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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개인을 이렇게 만드는가?
칼 구스타프 융 지음, 김세영 옮김 / 부글북스 / 2013년 1월
평점 :
품절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책을 몇 년 전 구입해 놓고 장식용 인형처럼 책장 안에 고이 모셔두고는 오랜 동안 먼지만 쌓아 두며 언젠가는 나의 것이 될 수 있겠지 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영화 채널에서 데인저러스 메소드란 영화를 보며 프로이트 뿐만 아니라 융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프로이트와 융, 그리고 그녀. 라는 부제를 가진 영화 데인저러스 메소드는 삼각관계의 중심에 있는 슈필라인을 중심으로 환자와 의사에서 연인관계로 발전되며 그 안에 프로이트와 융 사이의 관계 역시 함께 그리고 있다. 프로이트가 고안해 낸 정신분석 치료법으로 융의 첫 환자였던 슈필라인의 치료하며 그 둘은 가까워지게 되고 융의 도움으로 그녀는 후에 아동 정신분석의가 된다.
영화에서는 프로이트와 융에 영감을 준 뮤즈인 슈필라인과의 관계에 중점을 뒀지만 그 세 명의 주인공 중에 유독이나 융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한때는 프로이트를 멘토와도 같은 존재로 그의 의학에 대한 지식을 따르던 그는 프로이트의 개념을 뒤집게 된다. 시작은 그로부터 했으나 결론은 너무도 다른, 마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보는 듯 했다.
얇은 책의 두께와 넓은 행간을 보며 170여 페이지 정도는 단 몇 시간이면 일독할 수 있을 것이라 자만했다. 결론적으로 이 같은 생각은 깊은 오만이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단 10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이었다.
한 페이지를 읽고 다음페이지로 넘어가서는 다시 앞의 페이지로 돌아와서 읽었던 부분을 읽고 또 읽고. 그리고도 혹시 내가 놓친 부분은 없는지. 이미 이 세상에 없는 그를 원망하면서도 한 걸음에라도 달려가 물어보고 싶어졌다. 과연 내가 지금 이해하고 읽어 내려가는 것이 당신이 생각하던 내용이 맞는지, 이 부분은 어떠한 것을 말하는 지를, 구할 수만 있다면 이 책의 해석본을 구해다 읽고 싶은 심정이었다.
무엇이 개인을 이렇게 만드는가? 라는 그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무엇에 대한 것과 개인을 어떻게 만들었다는 것인지에 대한 원인과 결과를 모두 규명해야만 했다. 읽은 바를 제대로 이해 했다면 융은 개인이 집단이라는 틀 안에서 깨어날 것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냉전을 바라보았던 융은 그 안에서 대중이라는 힘 안에 그 만의 인격을 가진 한 개인으로서 살아 남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평균의 함정. 우리는 실 생활에서도 이러한 것들을 종종 보게 된다. 표준편차가 고려하지 않은 평균은 그 차제를 일반화 함으로써 또 다른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평균을 기준으로 실존하는 양 끝 값은 평균이라는 이름 하에 깎이고 더해지면서 실제가 사라지게 되고 또 실존하지 않을 수도 있는 평균이라는 값이 마치 실존하는 양 일반화 하는 것이다.
한 개인은 모두 유일하고 특별한 존재이므로 심리치료사가 한 환자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자 할 때에는 그 개인은 이전의 데이터의 숫자들과 같이 무한히 복제되는 하나의 단위로 보아 판단해야 하지만 그 환자를 개인적으로 이해하고자 할 때에는 이러한 데이터가 아닌 독특한 한 명의 환자로 보아야 한다고 주창하는 것이 바로 이 평균의 함정이라 할 수 있다.
집단화가 가중될수록 개인의 책임을 줄어들고 그 책임은 집단으로 전가시킴으로 개인은 사회의 부품화가 되고 이로 인해 실제 개인은 자신의 삶에 있어서 진정한 주인으로서의 역할을 빼앗기게 되는데 이러한 집단화 속에서 개인을 지키기 위해 평형추로서 이용되는 것이 종교이다.종교는 개인이 직면하고 있는 집단화의 유혹 안에서 지원군의 역할로서 개인의 주체화에 도움을 주지만 실상은 그 단계에서 또 다른 권위를 알려주게 된다. 신과 개인의 관계가 아닌 개인의 의지가 집단 심리에 굴복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리를 위하여 자신의 판단력과 결정 능력을 잃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에게 종교는 더 이상 종교가 아닌 신념이 되어버린다.
독재국가와 종파적인 종교는 동일하게 ‘공동체’ 사상을 강조하는데 이는 공산주의의 근본적인 이상이다. 0이라는 숫자에 아무리 많은 0을 더해도 1이 될 수 없듯이 하나의 공동체의 가치는 그 안의 개개인들의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수준을 뛰어 넘지 못하고 대중을 조직화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도구일 뿐인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 안에서는 개인들의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대할 수 없다. 즉 이 공동체는 주인공의 자리는 빠져있기에 개인적인 접촉을 통해서만 변화는 일어날 수 있다.
이러한 종교와 개인의 문제를 미국과 유럽 모두 물질적이고 집단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온전한 인간을 표현하고 이해하는 개별적인 인간이 만물의 척도이자 세상의 중심이라는 사상은 없이 그저 평균화된 인간을 표방하고 있는 것으로 바라본다.
이는 집단으로 되어 있을 때에는 어떠한 방향성이나 힘을 가지고는 있지만 실제 그 안의 개인들에게는 무가치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모습으로 우리 모두는 보통의 사람이 이 땅과 하늘과 바다의 주인이고 보통 사람이 국가의 역사적 운명을 가른다고 하지만 실제 그러한 보통 사람의 존재에 대해 현실은 그렇지 못한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집단이나 종교를 제외한 인간 한 개인을 바라보면 아직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잘 모르고 있다. 모든 것이 베일에 쌓여 있는 비밀의 화원처럼 더 이상 다가가서는 안 되는 경외의 장벽이라는 편견을 먼저 제거해야 한다고 본다.
개인의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기에도 버거울 만큼 개인의 의식이 황폐해진 것은 본능의 상실로 이는 인간의 삶이 시작된 이래로부터 인간의 마음의 발달에 있다. 의식이 주관적 것에 반대로 무의식은 객관적이면서도 개인의 내면을 바라볼 수 있는 것으로서 이러한 내면은 인간의 마음 발달에 따른 그림자 안의 자신을 찾을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집단 안에 뭉뚱그려지는 개인이 아닌 진정한 개인으로서 남을 수 있는 것이다.
읽는 내내 과연 이게 맞는 것일까? 라는 의문만을 남겨주는 융. 대체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이 무엇이었는지 진정 한 달음에 달려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담은 채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한 권의 책을 이해하기에 너무도 방대한 세상의 지식을 끌어와야 한 다는 것을, 그리고 그의 세계를 오롯이 한 권의 책으로 쉽게 탐하려 했던 나의 오만함도 다시금 생각해 보는 책이다.
집단 안에서 사라지는 내가 아니라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서, 쉽지 않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다시 통독하고 싶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