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탈리아의 초상
찰스 디킨스 지음, 김희정 옮김 / B612 / 201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단 몇 분만에 지구상에 존재하는 지도 몰랐던 곳에 대한 정보를 바로 입수할 수 있고 그 곳은 어떠한 모습인지, 유명한 장소 혹은 음식은 무엇인지, 그곳의 기후는 어떠한지 그들의 생활상부터 제도뿐만 아니라 소소한 모든 정보들을 단숨에 얻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쏟아지는 여행 에세이들을 통해서 어떻게 여행을 할 것인지, 어떠한 방식으로 예를 들어 배낭여행을 할 것인지 아니면 스쿠터로 여행을 할 것인지, 유럽과 같은 곳이라면 철도를 이용해서 갈 것인지. 어느 곳에서 묵으면 좋을 것인지 등 우리는 쏟아지는 여행에 관한 정보의 풍요 속에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찰스 디킨스의 이 여행 에세이는 특이하면서도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이유인 즉, 19세기 중반의 이탈리아가 배경이라는 것이 그 첫 번째 이유일 것이고 두 번째로는 맛집은 어디인지 어디가 숙소로 좋은지 등 어디서든 찾아볼 수 있는 내용들은 배제하고 지극히 그가 느낀 점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저 그가 느낀 대로 하나하나의 느낌을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마지막, 이것이 가장 특이하다면 특이할 수도 있는 점인데 현재 존재하는 여행에세이와는 너무도 다르게 그 흔한 그림이나 사진들은 없다는 것이다. 빼곡한 글자들로 가득한 여행에세이라니, 참으로 지루하겠군! 이란 생각이라면 크나큰 오산이다. 눈에 보여지는 사진이나 그림에 한정되어 세상을 보는 것보다 찰스 디킨스의 눈을 통해 비춰진 그 모습들을 세세히 묘사해 놓은 글들을 읽다 보면 그 어떤 사진보다도 찬란한 이탈리아를 마주하게 되니 말이다.
연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해외로 여행을 떠난다. 간단한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멋진 사진과 동영상을 곁들인 여행기와 각종 자료들을 찾을 수 있고, 여행 가방을 꾸리기도 전에 컴퓨터 앞에 앉아 유럽 어느 도시의 박물관 입장권을 일정에 맞춰 예매할 수 있는 세상이다. 이런 시대에 새삼스레 19세기에 쓰인 이탈리아 여행기를 읽자는 것은 생뚱맞은 일처럼 보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찰스 디킨스가 전하는 삶의 철학과 판타지 소설을 연상시키는 풍부한 상상력, 그리고 섬세한 묘사가 담긴 여행 에세이라면 어떨까. –본문
19세기 중반에도 여행하는 자들은 분명 있었을 것이다. 현대의 비행기나 기차, 자동차처럼 빠른 이동수단이 아니라 마차 또는 도보로 해야 했겠지만, 이 책의 여행자이자 주인공인 찰스 디킨스는 그 당시에도 꽤나 부유층에 속해 있었기에 그는 마차를 타고 이탈리아 전방을 돌아다니게 된다.
무엇보다도 나는 그가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그 모습을 처음 마주하는 순간, 진정 시간 여행을 떠나는 사람처럼 설레이기 시작했다. 이것이 19세기의 여행이구나, 라며 그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신세계를 마주했을 때의 그 떨림이었다. 말발굽이 굽이치며 넘실거리는 소리 너머 보여지는 풍경을 한 눈에 담아 고스란히 기록하는 그의 문체를 보면서, 단순히 어느 곳을 통해 어디로 도착했다가 아니라 한 줄 한 줄의 문장에는 생동감이 흘러 글자가 움직여 하나의 그림으로 만들어지는 마법 같은 힘을 지니고 있다. 글이 움직여 눈 앞의 화면으로 펼쳐지는 그 순간순간의 마술을 찰스 디킨스는 이 책 안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실현하고 있다.
다리 위에는 구두닦이들이 바삐 움직이고, 가게들은 문을 활짝 열고, 수레와 마차들은 덜그럭거리며 오갔다. 센 간 건너편 좁은 오르막길로 모여든 가지각색의 모자와 담뱃대, 블라우스, 큰 장화, 덥수룩한 머리꼭지를 한 사람들로 빼곡했다. 커다랗고 낡은 마차에 끼어 타고 나들이를 나선 가족들, 편안한 옷차림으로 다락방 창가에 기대에 새로 닦은 구두를 말리고 있는 남자들, 햇빛 아래 긴 양말을 널어두고 여유롭게 기다리는 여자들. 이런 모습이 곳곳에 보이지 않았다면 그날이 일요일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본문
그의 문제의 힘의 최고조로 발휘되는 때는 그 무엇보다도 리옹에 있던 감옥을 둘러보는 장면일 것이다. 도깨비 같은 노파라 부르던 그녀를 따라 지하 감옥으로 점점 깊이 들어가는 동안, 노파의 그 끔찍하면서도 우렁찬 목소리로 감옥 안에 메아리 치던 그 포효와 고통의 소리들이 실시간 음성지원으로 귓가에 맴도는 느낌이었다. 무언가 옥죄어오는 듯한 공포와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 숨을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던 그 장면을 보며, 책을 보는 동안 내가 그 미로 같은 감옥에 빠진 기분이었다.
“자, 보이오!” 그녀는 문고리를 빤히 보더니 큰 소리와 함게 도깨비 같은 힘으로 그 무거운 물을 열어 젖혔다. “이곳이 지하 감옥이오! 지하 깊은 곳, 무섭고 어두컴컴하고 소름끼치는 곳! 누구도 살아나올 수 없는 곳! 바로 종교재판의 비밀 지하 감옥이오!”
노파에게서 눈길을 돌려 지하 감옥을 바라보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사랑하는 아내와 친구들, 아이들, 형제들, 그리고 바깥세상의 모든 기억을 간직한 채 잊혀간 존재들이 있던 곳.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신음으로 벽을 울리며 굶어 죽어가던 곳. –본문
그에게 있어 이탈리아 중 로마가 가장 인상적인 장소였나 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 다는 옛말처럼 그는 로마에 있어서 가장 많은 페이지를 할당하고 그 곳에서 바라보았던 것들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도 상세히, 그 웅장하고 장엄한 풍경들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 모든 풍경을 바라본다는 것은 로마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바로 그 땅에 출몰하는 심술궂고,멋지고, 낡은 도시 옛 로마의 유령을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장엄하고, 위풍당당하고, 근엄하고 애처로운 모습이 아닌가. –본문
덜컹거리는 마차가 겨우 빠져나갈 듯 한 골목골목을 지나 쓰레기 더미 속의 악취가 때로는 그의 코를 짓이겨 놓은 듯한 통증을 덮어두고 그의 눈에 펼쳐진 경이로운 풍경들에 대해 소상히 전달해 주고 있다. 이미 지나간 시간 속의 풍경이라 낡아 버린 사진이나 스케치 속에서나 만나 볼 수 있을 법한 그 당시의 이탈리아는 지금의 모습보다도 오히려 더 매혹적으로 느껴진다. 아마도 지금은 만날 수 없는 유물과도 같은 시간들이라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그는 현재의 기록들을 남겨 놓았다지만 나는 한 세기를 넘는 시간을 지나서야 보고 있으니 참 신기하고도 묘한 일이다. 이탈리아는 그대로 존재하고 있으나 마차를 탄 그는 사라지고 이 책만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으니 말이다. 어찌되었건 현재로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19세기 중반을 한 권의 책을 통해 시간을 건너뛸 수 있다니! 이 하나만으로도 양 손 무겁게 여행 짐을 챙기기 이전에 과거로의 여행을 먼저 떠나보길 강력히 추천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