이 시작할 때에만 해도 모든 것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흰 운동화를 시작으로 ㄱ과 남자1가 지내왔던 시간들이 하나 둘 중첩되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세상에 없을 인연이라 믿고 있었고 그렇게 시작한 사랑은 영원히 빛이 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한 반짝임도 잠시, 사랑이라고 믿었던 그 하나하나의 손짓이 그녀에게는 폭력으로 변모되어 전해졌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전혀 다른 형태로 전해지는 둘 사이는 다른 세계에 사는 이들처럼 융화될 수 없었고 그렇게 둘은 다시 각자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아버지에게 유일한 친구였던 선인장이 그녀의 얼굴에 박혀버린 것처럼 ㄱ의 인생에도 남자1은 굴러들어왔다가 아픔만을 남기고 떠나버렸다. 그렇게 혼자 사는 게 낫다, 라고 외치고 있던 그녀의 앞에 자신이 품고 있는 가시를 드러내지 않는 ‘온즈카 난봉옥’과 같은 선인장 ㄴ이 나타난다.
언제나 떠날 준비를 하고서는 더블팩을 벽에 세워두고 있던 ㄴ에게 ㄱ의 집에서 조금 더 내게 될 유예의 시간을 전해준 것은 다름 아닌 ‘삽’이었다. 마당에 ‘샘’을 파고 싶다는 그는 몇 달에 걸쳐서 똑같은 자세로 한 곳에서 땅을 파고 있었고 그 시간 속에서 ㄱ과 ㄴ은 하나가 되어간다. 물론 ㄱ과 ㄴ의 관계를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랑’이라는 단어로 묶는 것은 어려움이 있다. 그들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구속하거나 속박시키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ㄴ이 ㄱ과 함께 있었던 것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위한 시간 연장이었으며 그렇게 샘이 완성된 순간, 그는 홀연히 자신의 길을 가게 된다.
고향 집 마당귀엔 작두샘이 있었어요.
철물점에 걸려 잇는 삽을 보았을 때 바로 그 작두샘이 떠올랐지요. 눈에 보이지 않는 지하의 물길을 통하면 내가 버린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예요. 뭍으로 돌아가는 길은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으니까요. 말하자면 작두샘의 기억이 내게 새로운 길을 예시해준 셈이었지요. –본문
ㄱ과 ㄴ 사이에서 동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으로 ‘왜 둘이서만 그래”라고 외치던 ㄷ도 어느 새 그들 사이에서 하나가 되어 있다. ㄷ이 있기에 ㄱ과 ㄴ과 ㄷ의 사이가 일반적인 사랑이 아니라 감히 말할 수 있게 된다. 서로를 원하면서도 서로에 대한 애증이나 질투가 없이 그저 하나가 좋은 이들을 보면서 그 상황이 아닌 누구도 그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함께 있는 순간 가장 행복했다는 것의 반증은 영화 <사랑한다면 이들처럼>의 여주인공처럼, ㄷ은 ㄱ, ㄴ과 함께 생을 마감하려 거실에 연탄불을 올려놓은 장면에서였다. 물론 이 날의 에피소드는 실패로 돌아가게 되지만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된 ㄱ과 ㄴ, 그 누구도 ㄷ을 원망하기는커녕 ㄷ을 이해하고 있었으니 그들은 하나의 덩어리가 되면서 같은 생각을 꿈꾸고 있었던 것일 게다.
셋이 분리되고 나서야 그들은 서로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게 된다. 사실 그 전에는 알 필요조차 없었던 수 많은 정보들은 ㄱ, ㄴ, ㄷ이라는 이름이 아닌 소설 우물의 저자이자 기타리스트이며 사씨의 딸이란 수식어로 이어지고 있었고 세상에 더 이상 그들이 함께 했던 하나의 덩어리가 사라지면서 사람들은 그들 하나하나를 밝혀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키워드는 그러라고 난 생각해. 이를테면 죽음이, 너희의 영혼을 최대한 순수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해보는 거야. 그래야 너희들의 비정상적인, 이런 말을 쓰게 돼서 미안하다만, 비정상적 관계를 설명할 수 있게 돼. 남자2이 누이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더 오염된 것하고 같은 원리일거야. 고통이라고 해도 좋아. 남자 2은 죽음, 혹은 고통으로 오염된 반면, 너희는 그것으로 너희를 씻은 거지. 그렇게 씻고 나면 최적의 순수성으로 앞날을 내다보게 돼.” –본문
ㄴ은 원래 자신이 꿈꾸던 세상에서 유영하고 있을 것이다. ㄷ은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날 수 없는 현재를 거역할 수 없어 오늘을 살고 있고 ㄱ은 그 옛날 자신을 향해 드리웠던 따스했던 손을 찾아 이 모든 것을 털어놓으며 진정한 자신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남자와 사람의 차이가 사랑의 차이라고 말했던 ㄱ은 ㄴ과 ㄷ 모두 그녀의 남자라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터널을 지나온 지금 ㄱ은 남자와 문장을 동일한 것이라 말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손선생을 통해 전해진 이야기니 만큼 조만간 ㄱ의 문장이 다시 전해지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녀가 말하고 싶은 남자의 이야기는 또 어떠한 덩어리와 선인장을 안고 있을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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