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행복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 스물아홉, 임신 7개월, 혈액암 판정
이미아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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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아홉, 임신 7개월. 여기까지만 해도 나는 저자의 삶에 대해 부러움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아이를 갖는 것에 대한 바람을 어릴 때부터도 막연하게 가졌었기에 20대의 목표 중 하나였던 임신이라는 축복의 경험을 하고 있는 그녀가 자못 넘을 수 없는 산처럼 느끼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축복을 뒤 엎어버리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혈액암 판정이다. 스물 아홉의 나이에, 임신 7개월의 상태에서 발견한 혈액암의 존재. 이 세 마디의 문구 중 마지막을 읽으면서 뭐랄까, 순간 얼어버리는 느낌이었다.

 주변의 임신한 지인들만 보아도 한 순간 순간 모든 정성을 쏟아 붇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먹는 것부터 파마나 염색은 절대 생각지도 않고. 하물며 좋은 것만 보고 들으라는 이야기와 같이 태교에서부터 자신의 습관들까지도 모두 고려하고 생각하고 있으니. 뱃속의 아이와 함께 하는 순간 여자는 하나의 생명체가 아닌 두 개의 심장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 어느 때보다도 주변과 자신을 경계하고 철저히 자신을 지키고들 한다

 그런 그 순간에 발견한 암의 존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저자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나의 생명을 오롯이 책임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애쓰고 있는 그 순간에 드리워진 생각지도 못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다행히도 그녀는 쓰러지지 않고 굳건히 오늘까지 자신과 아이들을 지키고 있었다.

 엄마는 너희에게 나는 이렇게 성공했다라는 이야기보단 나는 이렇게 실패하고 다시 일어났다는 말을 더 많이 해주고 싶어. ‘내가 이렇게 해냈으니 너도 이렇게 할 수 있어라는 말보다는 나도 이렇게 실패했다. 실패의 지점은 누구나 비슷하니까 섣불리 낙담하고 스스로를 옥죄지 마라고 말해주고 싶어. –P 14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도 온전히 이 저자와 그녀의 아이들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었다. 나와 비슷한 연령이기 때문에 드는 생각이었을까? 나의 스물 아홉 역시 격정적인 한 때를 보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녀에 비하면 나는 참 행복했었구나 라고 생각하며 엄마가 된 그녀와 그녀의 아이들에게만 초점을 맞춰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누군가의 딸이자, 며느리이자 또 아내의 역할도 함께 존재한다. 또한 누군가의 친구이자 동료였으며 선배 혹은 후배였을 것이다. 그 수 많은 역할들을 뒤로하고 엄마로서의 그녀만 생각하다니. 여전히 내가 본다고 하는 것들은 몹시도 한정적이구나, 이기적이면서, 라고 생각하며 계속 책장을 넘기게 된다.

 무뚝뚝한 남편의 반응과 그다지 달라진 것 없는 친정 부모님의 모습들. 그녀를 대신해서 아이들을 봐주고 계신 시어머니부터 엄마가 아프다는 것을 어렴풋이만 알고 있는 아이들 사이에서 그녀는 하루에도 몇 번씩 휘청거리게 된다. 행복한 삶의 영역에서 어느 새 어두운 암과의 사투를 벌여야 하는 그 요단강은 건너는 순간부터 그녀에게 이 수 많은 역할극은 때로는 버겁기만 하다. 일단 살수 있을까, 살아야 한다, 살고 싶다는 생각들이 먼저였으니 말이다.

창백한 아이의 얼굴과 그 어머니를 보며 속으로 기도했다.

하느님, 제 아이들 대신 제가 아파서 정말 다행입니다.” (중략)

난 부모님께 정말 이기적이었다. 내 아이가 아프지 않아 다행이라는 기도를 하면서야 비로소 그 아픈 진실을 깨달았다. –P79

 그럼에도 그녀는 아이들과 자신을 지켜봐 주는 가족들과 그리고 주변사람들의 바람들과 그 동안 그녀가 자주 읊었다는 한시의 힘을 빌어 다시금 세상으로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지금까진 암 투병이 내 인생의 바닥이었지만 앞으로 살아가면서 더 많은 바닥을 만나게 될 것이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더 깊은 바닥도 만나게 될 것이다. –P178

이 세상을 등질지도 모른다는 30%라는 숫자를 벗어나기까지 70%의 생존 가능성보다 30%이라는 숫자가 얼마나 크게만 느껴졌을지. 자신과 자신 때문에 주변까지 힘들어 하는 그 아픔을 시간들을 견뎌왔기에 살아있어야만 걱정도 할 수 있다는 그 말이 참 아련하면서도 다행이다 싶었다. 모든 것을 이겨내고 웃을 수 있으니 지금 이 책을 나도 마주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책을 덮고 나서 자꾸 그녀의 일상들이 더 궁금해진다. 지금은 또 어떤 모습일지, 아이들에게 예쁜 엄마가 되겠다는 약속과 함께 자신을 위해서 운동을 시작한다는 그녀의 이야기를 보면서 더 이상 민머리가 아닌 봄날에 머리를 한 켠으로 넘기며 주변 모든 이들과 이 날들을 즐기고 있었으면 한다. 그녀에게는 오늘보다 내일 더 행복해야만 하는 확고한 사랑이 그득히 있기에, 그럼에도 또 언젠가 드리울지도 모를 바닥 치는 날들도 지금처럼 이겨낼 수 있을 것이란 믿음으로 나는 행복한 그녀의 모습만을 기억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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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 철학으로 읽기 - 예술의 형이상학적 해명
조중걸 지음 / 한권의책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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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탐구는 인간에 대한 것이지, 세계에 대한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세계란 우리에게 비쳐진 세계일 뿐이고, 우리는 단지 인간에게 투영된 바의 세계를 볼 뿐이다. 굴절된 영상이 세계라고 가정하는 것은 오만이거나 순진함이다. -P 10

 책의 서문을 읽는 순간 불현듯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이 책 만만치 않겠구나. 미술도 모르는데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철학까지 섞여있다니. ‘형이상학적이라는 한 단어를 만나는 순간부터 긴장과 한숨이 한대 섞여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저자의 우스갯소리처럼 좋은 책은 칭찬받지만 읽는 이가 거의 없고 인기 있는 책은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기는 하나 그 잔상을 오래지 못한다는 말마따나 이 책은 양서이면서도 대중의 선택을 받는 책처럼 이 안의 내용을 고이 간직 할 수 있을까? 라는 안타까움이 먼저 베어나게 된다. 나와 비슷한 독자들이 있다면, 꼭 하나 일러주고 싶은 점이 있는데, 지금 읽고 있는 부분이 온전히 이해되지 않는다고 얽매여 있지 말고 다음으로 넘어가면서 계속 읽어 내려가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앞에서 갸우뚱하는 것들도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웃고 있을 테니 말이다.

성당 내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바라보게 되는 것은 스테인드글라스다. 다양한 빛깔의 유리로 구성되어 있는 창을 보면 바깥 쪽의 햇살이 드리우는 일반적인 창과는 다른, 화려하지만 가볍지 않은 중후한 느낌이 들곤 한다. 일전에 다큐멘터리에서 이러한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작하는 장인의 공방을 본 적이 있었는데 하나하나 색깔을 맞추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그의 모습이 오버랩 되며 떠오르곤 했지만, 스테인드글라스에서 그 이상의 의미를 찾지는 못했다. 아마 이 책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스테인드글라스를 볼 때마다, ‘멋있다얼마나 손이 많이 갔을까이 두 가지의 생각에서만 맴돌고 있었을 것이다.

고딕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조성하는 새로운 빛과 분위기는 그 존재 의의를 탐구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져 왔다. 그러나 고딕 시대에 시작된 새로운 세계관과 신앙관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이해는 이 학구적 난제를 간단히 해결한다. 스테인드글라스가 조성하는 빛은 자연주의적인 빛이 아니다. 이 빛이 부유하는 듯한 성당 내부의 분위기가 결합되면 갑자기 초자연주의적인 것이 되고 만다. 다시 말하면 고딕의 빛은 신비주의적이다.–P112

 

 이전 시대인 로마네스크의 예술이 천상과 지상은 함께하며 그 믿음을 기반으로 하여 만들어진 예술이었다면 고딕 예술은 이러한 천상과 지상의 합체를 분리하여 보는 새로운 시도이다. 그러므로 이전과는 다른 예술양식이 필요하게 되고 그 결과 고딕 예술에서는 지상에서의 인연들은 모두 내려놓고 천상인 하늘로 향하려는 욕망이 담겨 이전과는 다른 형태의 성당들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스테인드글라스를 품은 성당의 모습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파르테논 신전을 보고, 샤르트르 대성당을 바라보면 이전에는 미처 하지 못했던 생각들도 하게 된다. 그 시대에 어쩜 이러한 건축물들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 그 안에 고딕이니 르네상스니 이런 것들은 잠시 안착해 가는 버스정류장들처럼 금새 희미하게 사라져버리고 언제나 어떻게 만들었을까? 그리고 아름답구나 라고 만 생각했다면 고딕의 탄생 배경을 보고 나서는 그 이전의 예술 양식과의 차이점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VS

지금은 그 나름의 양식대로의 특성과 그 아름다움 때문에 찬사 받고 있는 고딕이, 고딕만큼이나 획기적이고 전면적인 양식이 없었다는 이유로 등장만으로도 이전 시대에 젖어 있는 이들에게 있어서 반감을 불러일으키며 비난 역시 면치 못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확실히 사진만으로도 이전의 그리스 신전과는 다른 느낌이긴 하다. 그리스 신전은 기둥과 벽이 고르게 분포되어 편안하면서도 그 안에서 주변의 분위기와 함께 한다는 느낌이라면 고딕 성당은 뾰족하니 하늘을 향해 솟아나 있고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좀 더 섬세하면서도 고풍스러우면서도 주변과의 관계에 있어서 독보적인 건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유명론은 이러한 자신감에 대한 전면적인 의문에서 출발한다. 유명론은 인간에게 실체란 단지 유사성에 기초한 집합명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써, 결국 실재에 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식에 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실재, 즉 보편자라 믿었던 것은 결국은 우리 언어상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이념에 대한 예술적 대응이 고딕이다. 유명론에 입각할 경우 보편자인 은 우리 인식상에 맺히지 않는다. 이제 신은 더 이상 우리 지성에 의해 포착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전 시대의 로마네스크 예술은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가 연속선상에 있다는 믿음을 표현했다. 그러나 고딕 예술은 천상과 지상을 분리해버린다. 이제 성당은 더 이상 지상적이어서는 안 된다. 천상과 지상은 이중진리설로 분리되며 따라서 새로운 성당은 천상적인 것이어야 한다. - P82~83

 무엇보다도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내용들은 구석기시대의 예술과 신석기시대의 예술에 대해 주창한 부분이다. 중고등학교의 교과 내용 중에 배웠던 내용이라고는 구석기 시대, 하면 돌도끼를 사용했으며 동물을 사냥하거나 채집 생활을 하며 무리 지어 살던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그 이후 등장한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농경생활로 인해 정착된 생활을 하게 되고 곡식을 얻게 되면서 그를 보관할 만한 그릇인 토기들을 만들었다. 이 정도가 대략 떠오르는 것들로 대체 이 곳에서 무슨 예술을 논한다는 말인가, 돌도끼를 보며 돌의 모양에 대해? 아니면 빗살무늬 토기의 빗살의 각도와 무늬에 대해? 무슨 예술이야, 라며 어이 없다는 듯이 페이지를 넘기면서 또 한 번 깨달았다. 어디서 안다고 함부로 이야기하고 다니면 안되겠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의 일 만분의 일도 안 되는구나. 파편을 보고서는 전부를 안다는 듯 또 그래왔구나, 라고 말이다.

구석기시대에 그린 벽화들을 보면 동물과 관련된 것들이 많다. 아무래도 사냥을 통해 주식을 해결해 왔기에 그들이 주로 다루는 것들을 그림으로 남겼던 것이겠지, 라는 생각이 1차원적으로 할 수 있는 생각이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어떠한 세계관이 그들로 하여금 그토록 박진감 넘치고 자신만만하며 아름다운 동굴벽화를 가능하게 하였을까? 그리고 신석기시대 인들은 새로운 기술적 진보와 더불어 왜 추상적이고 형식주의적인 예술을 택했을까? –P21

 

 

그 당시를 가늠하여 바라보고 있기에 무엇이 정답이다! 라고 이야기 할 수는 없겠지만 저자가 말하는 구석기 시대의 예술 양식은 구석기인들 스스로 이 온 우주를 확실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들은 그들의 눈에 보이는 대로 벽화로 남겼다고 한다. 낙서처럼 보이는 벽화라 할 지라도 그들이 그린 동물 그림은 밖으로 나가 사냥을 하면 바로 얻을 수 있는 것들이기에 물론 지금과 같이 쉽사리 잡을 수는 없었겠지만, 어찌되었건 그들이 생각하고 그대로 실천하면 얻을 수 있는 것들이기에 눈에 보이는 것들을 신격화 하거나 형상화 하는 것 없이 고스란히 그려 놓은 것이다.

 신석기 시대에 이들이 남긴 그림들을 보노라면 구석기 시대와는 확연한 차이가 난다. 그도 그럴 것이 농경사회로의 진입이 되게 되면서 그들이 얻고자 하는 것은 자연을 통해서 그러니까 자연의 도움이 있을 때에 비로소 그들의 노력이 빛을 바라게 된다. 땅 속에 씨를 뿌려 두었으나 비가 오지 않으면 그대로 메말라 버릴 테고 혹은 적절한 땅이 아니라면 씨앗은 발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인간의 손을 떠나버린 자연이라는 영역을 인지하게 되면서 신석기시대의 인간들은 물질적인 풍요는 누렸을지 언정 언제나 불안을 안고 살아야만 했다.

 

 

 

 

자연세계에 대한 그들의 이해와 자신감은 사실은 휘황한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자연세계의 작용은 그들이 이해할 수도 조작해낼 수도 없는 신비스러운 것이 된다. 이제 그들의 항해는 더 이상 목적지를 향하는 것도 아니었고, 어떤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게 되었다. 단지 망망대해를 표류하면서 그 자신이 도저히 파악해낼 수 없는 어떤 힘에 의해 멋대로 조종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P33


 

시간이 흘러 아름다운 것들, 그러니까 신과 그들의 세상에 대해서만 화폭에 담기던 때를 지나 이제는 일반적인 인간의 평범한 모습들도 등장하게 된다. 이전의 고전적인 화가들이라면 생각지도 못한 장면들이 이제는 들어나고 있다.

바야흐로 인간의 이성이 천체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뉴턴이 발견한 만유인력의 법칙은 우주의 운행을 포괄적으로 해명한 것으로 보였으며 이제 이 자연법은 인간 이성의 궁극적 개가로 보였다. 이제 사회와 도덕과 정치에서조차도 자연법을 발견하기만 하면 모든 궁극적 이상이 실현 가능할 것으로 여겨졌다. 한마디로 인간 이성의 기계론적 사유에 대한 신뢰와 자신감, 낙관주의가 유럽의 계몽사회를 물들였다. –P199

 철학과 미술의 상관관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대체 얼마나 어렵게 이야기를 하려고 이 두 가지의 카테고리를 엮은 것일까, 라고 초반에는 생각했다. 여전히 철학에 대해 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이 책을 통해 느낀 바로는 철학을 기반으로 해서 그 당시의 사상이며 예술이며 문화 등이 발아한다는 사실이었다. 아마도 그렇기에 저자는 철학과 미술을 엮어서 설명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가 이 책 어때? 라고 묻는다면, 쉽지 않아, 라고 이야기 할 것이다. 아직 나에게도 여전히 표면에 두둥실 떠다니며 흡수되지 않은 부분이 많기에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읽어봐, 라고 말하기도 우습겠지만 그럼에도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나와 같이 두 분야 모두 문외한의 눈으로 이 책을 마주한다면 쉽진 않겠지만 그럼에도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기에 한 권으로 구석기부터 현대까지의 전반적인 흐름을 배워본다는 일념으로 마주하면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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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책 읽기 - 그 시절 만난 책 한 권이 내 인생의 시계를 바꿔놓았다
김경민 지음 / 쌤앤파커스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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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새 들어 책 안에 책이 담겨 있는 에세이를 다른 책들보다 많이 읽고 있는 듯 하다. 한 달만 해도 2~3권을 읽으니 그 빈도가 전체 독서량에서 차지하는 부분이 꽤나 차지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한 권의 책을 통해서 여러 권을 만나 볼 수도 있고 또 그만큼 저자 자신에게도 기억에 남을 만한 것들을 추천하고 있을 것이라는 공연한 믿음이 1차적인 이유였다면 얼마 전 읽었던 이방인이란 소설을 통해 알게 된 것처럼 에피타이저처럼 미리 그 맛을 음미하기 전에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이런 류의 책의 존재와 필요성에 대해 명확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루 동안에도 신간 서적이 수 백 권씩 쏟아져 나오는 형국에 아무리 하루에 한 권의 책을 고루 읽는 다고 해도 고작 350여권 정도이다. 그 정도의 시간도 없을뿐더러 그렇게 할 용기도 없기에 타인을 통해서 쉽게 배부를 수 있는 이 책을 또 집어 들었다.

 그 시절 만난 책 한 권이 내 인생의 시계를 바꿔 놓았다.’ 표지 속 부재와 같은 이런 비슷한 문구들을 만나면서도 아직까지 실감하지 못하는 것은 여전히 독서를 통한 나의 혜안이 이 만큼은 도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치열하게 책을 읽어보지도, 그렇다고 어떠한 한 권에 미친 듯이 빠져 고민하며 탐독하기 보다는 한 권을 읽었다! 라는 마지막 장을 덮을 때의 희열에만 도취되어 있기에 젊은 시절 읽었던 책 때문에 그리스를 갈망하고 그 곳에 취해 있었던 박경철 선생의 그 강렬한 울림도 이 책의 저자가 느꼈다는 삶의 나침반을 재정비하는 때에도 나는 여전히 언젠가는, 이라는 바람을 안고서 읽어 내려갔다.

 공부 좀 해! 라는 소리를 들으며 책상 머리에 붙어 있던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대체 내가 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회의에만 빠져 있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를 주창하며 현실을 벗어나고픈 마음에 버둥거리기는 하지만 다시 제자리인 곳에서 억지로 공부를 했다면 저자는 이 책 좀 읽어봐! 가 아니라 내가 느꼈을 때는 이랬다. 그리고 이 책 안에서 나는 이런 것들 것 배웠다. 는 식을 어찌 말하면 퉁명스러운 듯 하면서도 쿨한 듯한 어조를 유지하고 있다.

 이 책이 내 인생을 바꿨어! 라며 방방 뛰어가며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제발 좀 읽어! 너도 달라질 수 있어! 가 아니라, 나는 이랬어, 뭐 너도 느껴보고 싶으면 읽어봐, 이 느낌이다. 뭐랄까?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심리를 교묘하게 알고서는 유도하는 느낌이랄까? 인생을 바꿨다며, 대체 무엇이 이토록 당신의 삶을 바꾼 것인가요? 라는 궁금증을 안고서 더 빠져들게 하는 실로 가독성을 가진 어조이다.

 삶의 조각조각 깨져 더 이상 가망이 없어 보일 때조차 자신이 살아야 하는 의미를 부여잡고 있는 사람은 산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why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을 그 어떤 how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 의미가 주어지는것이 아니라 찾아내고 만들어내야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흔히 사람들은 자신이 사는 이유가 자신도 모르게 주어질 것이고 주어져야 한다고 믿지만 그 믿음은 어디까지나 착각일 뿐이다. - P 72

 아마도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마주했다 하더라도 나는 절대 열어보지 않았을 것이다. 지나온 역사라고 하기에 너무도 가슴 아프고 끔찍했던 모습들을 굳이 마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희망차고 아름다운 것들이 가득하니 괜히 이 책을 보며 힘들어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라며 눈길을 단번에 돌려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읽었던 삶의 희망과 사람을 죽게 만드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무의미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아우슈비츠의 수감자들이 사랑하는 가족들과 지인들을 먼저 떠나 보내야 하는 고통과 매일을 죽음의 그림자와 그 누가 살아나갈지를 모르는 희망 없는 그 공간 속에서 자살을 보류하고 살게 만드는 그 힘, 그것이 무엇인지를 꼭 찾아봐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릴케의 편지 뿐만 아니라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과 같이 강한 끌림을 느낀 것은 박완서의 한 말씀만 하소서라는 책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아들의 죽음을 앞에 두고 그 무엇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억겁의 시간을 큰딸의 집에서 지내는 동안 마음대로 울지도 못하는 동안 그녀는 피눈물로 이 원고를 써내려 갔을 것이다.

 내가 교만의 대가로 이렇듯 비참해지고 고통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치자. 그럼 내 아들은 뭔가. 창창한 나이에 죽임을 당하는 건 가장 잔인한 최악의 벌이거늘 그 애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런 벌을 받는단 말인가. 이 에미에게 죽음보다 무서운 벌을 주는 데 이용하려고 그 아이를 그토록 준수하고 사랑 깊은 아이로 점지하셨더란 말인가. –P76

 아직 나는 이 마음이 어떠한 것인지를 전부 이해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저 엄청난 슬픔이었겠구나. 내 안에 온전히 품고 있던 아이가, 멀쩡하니 숨쉬고 있던 그 자식이 한 순간에 사라졌으니, 아마 부모님들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할 수만 있으면 내가 대신 아프고 내가 대신 하늘로 먼저 가서라도 잃어버린 자식을 되찾고 싶었을 것이다.

이 모든 세계가 무너져버린 와중에도 펜을 놓지 않고 글을 써 내려간 박완서 선생의 글을 읽어 볼 수 있어 저자는 감사하고도 다행스럽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 애통함을 넘어선 한스러움을 고스란히 담아 쏟아 담아 냈을 원망과 회한들이 시간을 지나 어떠한 모습으로 탈고 되었을지, 독자라는 제 3자의 입장에서 읽어 내려가기만 하는 그 간단한 수고스러움을 꼭 해봐야겠다.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분리의 벽을 허물 수 없었던 남자와 여자는 스크린 속 부부의 행복한 또는 불행한 사랑의 이야기에 참여할 때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린다. 많은 부부들이 스크린 위에서 전개되는 이러한 이야기를 구경할 때 서로 사랑을 주고받지는 못하지만 함께 다른 사람의 사랑의 구경꾼으로서 사랑을 경험하는 유일한 경험을 갖는다. 사랑이 백일몽인 한, 그들은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이 실재하는 두 사람 사이의 현실적인 관계가 될 때, 그들은 얼어붙는다. P202~203

해품달의 김수현이 울면 따라 울고 8년만에 한가인과의 뒤엉킨 인연이 마주하는 순간 환호를 질렀던 나는 아직 넘어야 한 산들이 까마득히 줄지어져 있다. 여전히 유아적인 시각에 머물러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몸만 커버린 어른으로 남기 전에 지금에라도 하나씩 산을 올라봐야겠다. 그래도 이 세상 왔다 가는 동안에 무엇이 진리인가에 대한 고민을 따라 발자취는 남겨봐야 하지 않을까. 장학사가 왔다며 수선거리는 거짓을 깨고 현실을 마주했던 저자처럼 나만의 길을 가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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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가 모나리자를 그린다면? - 모나리자로 알아보는 서양 미술사 내인생의책 인문학 놀이터 1
표트르 바르소니 지음, 이수원 옮김, 이명옥 감수 / 내인생의책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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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에 대해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은 늘 해왔던 것 같다. 어릴 때에는 별 다른 관심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한 두 번씩 미술관에 다니게 되면서부터 매번 책 속에서만 봤던 그림들을 실제로 마주하는 순간 똑같은 그림이다!’ 가 아니라 늘상 보았던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보니까 무언가 다르긴 하구나.’ 라는 것을 느낀 그 순간부터였을 것이다. 르네상스 시기의 미술이 어떠하였으며 인상주의가 어떠하고 입체주의가 어떠하다, 라는 단순한 정의에 대해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한 작품을 보고서는 그 작품 안에 담긴 전반적인 의미를 통해 모든 것을 아울러 보고 싶었지만 파도 치면 사라지는 해변 위에 쓰여진 글자들처럼 안다, 라고 인식하는 지식들은 일회용으로 증발되기에 작품을 앞에 두고 단 한 순간도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인식하고 느낀다, 라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

 이토록 미술에 대해 문외한인 나에게 있어 피카소가 모나리자를 그린다면, 이라는 이 책은 혁명과도 같은 책이 아닐 수 없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인 모나리자를 피카소, 모네, 고갱, 마르셀 뒤샹, 앤드 워홀 등 그 당시 시대를 풍미했던 화가들이 자신의 관점에서 그린다면? 이라는 전제를 통해 만들어진 이 책 안에는 모나리자라는 주제는 동일하지만 그들이 그렸을 법한 모나리자가 담겨 있다.

 모네는 인상주의 기법으로 모나리자를 그렸어요. 인상주의란 화가가 대상을 보고 느낀 순간적인 인상을 표현한 그림을 말해요. 인상을 그리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죠. 첫인상이란 정말 빠르게 기억에서 사라지니까요. 모네는 모나리자를 처음 보았을 때의 인상이 사라지기 전에 재빨리 그림을 그렸어요. (중략)

 한편 피카소는 입체주의 기법으로 모나리자를 그렸어요. 입체주의란 큐브(Cuva). 즉 입방체로 구성된 그림을 말해요. 평면(2차원)인 캔버스에 입체(3차원)을 구현하는 미술 기법을 말합니다. –본문

반 고흐가 그렸을 법한 모나리자를 보면 왠지 마음이 푸근해진다. 둥글둥글한 선으로 그려진 것들 때문인지, 파란색과 노란색이 대비가 아닌 조화롭게 느껴져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전의 그의 작품에서도 꽤 자주 보았던 기법이기 때문에 보는 순간에 아, 반 고흐의 작품을 표방했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안에도 그간에는 내가 모르던 이야기들이 있었으니 바로 다음의 이야기였다.

-고흐가 그림에 담으려고 했던 것은 바로 자신의 마음속 슬픔과 불안이었단다.

-그림을 그리면 마음에 평온해졌기 때문이지.

-고흐와 모네는 모두 인상주의 화가였지만, 모네는 눈에 보이는 것을 그렸고, 고흐는 마음속 깊이 느끼는 것을 그렸단다. -P12

 

 홍대를 거닐다 보면 어디선가 마주칠 수도 있을 것만 같은, 10대 아이돌처럼 화려한 색채로 그려진 모나리자는 또 다른 인상주의 폴 고갱이 그렸을 법한 작품이다. 실제 모나리자에서는 제한된 색으로 표현함으로써 중후하면서도 고풍스러운 느낌이었다면 고갱의 작품은 좀 더 현대적인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같은 인상주의라고 하더라도 모두가 동일 한 것이 아닌 각자의 개성이 드러난다. 저자가 말한 대로 이 한정된 페이지에 인상주의 작가들을 모두 담기에는 한정되어 있다고 한다. 그가 말한 대로 한번 천천히 찾아봐야겠다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쉬우면서도 재밌는 미술사이다.

고갱이 모나리자를 그렸다면 아마 이렇게 그렸을 거야. 고갱은 그림을 그릴 때 색에 신경을 많이 썼어. 고갱은 빨강을 칠할 때, “나는 가장 아름다운 빨강을 칠한다.”라고 말하곤 했지. -P14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야수파인 앙리 마티스가 그린 모나리자였다. 색이 야수처럼이나 강렬하다는 의미로 야수파라 불리었다고 하는데 야수만큼이나 추악하다기 보다는 그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는 듯 한대도 불구하고, 당시만 해도 원작인 모나리자는 한정된 색채 안에서 중후하면서도 고풍스러운 느낌을 나타낸 것과는 달리 원색적인 야수파의 그림들은 가벼운 느낌이기에 천시 당했다고 한다. 그래서 개인적인 바람처럼이나 이들의 명목은 오래가지 못했다고 하니, 현 시대에 그들이 있었다면 분명 그들은 지원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마저 남았다.

고갱을 첫 야수파 화가라고 할 수도 있어 야수파는 비평가들이 조롱조로 우스꽝스럽게 붙여 준 이름이었지만, 야수파 화가들은 이 이름 아래 함께 모여 홍보 효과를 누렸지- P19

딱 한 눈에 보아도 피카소의 작품일 것만 같은 그림. 하나의 시선으로 그렸을 경우 다른 방향에서 보는 형체를 그릴 수 없기에 그는 한 작품 안에 다양한 구도를 함께 담아 그렸다고 한다 

 

 

내용 중 조금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프란시스 피카비아였다. 인상주의에서부터 오늘날의 모든 미술 역사 안에서 발휘되었던 사조들을 담으려 했다는 그에 대해서 뒤샹과 친구였지만 그보다는 부유한 덕분에 많은 작품을 남겼다는 것 밖에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무래도 저자가 독자에게 내주는 숙제가 여기저기 담겨 있는 책 인 듯 하다.

토마토를 먹을 때는 토마토로 보지만 그것을 그릴 때는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서문에서 이야기한 야수파 화가 마티스처럼 모자리자라는 한 작품을 두고 화가들이 각자 바라본 그들만의 작품을 상상의 나래를 펼쳐 만나볼 수 있다. 단 한 권으로 미술사에 대해 모두 배운다는 것은 허망한 바람이겠지만 적어도 지금부터는 어떠한 그림을 마주한다면 이러한 느낌이라면 누구의 모나리자와 비슷하다, 라는 생각을 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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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뻬 씨의 인생 여행 - 파리의 정신과 의사 열림원 꾸뻬 씨의 치유 여행 시리즈
프랑수아 를로르 지음, 강미란 옮김, 발레리 해밀 그림 / 열림원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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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요새 베스트셀러 순위를 보면 매번 상위에 올라 있는 꾸뻬 씨의 이야기를 보면서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인데 이게 왜 다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읽으려 하는 것일까? 라고 생각하다 유심히 바라보니 이전에 읽었던 것은 꾸뻬 씨의 행복여행이었다. 오래 전에 읽었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읽었던 그 순간 만큼은 따스했다는 느낌이 들었기에 행복여행을 지나 인생여행은 어떠할 지가 읽어보고 싶어 펼쳐 든 이 책은 그 당시 읽었던 행복여행이나 만큼이나 따뜻한 이야기였다.

 정신과 의사이자 아버지인 꾸뻬 씨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의 아들인 꼬마 꾸뻬의 관점에서 바라본, 어린 시절 그가 일들을 배우며 깨달았던 것들을 하나 하나 적어놓은 그의 노트와 함께 그 여정을 걸어가며 인생에 있어 던져지는 순간순간의 질문들에 대해 어떻게 답할 것인지에 대해 독자들에게 묻고 있다.

 사실 어른이 되면 어떠한 질문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없는, 천재가 되는 줄만 알았다. 그렇기에 모르는 것이 생기면 무조건 쪼르르 달려가 엄마든 아빠에게 여쭤보곤 했었는데 실상 다들 어른이라고 하는 그 나이게 되어보니 어른이라는 감투를 쓴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안다기 보다는 여전히 서툴고 모르는 것이 투성인 무늬만 어른이라는 생각에 내 스스로도 피식 웃음이 날 때가 있다.

 친구에게 시험 볼 때 답을 알려주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설명하는 엄마에게 꾸뻬는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주는 것이 아니라 친구가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왜 이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엄마의 이야기에 갸우뚱하게 된다. 똑같은 상황에서도 불구하고 커팅을 하면 안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들키는 일이 없다면 괜찮다고 이야기하는 아빠의 말씀 사이에서 꾸뻬는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에 대한 고민에 빠진다.

 폭력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상황에서 절대 그런 일에 끼어들지 말고 어른들에게 도움을 구하라는 엄마와 한 쪽 뺨을 맞았을 때 다른 한 쪽 뺨을 내밀지에 대해 고민하고나 혹은 맞았던 것에 비해 몇 배 더 힘차게 그 상대에게 돌려줄 것인가를 모두 고민할 수 있는 아이가 되기를 바라는 아빠의 이야기 속에서도 꾸뻬 뿐만 아니라 나 역시도 어느 것이 명쾌한 답일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이상적인 엄마와 실용주의 자인 아빠의 사이에서 둘 다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 꾸뻬를 보면서 나 역시도 어릴 적 했던 질문들을 돌이켜 보게 된다. 도덕적인 관점의 질문들은 물론이고 요새 읽었던 낙태나 피임에 관한 질문들까지, 초등학교 시절 한 때 진지하게 고민했던 문제로는 양호 선생님이 우리의 몸을 위해서 라면 국물을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담임 선생님이 지구를 위해서 라면 국물도 남김없이 먹어야 한다는 이야기 등등, 커가면서 꾸뻬처럼 학교에서도 친구들과의 삶과 선생님과의 삶이 있듯이 수 많이 늘어나는 각각의 페르조나 안에서의 내 삶 속에서 마주했던 질문들에 대해 떠올리며 생각해보게 한다.

 꼬마 꾸뻬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어린 시절의 기우가 현실이었다는 증거를 마주한 마지막 순간에 그의 동생은 그 편지를 가차없이 불태워 버린다. 절대적이라고 믿었던 관념과 생각들이 어느 순간에 또 틀어지거나 달라지기도 한다. 꼬마 꾸뻬가 꾸뻬가 되는 동안에, 꼬마 꾸뻬에서 벗어나 꾸뻬로서의 삶을 시작하여 마칠 때까지도 우리는 우리네 인생에 있어서 꾸뻬 처럼이나 수 많은 인생의 굴곡과 그 안에서 질문을 마주하게 될 터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반드시 하나의 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모르는 것들은 주변에 함께 도와 얻기도 하고 또 그렇게 남을 돕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 정도라는 길을 걷고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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