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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책 읽기 - 그 시절 만난 책 한 권이 내 인생의 시계를 바꿔놓았다
김경민 지음 / 쌤앤파커스 / 2013년 2월
평점 :
요새 들어 책 안에 책이 담겨 있는 에세이를 다른 책들보다 많이 읽고 있는 듯 하다. 한 달만 해도 2~3권을 읽으니 그 빈도가 전체 독서량에서 차지하는 부분이 꽤나 차지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한 권의 책을 통해서 여러 권을 만나 볼 수도 있고 또 그만큼 저자 자신에게도 기억에 남을 만한 것들을 추천하고 있을 것이라는 공연한 믿음이 1차적인 이유였다면 얼마 전 읽었던 이방인이란 소설을 통해 알게 된 것처럼 에피타이저처럼 미리 그 맛을 음미하기 전에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이런 류의 책의 존재와 필요성에 대해 명확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루 동안에도 신간 서적이 수 백 권씩 쏟아져 나오는 형국에 아무리 하루에 한 권의 책을 고루 읽는 다고 해도 고작 350여권 정도이다. 그 정도의 시간도 없을뿐더러 그렇게 할 용기도 없기에 타인을 통해서 쉽게 배부를 수 있는 이 책을 또 집어 들었다.
‘그 시절 만난 책 한 권이 내 인생의 시계를 바꿔 놓았다.’ 표지 속 부재와 같은 이런 비슷한 문구들을 만나면서도 아직까지 실감하지 못하는 것은 여전히 독서를 통한 나의 혜안이 이 만큼은 도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치열하게 책을 읽어보지도, 그렇다고 어떠한 한 권에 미친 듯이 빠져 고민하며 탐독하기 보다는 한 권을 읽었다! 라는 마지막 장을 덮을 때의 희열에만 도취되어 있기에 젊은 시절 읽었던 책 때문에 그리스를 갈망하고 그 곳에 취해 있었던 박경철 선생의 그 강렬한 울림도 이 책의 저자가 느꼈다는 삶의 나침반을 재정비하는 때에도 나는 여전히 언젠가는, 이라는 바람을 안고서 읽어 내려갔다.
공부 좀 해! 라는 소리를 들으며 책상 머리에 붙어 있던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대체 내가 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회의에만 빠져 있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를 주창하며 현실을 벗어나고픈 마음에 버둥거리기는 하지만 다시 제자리인 곳에서 억지로 공부를 했다면 저자는 이 책 좀 읽어봐! 가 아니라 내가 느꼈을 때는 이랬다. 그리고 이 책 안에서 나는 이런 것들 것 배웠다. 는 식을 어찌 말하면 퉁명스러운 듯 하면서도 쿨한 듯한 어조를 유지하고 있다.
이 책이 내 인생을 바꿨어! 라며 방방 뛰어가며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제발 좀 읽어! 너도 달라질 수 있어! 가 아니라, 나는 이랬어, 뭐 너도 느껴보고 싶으면 읽어봐, 이 느낌이다. 뭐랄까?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심리를 교묘하게 알고서는 유도하는 느낌이랄까? 인생을 바꿨다며, 대체 무엇이 이토록 당신의 삶을 바꾼 것인가요? 라는 궁금증을 안고서 더 빠져들게 하는 실로 가독성을 가진 어조이다.
삶의 조각조각 깨져 더 이상 가망이 없어 보일 때조차 자신이 살아야 하는 ‘의미’를 부여잡고 있는 사람은 산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왜why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을 그 어떤 how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 의미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찾아내고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흔히 사람들은 자신이 사는 이유가 자신도 모르게 주어질 것이고 주어져야 한다고 믿지만 그 믿음은 어디까지나 착각일 뿐이다. - P 72
아마도 ‘죽음의 수용소에서’ 라는 책을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마주했다 하더라도 나는 절대 열어보지 않았을 것이다. 지나온 역사라고 하기에 너무도 가슴 아프고 끔찍했던 모습들을 굳이 마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희망차고 아름다운 것들이 가득하니 괜히 이 책을 보며 힘들어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라며 눈길을 단번에 돌려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읽었던 삶의 희망과 사람을 죽게 만드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무의미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아우슈비츠의 수감자들이 사랑하는 가족들과 지인들을 먼저 떠나 보내야 하는 고통과 매일을 죽음의 그림자와 그 누가 살아나갈지를 모르는 희망 없는 그 공간 속에서 자살을 보류하고 살게 만드는 그 힘, 그것이 무엇인지를 꼭 찾아봐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릴케의 편지 뿐만 아니라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과 같이 강한 끌림을 느낀 것은 박완서의 한 말씀만 하소서라는 책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아들의 죽음을 앞에 두고 그 무엇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억겁의 시간을 큰딸의 집에서 지내는 동안 마음대로 울지도 못하는 동안 그녀는 피눈물로 이 원고를 써내려 갔을 것이다.
내가 교만의 대가로 이렇듯 비참해지고 고통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치자. 그럼 내 아들은 뭔가. 창창한 나이에 죽임을 당하는 건 가장 잔인한 최악의 벌이거늘 그 애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런 벌을 받는단 말인가. 이 에미에게 죽음보다 무서운 벌을 주는 데 이용하려고 그 아이를 그토록 준수하고 사랑 깊은 아이로 점지하셨더란 말인가. –P76
아직 나는 이 마음이 어떠한 것인지를 전부 이해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저 엄청난 슬픔이었겠구나. 내 안에 온전히 품고 있던 아이가, 멀쩡하니 숨쉬고 있던 그 자식이 한 순간에 사라졌으니, 아마 부모님들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할 수만 있으면 내가 대신 아프고 내가 대신 하늘로 먼저 가서라도 잃어버린 자식을 되찾고 싶었을 것이다.
이 모든 세계가 무너져버린 와중에도 펜을 놓지 않고 글을 써 내려간 박완서 선생의 글을 읽어 볼 수 있어 저자는 감사하고도 다행스럽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 애통함을 넘어선 한스러움을 고스란히 담아 쏟아 담아 냈을 원망과 회한들이 시간을 지나 어떠한 모습으로 탈고 되었을지, 독자라는 제 3자의 입장에서 읽어 내려가기만 하는 그 간단한 수고스러움을 꼭 해봐야겠다.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분리의 벽을 허물 수 없었던 남자와 여자는 스크린 속 부부의 행복한 또는 불행한 사랑의 이야기에 참여할 때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린다. 많은 부부들이 스크린 위에서 전개되는 이러한 이야기를 구경할 때 서로 사랑을 주고받지는 못하지만 함께 다른 사람의 ‘사랑’의 구경꾼으로서 사랑을 경험하는 유일한 경험을 갖는다. 사랑이 백일몽인 한, 그들은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이 실재하는 두 사람 사이의 현실적인 관계가 될 때, 그들은 얼어붙는다. P202~203
해품달의 김수현이 울면 따라 울고 8년만에 한가인과의 뒤엉킨 인연이 마주하는 순간 환호를 질렀던 나는 아직 넘어야 한 산들이 까마득히 줄지어져 있다. 여전히 유아적인 시각에 머물러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몸만 커버린 어른으로 남기 전에 지금에라도 하나씩 산을 올라봐야겠다. 그래도 이 세상 왔다 가는 동안에 무엇이 진리인가에 대한 고민을 따라 발자취는 남겨봐야 하지 않을까. 장학사가 왔다며 수선거리는 거짓을 깨고 현실을 마주했던 저자처럼 나만의 길을 가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