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이었을까, 나는 에로스의 능력이 부럽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큐피트 화살을 날리고 나서 그 앞에 짠, 하고 등장하면 사랑이 이뤄지는, 그리고 그 사랑은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 어느 동화 속 이야기가 신화가 아닌 현실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망상에 종종 빠지곤 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떠오르는 고민도 있었다. 만약 큐피트의 화살로 말미암아 나를 사랑하게 된 상대방은 아무것도 모르고 나를 사랑할 것인데 반해 나는 상대의 사랑을 받는 내내, 이것은 그의 마음이 나를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화학적이든 마법이든, 인위적인 것에 의해 나에게 향하는 것이기에 사랑을 받는 내내 괴로운 마음도 들 것이기에 큐피트의 화살 하나를 가지고 진퇴양난의 굴레 속에서 계속 맴돌고만 있었다.
어느 분야에서 10년간 꾸준히 하면 전문가가 된다는 어른들의 말씀과는 달리, 이 놈의 사랑이라는 존재는 아무리 경험치를 쌓는다고 해도 매번 새롭게 리셋되는 참 희한한 존재인 듯 하다. 살아 있는 동안에 끊임없이 우리 주변에 맴돌고 있는 이 사랑이라는 존재는 왜 이토록 내 마음대로 움직여 지지 않는 것인지. 이제 더 이상 에로스의 능력을 탐하는 부질없는 욕망은 내려 놓았다고 하더라도 풀리지 않는 이 미스터리 한 사랑에 대한 속성이 무엇이건대 우리는 이렇게 사랑 앞에서 발발 동동 굴러야 하는 것인지. 그래서 나는 꾸뻬 씨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대체 사랑 그게 무엇이길래 우리는 이렇게 힘들고 아프면서도 버리지 못하는 것인지 말이다.
사랑에 지친 사람들은 마지막 사랑을 간절히 원한다. 사랑하고 또 사랑받는다고 느끼는 누군가를 만나면 그것이 평생 함께할 마지막 사랑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안정된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시작되는 사랑의 설렘에 대한 기대를 버릴 수 없다는 데 있다. 설렘 후의 고통들을 뻔히 알면서. –본문
꾸뻬는 사랑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의 행복만을 찾기 위한 인간들의 욕망 어린 프로젝트에 함께 동참하게 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게 되고, 그리하여 둘은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와 같이 해피 엔딩을 꿈꾸는 모든 이들을 위한. 어찌 보면 인류 최대의 고민 중 하나인 그 사랑을 쟁취하고 유지하는데 있어서 자꾸 움직이는 마음을 통제 할 수 있다는 미립자의 연구에 함께하게 되는데, 어찌 보면 그는 연구자, 라기보다는 이 실험의 연구 대상으로서 코르모랑 교수를 찾으러 가게 된다.
“오늘 아침에 하신 말씀 기억나세요? 우리가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에게는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 말씀요! 어떤 사람을 계속해서 사랑하고 싶은데 그렇게 되지를 않는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고 있답니다.”
꾸뻬는 아연실색했다.
“사랑하기로 결심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해주는 약인가요? 아니면 자기가 원하는 동안 계속해서 사랑할 수 있게 해주는 약인가요?” –본문
변치 않는 사랑을 약속하는 이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변해가는 상대를 보며 가슴 아파 하곤 한다. 때로는 내가 사랑하는 이는 나에게 마음을 내어주지 않고, 또 내가 마음이 없는 사람이 나에게 다가오는 사랑의 어긋난 짝 대기 긋기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은 것일까.
“왜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누군가를 여전히 사랑하는가? 그리고 왜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누군가는 여전히 사랑하지 않은가?” -본문
그것만 알면 우리가 하고 있는 고민의 반 정도는 휘리릭 날아가 버릴 텐데 말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나를 아프게 하는 이를 마음에 담고 있는 것보다 훌훌 털고 일어나는 것이 훨씬 가뿐하고 내 스스로에게도 좋을 텐데 우리 몸의 꽤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놀라운 일을 벌이고 있다는 뇌는 여전히 이 문제에 대해서 나의 바람과 이상대로 움직여 줄 마음 없이 방관하고 있는 듯하다.
“그전에는 서로 사랑했는데 이젠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요?”-본문
내 마음이 변한 것이 아니라 호르몬 탓이야, 라고 그럴 듯한 변명을 주저리 주저리 읊는 다고 한 들, 한 때 사랑했던 이가 왜 이제는 타인보다도 못한 존재가 되는 것인지에 대해 명확히 알 길이 없다.
자의든 타의든 누군가를 사랑했다가 헤어짐을 당하는 쪽은, 아니 연인 사이에서 이별이라는 문제는 둘 다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될 수 있겠지만, 어찌되었건 헤어짐이라는 시리도록 아픔 속에서 발생하는 사랑하는 이의 부재로 발생하게 되는 고통을 겪어 본 이라면, 또 다시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하는 것이 두렵기만 하다. 이미 한 번 아파 본 경험이 있기에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지 않을 법도 하지만 그 동안 셀 수도 없는 이별이 있어왔음에도 인간의 역사가 계속 이어져 오는 것을 보면 이 고통의 순간을 망각하는 속도가 더 빠르거나, 아니면 그 고통을 덮어버릴 만큼 사랑이 거대한가 보다.
결핍은 또한 최고조의 고통에 도달, 그 강력한 힘으로 다가올 시간에 대한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오늘 밤까지 어떻게 견디지? 내일까지는 어떻게?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에는 어떻게 견디지? 등등. 결핍은 또한 다른 사람들과 유쾌한 시간을 가질 때조차 사회적 부재의 순간을 야기한다. –본문
한 때는 연인이었던 꾸뻬의 그녀는 이제 다른 사람과 함께 하고 있다. 물론 꾸뻬도 현재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하고 있다. 과거의 연인이었던 그들은 완전히 세상에 없는 듯 단절하고 지내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가끔은 연락을 하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영원히 오랫동안 행복했습니다, 의 결말이 아닌 서로 각자의 사랑을 찾는 것으로 마무리 되는 이야기를 보면서, 인위적인 조작이 아닌 자연스런 만남과 헤어짐은 바뀌지 않을 우리의 모습이구나, 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동화 속 결말에 목매는 것이 아닌, 지금 나의 곁에 있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그 결과가 어떻게 될는지 아무도 모르는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자 사랑에 임하는 자세일 테니. 과거나 미래의 슬픔일랑 던져두고 뜨겁게 지금의 사랑을 안고 있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