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년 전쯤 사서 모셔둔 동양 고전세트의 단 한 페이지도 넘기지 못하고 고스란히 책장에 보관 중에 있다. 할인해서 구매했던 터라 다행이다 싶다가도 차라리 통장에 그 돈을 보관했으면 마이너스 이자라도 붙었을 터인데 그저 책장에 보관만 하고 있다는 생각에 한숨부터 나오곤 한다. 그래서 일까? 10여 권이 넘는 동양 고전을 마주하기 이전에 왠지 모르게 풍겨져 오는 고전이라는 글자 아래 턱턱 막히기만 하는 실체를 앞에 두고 단 한 권으로 고전에 대한 두려움을 없앨 수 있다는 이 책은 고전을 다가가기 위한 나 자신과의 설득이자 싸움과 같은 마음으로 대하게 되었다. 이굴위신, 굽히지 않고는 펼 수 없다는 사자성어의 뜻도 모르고 그저 고전에 대한 열망으로 읽기 시작한 이 책은 쉬이 읽힌다, 라고 이야기할 순 없었지만 곳곳에 내가 들어봤던, 들어 봄직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어 구절구절 함께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긴 시간은 아니지만 사는 동안 고전이라는 딱 정형화된 틀이 아니라 옛날 이야기처럼 들어왔던 것이 고전의 일부였다는 사실도 새삼 깨닫게 되고 때론 별 거 아닌 문장인 듯 한데 여러 가지의 해석을 두고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는 이야기를 마주할 때면, 과히 고전이란 쉬이 곁을 내주지 않는구나, 라는 생각도 절로 들게 된다. 공자와 관련된다는 책에 늘 등장한다는 안회와 자로의 이야기. 사실 공자의 말씀이 이렇더라, 라고만 들어왔던 터라 안회와 자로의 이름 역시 내겐 낯설기만 했다. 한 스승에 두 제자라는 삼각구도 안에서 공자는 제자들의 성격과 특성에 맞게 공자는 맞춤식 교육을 하고 있었는데, 무조건 일방적인 동일한 가르침이 아니라 상황에 꼭 맞게 가르쳐 주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가르침이란 무릇 이런 것이구나,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교과서에 적힌 대로, 무조건 그게 답이다! 라는 주입식이 아닌 상황에 맞게, 각자의 틀에 맞게 하는 맞춤식 교육.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교육이 아닐까. 성격이 급하고 늘 의로움에 굶주려 있는 제자에게는 ‘부형’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듣고 행하라’고 가르치고 실행력이 떨어지는 제자에게는 ‘듣는 즉시 행하라’라고 가르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제자들의 부족함을 메꾸어줍니다. 인문학의 요람이었던 공자 학단의 힐링 캠프적 속성을 보는 듯 합니다. –본문 또한 틈틈이 책을 읽으면서 그 안에 틀을 조금씩 깨어 가고 있다고 나름 생각하고 있는 나에게 저자는 소소한 질문들을 던지면서 과연 당신은 우물을 벗어났는가? 에 대해 묻고 있다. 천일야화의 탄생 스토리만 해도 그렇다. 포악한 왕은 하루 밤을 함께할 여인을 찾아내고 그 다음날이 되면 가차없이 그녀들을 처단해 버린다. 그러던 그 왕 앞에 세헤라자드게 나타났고, 그녀는 왕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할 경우 이전의 여인들과 같이 자신의 생명이 아스라히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왕이 포악하다, 악랄하다, 라는 생각에 밖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다른 맥락에서 이 왕을 바라보고 있었으니,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왕이 세헤라자드에게 “하루라도 재미진 이야기를 거른다면 너를 죽이겠다”라고 말한 것은 “목숨을 걸고 나를 살려내라”는 요구입니다. 상대에게 자기가 가진 ‘절실함’을 공유할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만큼 분열된 자기에 대한 재통합을 왕은 강렬하게 원했던 것입니다. 세헤라자드는 그런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해석의 욕망’을 가진, 행복한 독자를 만난 ‘행복한 작가’였습니다. -본문 또 다른 맥락으로는 요새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내려놓음’에 대한 이야기를 만나 볼 수 있다. 욕망으로 가득 찬 자신의 내면의 것들은 내려 놓음으로써 마음이 편안해 질 수 있고 공수레공수거이니 만큼 굳이 작은 것들에 아등바등하며 살 필요 없다는 것이 요이다. 그래, 몇 권의 책을 읽어 오면서, 또 그 별 것 아닌 것들에 구태여 힘을 빼는 것보다는 이렇게 내려 놓는 것이 나를 위해서 좋다는 것을 알기는 하지만 이는 말처럼 쉬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책을 읽는 순간에는 머리로 이해하지만, 책을 놓고 나서부터 LTE 속도처럼 빠르게 그 가르침들을 잊고 다시 현실로 돌아가는 나를 발견할 수 있고 또 다시 내려놓기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내려놔야지, 내려놔야지를 다짐하게 된다. 내려놓기가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세간으로부터의 일탈’이 왜 필요하고, 왜 강조되는가를 생각해 보면 달리 생각해 볼 거리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닙니다. 굳이 그렇게 하려는 의도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자는 겁니다. 결국은 ‘잘 살자’, ‘편하게 살자’는 것일 겁니다. 그런 ‘내려놓기’에도 결국은 편하게 살고 싶다는 세간적 욕심이 그 바탕에 깔려 있는 것 아니냐는 겁니다. 공을 버리기는 싫은데, 그 편하게 살고 싶은 욕심 때문에 애써 버린다는 것이니 그 또한 뽐내고 싶은 마음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본문 같은 듯 하지만 다르고 쉬운 듯 하지만 쉽지 않은 고전의 이야기 속에서 그리고 그의 조언들과 글로써 나타난 지혜의 샘 속에서 여전히 허우적 거리고는 있다지만 그럼에도 읽으면서 찬찬히 하나씩 넘을 수 있는 산일 수 있겠다는 희망적인 메시지가 아른거린다. 올해도 그저 책장 속에 먼지만 흡수하고 있는 고전을 이번에야 말로 한 번 읽어볼 수 있겠다는 자그마한 용기를 심어주고 간 이 책을 기반으로 하여 원문을 읽어보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