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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ㅣ 클래식 보물창고 18
알베르 카뮈 지음, 이효숙 옮김 / 보물창고 / 2013년 3월
평점 :
아마도 타의에 의해 이 책을 읽었다면 나는 이방인 속 뫼르소를 보고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며 비난하기에 급급했을 것이다. 어머니의 부고 소식을 전해 듣고도 별 다른 반응이 없었으며
어제와 동일하게 똑같은 날인 듯 장례식을 치르는 그를 보면서. 그리고 나서 옛 직장 동료였던 여자를
만나 코미디 영화를 보고 하루 밤의 정사를 나누고 그러다 어느 날 해변을 거닐다 아랍인을 총으로 살해하는, 그것도
우발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담담히 몇 발의 권총을 쏘는 그를 보면서, 그렇게 막을 내리는 1부를 보면서 아니 아마도 보기도 전에 닫아버렸을 것이다.
나는 두 시에 버스를 탔다. 날씨는 무더웠다. 나는 늘 그러듯이 셀레스트네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식당 사람들은 모두 몹시 마음 아파했고, 셀레스트는 "어머니는 오직 한 분뿐인데."라고 말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들은 문까지 따라 나와 배웅했다. -본문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라고
시작하는 소설의 첫 마디를 보면서 그 동안 수많은 서평들이나 이방인에 대한 칼럼과 분석한 글들을 보며 이방인이라는 책이 이렇게 시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눈 앞에 마주하게 된 뫼르소와의 첫 조우에서 여전히 대체 이게 무슨 반응이람, 이란 생각으로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올해 양로원에 거의 오지 않은 데는 그런 이유도 약간 있었다. 버스 타고 가서 표를 사고 두 시간 걸려
여기 오는 노력은 차지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내 일요일은 잡아먹기 때문이기도 했다. -본문
무심하다는
말 한마디로 그의 모든 것을 설명하기에도 부족했다. 과연 뫼르소는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 대체 이 작품은 어떠한 면에서 알베를 카뮈를 전세계적인 작가의 반열로 오르게 했다는 것인지에 대해 읽는 내내
이방인, 뫼르소, 알베르 카뮈, 부조리 이 4개의 카테고리를 조합하고 이해하기 위해 계속 생각하고
또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들판에 가 본 지 오래된 나는 엄마
장례식이 아니었다면 산보를 하면서 아주 즐거웠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본문
엄마의
죽음에서도 별 다른 슬픔을 느끼지 않고 그 순간순간 떠오르는 생각들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는 그를 보면서 대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라는 생각과 보통 사람이라면 소리 내어 울고 죽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의 시간과 그 일련의 과정들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방인 속의 뫼르소는 어디에서도 내가 생각하는 평범한 인간의 모습들을 나타내지 않았다.
몇
년 전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도 나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내 자신이 운다는 사실을
인식하지도 못하게 멍하니 계속해서 할머니의 죽음과 산 사람들 사이에서 장례 절차를 바라보고 있던 그 순간, 그리고
그 모든 절차를 마치고 장례식장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나는 그 순간 배고픔을 느끼는 내 자신에 혐오감을 느끼며 그럼에도 밥알을 삼키고
있는 나를 보면서 그 모습에 또 다시 울컥했었는데 뫼르소는 그 어디에서도 인간다운, 인간미 넘치는 그
끄나풀조차 던져주지 않고 있었다.
나는 내 이마에서 태양이 심벌즈처럼
울려 대는 것밖에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희미하게, 여전히
내 바로 앞에 있는 칼에서 분출되는 번쩍이는 양날 외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 불타는 검이 내
속눈썹을 물어뜯고 고통스런 내 눈을 후벼 대는 것 같았다. 나의 온 존재가 긴장했고, 내 손은 권총을 꽉 쥐었다. 방아쇠가 굴복했고, 내 손은 권총 자루의 반들반들한 배에 닿았다. 바로 거기서, 메마르면서도 귀를 멍하게 하는 소음 속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본문
계속 이렇게 그에 대해 세상 속에 우리가 정해놓은 인간다움이라는 틀 안에서 그를 바라보면 그는 이방인을 넘어선 인간으로서의 지녀야만 하는
덕목이 없는 미개한 자로밖에 보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렇기에 나는 뫼르소처럼 생각하는 시각을 가져야만
했다. 그가 생각하는 대로, 그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대로
왜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나는 생각해보아야 했고 그렇기에 잠시 책을 던져버리고 훌훌 털어내어 이방인이 되어보고자 했다.
그리고
여전히 최악의 가정을 취했다. 나의 항소가 기각된다는 가정이었다.
"그래, 그럼 난 죽게 되겠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일찍, 그건 분명했다. 하지만 인생은 살아
볼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안다. 사실 나는 서른 살에 죽든 별로 중요치 않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당연히 다른 남자들과 다른 여자들이 살아 있을테고, 수천 년동안 그럴테니까. 요컨대 그보다 더 명백한 것은 없다. 그게 지금이건 20년 후이건 간에 죽게 되는 사람은 여전히 나였다. (중략) 사람이 죽게되는 마당에 어떻게, 언제, 이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분명했다. 그러므로, 나는 내 항소의 기각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본문
시지프의
신화 속에서 계속해서 바위를 산꼭대기로 올려야 하는 그 의미 없는 고된 노동 속에서도 그럼에도 그 안에서 존재의 이유를 찾기에 부조리에 대해 이해
할 수 있다는 그 이야기를 뫼르소의 삶의 태도에도 대입해 보아야 했다.
멍하니
대체 그의 삶에 있어서 부조리란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고민하던 찰나, 어느 순간 떠오르는 것을 죽음의
도래를 지워버리고 내일을 기대하며 오늘을 사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언젠가는 죽는다는 진리를 알면서도
살아가야 하는 자신의 삶을 보면서 그는 죽음과 공존하는 오늘의 삶에 있어서 그 어떠한 것이든 동일한 가치를 가진다고 보았다. 그 무엇도 특별하지도 그렇다고 가볍거나
묵직하지도 않은, 그저 하나의 평행선상에서의 무수한 점들 중 하나 일 뿐인 것이다. 그렇기에 그에게 있어 엄마의 죽음과 그 이후 코미디 영화나 정사는 별개의 하나하나의 일들이었으며 아랍인의 살인사건이
발생하기 까지는 자신 스스로가 자신의 삶에 대해 놓았다면 그 사건 이후 타인에 의해 자신의 삶이 결정되는 것들을 보면서 그는 또 다시 현상의 부조리에
대해 깨닫게 된 것이다. 자신의 재판 과정에서 대변하는 것에 대해 귀찮다고 생각하고 그 과정들이 지루하게만
느껴졌던 뫼르소에게 있어 오늘의 죽음은 중요치 않다. 어차피 언제건 오게 될 기정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소설이 너무도 슬프게만 느껴졌다. 세상의
다정한 무관심에 행복했으며 자신의 처형일자에 많은 사람들이 와서 자신이 떠나는 날이 외롭지 않게 해줬으면 좋겠다는 그 마지막 순간을 읽으며 과연
그는 진정으로 행복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이라는 너무도 진리한 진실에 빠져있었던 뫼르소에게 삶은
그저 죽음으로의 길로 가는 통로였을 뿐이었다. 우리 모두가 보이게 그는 낯설은 이방인이었지만, 매일을 아등바등하며 지내는 우리가 그에게 있어서는 모두 낯선 세계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