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공포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에리카 종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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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s Review

 

 

  

 

 그 전까지 다양한 이름으로 이미 우리나라에 번역이 된 적이 있다고는 하나, 저작권사와 정식으로 협의되어 판권을 얻어 발간된 것은 이 비행공포가 처음이라고 한다. 1973년도에 발간되었다는 이 작품이 21세기에 이 작품을 읽는 나로서도 어쩜!’이라며 숨죽인 쉼 호흡의 연속이 이어지고 준비 운동을 하기도 전에 풍랑이 거친 바다에 수영을 하라며 떠미는 듯이 밀려드는 외설적인 단어들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지둥 하는 모습을 마주하면서, 지금도 이러할진대 당시에는 희대의 문제의 작품으로 비추어졌을 것이 자명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저자인 에리카 종의 말마따나 욕설을 담은 협박편지와 찬사를 가득 담은 편지들이 동시에 쏟아지는 나날을 보냈다는 그녀의 말은 굳이 상상해보지 않아도 이미 겪은 일들처럼 아스라히 그려지니 말이다.

 이 두터운 소설을 읽어 내려가면서, 소설이라곤 하지만 그녀의 자전적인 소설이라는 것에서 이 대담한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야!’ 라 이야기할 수 있는 그녀의 당당함을 보면서 나는 경외로움이 느껴졌다. 누군가 한 번쯤은 자신의 상상의 나래 속에서 그 누구보다도 음탕한 세계를 꿈꾼 적이 있었겠지만 자신은 아닌 듯 고고한 백조인 것처럼, 블랙 스완을 숨기고 사는 것이 우리네 미덕이며 도덕적 관념에 합당한 것이라 믿고 있는 우리에게 그녀는 금기 시 되어 왔던 모든 것들을 거침 없이 쏟아 내고 있었다. 마치 억지로 막고 감추어 두려 했던 것들이 한 순간에 봇물 터지듯   넘쳐 흐르는 지금, 이것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5년간의 결혼생활은 그런 욕망에 좀이 쑤시게 만들었다. 남자에 대해 좀이 쑤시고 고독에 대해 좀이 쑤시고 섹스에 대해 좀이 쑤시고 은둔한 삶에 대해 좀이 쑤신다. 나의 갈증이 서로 상충된다는 걸 알고 있고 그게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 나의 갈증이 미국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그것 역시 상황을 악화시킨다. 커플의 반쪽이 되는 것 외의 모든 삶의 방식은 미국에서 하나의 이단이다. –본문

 읽는 내내 나는 드라마와 영화로 대 성공을 거둔 섹스 앤더 시티속의 사만다가 떠올랐다. 이 드라마를 접하게 된 것은 20대 초반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섹스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 조차 금기 시 하던 터라, 이 드라마를 즐겨 본다는 이야기를 하는 나 역시도 때론 밝히는 여자라는 주홍글씨를 드러내는 것이라 치부를 받곤 했었다. 어찌되었건 그들이 섹스라는 단어에 치중하여 나를 바라본다 한들 나는 그 안에 담겨 있는 그녀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춰 보았기에 타인들의 잣대로 드리워진 나를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그 드라마에 더 빠져 보곤 했었다.

 여하튼 이 소설 속의 이사도라와 섹스 앤더 시티의 사만드는 데칼코마니와 같이 그 둘이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여자라면 응당 요구 되어지는 틀에 벗어난, 마치 남자들처럼 섹스를 즐기는 이들의 일탈을 보노라면 자유와 욕망 그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다니는 그들이 위태로워 보이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이 욕망하는 것을 숨기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드러낼 수 있는 용기에 감복스러운 느낌이 들기도 했다.

참으로 우울한 그림이다. 모든 결혼이 그렇지는 않다. 순진했던 사춘기 시절 꿈꾸었던 결혼을 생각해보자. 그때만 해도 비어트리스와 시드니 웨브, 버지니아 울프와 레너드 출프가 완벽한 결혼생활을 했다고 믿었다. 그때 내가 뭘 알았던가. 나는 완벽한 상호의존 관계동반자적 관계그리고 동등함을 원했다. 내가 식탁을 닦을 때 그가 신문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앉아 있을 줄 알았던가? 얼린 오렌지 주스를 섞어달라고 부탁하면 서툰 척 연기할 줄 알았던가? 자기 친구를 데려오면 내가 시중들어주길 기대하면서 내 친구를 데려오면 부루퉁해서 다른 방으로 들어갈 줄 알았던가? 버다드 쇼와 버지니아 울프와 웨브 부부의 작품을 읽는 이상주의자 사춘기 소녀가 무얼 알았겠는가? –본문

첫 번째 결혼에 실패한 이후 그 두 번째의 새로운 시작을 들어서기 위해서 이사도라는 정신분석에 의존하게 된다. 그녀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정당성, 아니 지극히 보편적인 평범하다는 것을 위해서 이 한 가닥의 희망을 끈을 잡은 것으로 보였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어머니는 이사도라에게 여자는 무릇 남자에게 값비싼 보석처럼 보여야 손해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오히려 그녀는 그러한 사회 통념 속에서 만들어 놓은 보편화된 가치들을 거부하려 한다. 왜 여성은 언제나 남자의 잣대 위에서 판단 되어 져야 하며 남자들에게는 심심치 않게 용인되는 외도를 여자에게는 금기 시 되는지 등에 대한 복잡한 고뇌들 속에서 자신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이란 막연한 믿음으로 첫 번째 결혼을 하게 되지만 이는 그녀에게 아픔만을 가져다 주는 실패로 끝나게 된다.

 첫 번째 결혼은 실패라는 고배를 마시고 나서 그의 두 번째 남편인 베넷과 함께 시작된 제 2의 인생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의 안락함과 열정적인 사랑을 가져다 주는 것처럼 보인다. 괜찮아 질 것이라 믿었던 비행기의 탑승 공포는 오히려 더 짙어 지듯이, 별 다른 문제가 없던 것처럼 보이는 그녀의 결혼 관계에 있어서도 또 다른 회의를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그녀는 남편과 함께 탑승한 비행이 내에서 지퍼 터지는 섹스에 대한 환상을 안게 되고 이러한 환상은 에이드리언을 마주하게 되면서 현실이 된다.

 그때 난 무얼 찾고 있었을까? 왜 그토록 불안했을까? 그들과 깊이 사귀지 못했던 건 아마도,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남자는 계속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고 결국엔 내가 실망하고 끝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남자는 과연 누구였을까? 한 가지 분명한 건 열여섯 살이 되던 그때부터 내가 그 남자를 필사적으로 찾고 있단 거였다. –본문

 이사도라를 보면 누군가는 미쳤다, 라고 이야기 할지도 모른다. 수치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그야말로 고삐 풀린 망아지와 같은 모습을 한 그녀는 결혼한 여자로서의 정숙함이라는 통념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향해 힐난을 퍼붓지는 않겠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이 장면들은 단지 그 주체가 남성과 여성이 바뀌어 있다는 것만으로 불쾌감이 밀려드는 것은, 그만큼 우리에게 이러한 사건들이 익숙지 않다는 반증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불륜이나 외도에 대해서 찬성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이사도라의 일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우리가 꿈꾸는 100% 나만을 위한 왕자님은 세상 그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드라마를 관람하는 시청자의 입장과 같이 전지적 시점이 아니고서야 그 누가 내 모든 것을 알고 나만을 위해 존재해 줄 수 있겠는가. 다만 이사도라는 이 속에서 만큼은 남자라는, 남편이라는 존재를 제외하고 오롯이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그러할 때마다 그녀는 글을 쓰며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내가 그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나의 삶은 그런 식으로 내던져지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나만의 삶이라는 게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남들이 아무리 괴롭혀도 선뜻 그들을 떠나지 못했다. 늘 내 마음속의 무언가가 그들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우겼다. 내가 겁쟁이라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의지의 마비상태라고나 할까. 나는 행독하는 대신 앉아서 내 분노를 글로 썼다. 베넷을 꺼난 건 내게 최초의 독립적인 결단이었지만 그 결단에도 부분적으로는 에이드리언과 그를 향한 나의 성적 집착이 작용했다. –본문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던져지는 단어들에 빠져서 보면 이 책은 그야말로 음란한 책에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불경스럽고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미친 이야기들일 뿐이다. 하지만 조금만 관점을 돌려서 그 이외의 것들을 바라보자면 이 속에서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섹스 앤더 시티의 섹스에만 초점을 마주치 않고 보다 보면 그들의 고민과 또 그 나름대로의 삶의 애환을 알 수 있듯이 비행공포를 통해서 이사도라처럼 살아라, 가 아닌 이사도라를 통해 우리의 삶이 어떻게 조명되고 있는지, 우리는 우리 스스로 가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조망이 필요하리라 본다.

 

  

아르's 추천목록

  

섹스앤더시티 / 캔디스 부시넬저

 

 

 

독서 기간 : 2013.11.06~09

 

 

by 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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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여행하다 - 공간을 통해 삶을 읽는 사람 여행 책
전연재 지음 / 리더스북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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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라는 공간이 가족들에게는 생활의 터전이자 쉼터이면서도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기에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가족을 위한 공간이 아닐까, 싶다. 그리하여 누구에게나 없어서는 안될 이 공간은 인간의 삶을 위한 기반이 되는 요소라는 개념을 뛰어넘어이란 그 공간 자체만으로도 나를 대변 할 수 있는 하나의 상징과 같은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 본다.

언젠가 서재를 보면 그 사람의 성향을 알 수 있다는 말을 듣고서는 그저 서재를 갖는다는 욕심이 아닌 그 안에 어떠한 책들이 자리하고 있어야 할까, 라며 요즘 고민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서재는 물론이고 욕실에서부터 침실까지 가장 개인적인 공간을 모두 아우르고 있는 집이야 말로의 또 다른 자아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일까, 집의 위생상태는 둘째치고 누군가를 집으로 초대한 다는 것은 왠지 모르게 나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듯한 느낌이라서 그런지 부끄러워지기도 하고 망설여지기도 한다.

아마도 그렇기에 우리는 누군가의 친분이 있는가에 대해서 그 사람의 집에 가 보았느냐, 란 것으로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가만 생각해 보니 나는 그 누군가를 우리 집에 초대해 본적도 그렇다고 지인의 집에 방문해 본 적도 그리 많지 않은 듯 하다. 어른이 되어 갈 수록 그 장벽은 점점 두터워져 주로 밖에서 만나는 일들이 잦아질 뿐, 집들이가 아니고서는 지인의 집에 가볼 기회조차 점점 사라지고 있는 요즘 세태를 비추어보면 저자의 이 여행은 너무도 부러우면서도 어쩜 이런 아름다운 여행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부러움이 점점 커진다.

경험과 지식의 다름에서 오는 시각의 차이는 보다 다양한 해석과 상상을 가능하게 했고, 이런 다양성은 삶을 보다 풍성하게 만드는 근원이 되었다. 그것이 우리가 다른 누군가를 끊임없이 만나고 싶어하는 이유이고, 시간과 돈을 들여 기어이 길을 떠나는 이유일 것이다. 반짝이는 눈빛을 잃지 않기 위해, 더 많이 이해하기 위해, 그래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그 어떤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해, 그리고 마침내는 서로를 껴안기 위해본문

새로운 이를 만나는 것에 대한 설렘. 그것은 비단 배경에서만 주는 설렘은 아니지 않을까. 하나의 공간 안에서 만나게 되는 새로운 이들과의 조우. 그것이야 말로 이 모든 설렘의 근원일 것이다.

저자는 가는 곳마다 참 따스한 사람들을 만나는 인복의 행운도 함께하는 듯 했는데 이런 이들과의 만남이 계속 될 수만 있다면 나 역시도 지금 당장 떠나보고 싶으련만, 아마도 그 역시 이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는 떨림 반 걱정 반으로 시작했을 테다. 모든 여행의 시작이 그러하듯 말이다.

때로 우리가 스스로보다 더 아름다워지는 순간은 타인의 눈을 통해서이다. 보잘것없는 우리에게서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아름다움을 발견해내고, 그것을 아끼고 사랑해준다. 그 순간 우리의 남루하고 연약한 삶은 천상의 아름다움으로 도약하곤 하는 것이다. -본문

그들에게는 일상일 하루 속에서 저자와 함께하며 만들어가는 그 소소한 즐거움들. 함께 음식을 나누고 그들의 추억을 나누고 한 공간 안에서 함께 하는 동안 그들은 서서히 닮아가는 듯 했다. 집은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말처럼, 이 속에 등장하는 그들만의 집은 그 어디 하나 동일한 것이 없다. 모두 그들의 손길이 닿았으며 이제는 저자와 함께한 흔적마저 안고 있는 그들과 저자의 과거가 담긴 또 하나의 특별한 집으로 재 탄생하게 된다.

사람들의 다른 취향과 생활 방식을 살아보는 것이 이번 여행의 방식이다. 나는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의 채에 거르지 않고 그 다름을 그저 살아보았다. 그러다 보면 한두 가지쯤은 내 삶에 적용하고 싶은 것을 만나게 마련이었다. 그렇게 나는 삶의 지혜들을, 색채들을, 맛을 내 안에 담아나갔다. -본문

가는 곳곳마다 그들의 일상에 자연스레 젖어 들며 그들의 삶에 녹아 드는 것이 그의 여행 법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를 마주하는 모든 이들은 저자와 함께 하면서 내가 주인이고 그는 손님이라는 선을 긋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함께 해왔던 이들처럼, 참 편안한 느낌이었다.

지인도 아닌 낯선 이에게 이토록 자신의 개인적인 공간인 집, 이란 공간을 공유 할 수 있다는 것. 참 나로서는 이 책을 읽으면서도 쉬이 해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일이다. 하지만 희한하리만치 그가 가는 곳마다 마주하는 이들은 쉬이 자신의 문을 열어주고 자신의 공간 안에 그를 맞이했다.

책을 읽으면서 그가 가는 공간에 대한 동경보다도 그를 맞이할 수 있는 사람들의 넉넉함에 더 눈길이 가게 된다. 낯선 이에 대한 열린 마음. 요새는 길을 가더라도 타인과의 눈길을 마주치는 것 조차 꺼려하는, 그야말로 타인과 나와의 뚜렷한 경계를 지는 것이 일반적이 것만, 이 책 속에 그가 만난 이들은 그 누구 하나 그런 껄끄러움을 마주할 수 조차 없다. 더 주지 못해 아쉬워 하고 더 함께 할 수 없어 안타까워하는 것을 보면서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이들의 마음처럼 그들의 집도 따뜻하기에 누구에게라도 열려 있는 것이 아닐까, 란 생각을 해본다.

이렇게 타인의 집에 머무는 여행을 하며 나는 나 자신을 상대의 호흡에 맞추는 법을 배운다. 자고 깨는 시간을 맞추고, 같은 먹거리를 먹으며 그 사람의 방식을 고스란히 산다. 모두가 달랐지만, 배울 수 없는 것은 없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나는 앞으로 살아갈 내 삶에 대한 단서를 얻었다. -본문

누군가의 집에 가보고 싶다, 라는 생각에서 누군가 나의 공간을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따뜻한 이들을 통해서 내 공간까지 훈훈하게 해주는 이들처럼 나 역시도 누군가와 이 훈훈함을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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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우리 식사 한번 하지요』 / 유지나저

 

 

독서 기간 : 2013.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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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의 말 - 사회를 깨우고 사람을 응원하는
루쉰 지음, 허유영 옮김 / 예담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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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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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이 책을 읽었다면 그저 딱딱한, 재미없는 책으로만 생각하고 덮어버렸을지 모르겠다. 단 세 권의 책을 남겼다는 루쉰이, 한때는 의학을 배우기 위해서 일본으로 건너갔다던 그가, 수업 시간의 몇 장의 사진을 보고서는 중국인들의 몸을 고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신 혁명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중국인들의 몽매함을 일깨우고 사회를 변혁시키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다. 메스가 아닌 펜으로 중국인의 열등한 근성을 해부하고 치료하기 위해 신랄한 글을 쓴 것이다. 그에게 글쓰기란 옛 것에 안주하는 중국인들의 향한 공격이자 일깨운 것이었다. 한치의 위로나 연민 따위는 없었다. -본문

 

자국민이 죽어가는 그 순간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보고만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의학 대신 문학으로의 전향을 선택했다는 그의 이야기를 보면서 과연 나는 동일한 순간에도 이러한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란 생각이 든다.

현재 중국의 민심에는

불평과 분노, 원한이 너무 많다.

불평은 변화의 도화선이 되지만

반드시 먼저 자신을 변화시킨 후에

사회를 바꾸고

세상을 개조해야 한다.

단지 불평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분노와 원한은

거의 아무런 쓸모가 없다. -본문

 

모든 것을 다 가진 한 남자가 자신의 탄탄대로였던 미래를 놓아두고 그는 자신의 길을 두고서 철저히 다른 길로의 우회를 택한다. 휘청거리며 흔들리고 있는 대중들을 보면서 그보다 더 파란만장한 역사의 현장에 있는 자국을 위해 촌철살인과 같은 말을 던지고 있는 그는, 그의 깊은 통찰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에 경건한 마음마저 들곤 한다.

 

'성공한 제왕'

사람을 죽일 때도 비밀스럽지 않다.

그들에게 유일하게 비밀스러운 일은 자기 처첩들과 시시덕거리는 것뿐이다.

그러다가 실패가 임박하면

비밀이 늘어나서

그들의 재산 목록과 그것들을 보관해 놓은

장소가 비밀이 되고

그다음에는

세 번째 비밀이 생긴다

바로

비밀스럽게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본문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뜨끔하게 하는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저 몇 마디의 문장일 뿐인데도 불구하고 하나의 문장이 아닌 뾰족한 창 모양을 한 글인 듯 하다. 읽는 순간마다 혹시나 내가 지금 그러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를 되돌아보게 하고 지금의 내 모습을 재정비하게 만드는 그는 그가 남긴 글 하나하나에 그가 전향했던 삶의 목표를 오롯이 담아내고 있는 듯 하다.

이 단문의 이야기들 만으로도 타인을 움직이게 할 수 있다면 그의 장문들을 마주하면 또 다른 세상으로의 통로를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이번 기회를 통해 그의 작품들을 찾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짧은 단문으로 그와의 만남을 끝나기에는 문장 속의 이야기들의 여운이 너무 길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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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히트는 이렇게 말했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저

 

 

 

독서 기간 : 2013.11.01~11.03

 

 

by 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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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품은 맛있다
강지영 지음 / 네오북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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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달달할 것만 같은, 매혹적인 표지와 제목에 반하여 이 책에 접근한다면 엄청난 오산이 될 것이다. 타임슬립이라는 소재로 시점이 바뀌게 되는 이 소설은 그 무엇 하나 빠질 것 없이 모두 가진 '단아름다운'과 하루하루의 삶이 버겁기만 한 '박이경'과의 시공간을 넘나들고 있다.

 

5개월의 시간차를 두고서 미래과 과거를 오가는 사이 그녀들은 타인의 삶을 관조하는 자세에서 이제는 점차 타인의 삶을 쥐락펴락하며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하는, 읽어 내려갈 수록 끔찍한 인간의 본상을 마주하게 된다.

 

어떤 의미에선 이 또한 돌연한 기적일 터였다. 만약 그녀에게 선택의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어떨까. 그래도 명 짦은 미녀를 택할까, 아니면 이류 대학 졸업반에 특수청소나 다니는 추녀의 삶을 택할 수도 있을까. 천국의 이십 년이냐, 지옥의 팔십 년이냐. 고민할 가치도 없는 질문임을 깨닫자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본문

 

누구나 한 번쯤 이런 상상을 해보지 않을까.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가진 타인의 삶으로 하루만 살아보는 것. 차마 꿈꿀 수도 없을 것만 같은 그들이 일상으로 들어가 보는 것. 예를 들어 전지현이나 김태희나, 그녀들의 삶으로 하루만 살아보면 좋겠다, 라는 허무맹랑하지만 한 번쯤 꿈꾸는 그것.

이 모든 것이 단 한 순간의 꿈으로 이뤄질 수 있다면 과연 당신에게 그러한 기회에 주어진다면 당신은 그녀들로 살고 싶은가, 아니면 그럼에도 현재의 나로 살고 싶은가? 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소설의 주제이자 정점에 치닫게 하는 요소이다.

한 여자는 눈을 뜨면 오늘은 무엇을 입고 어디로 머리를 하러 갈까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아니, 이 모든 것은 그녀의 엄마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으로 그녀는 그저 마리오네트처럼 움직이고 있다.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단아름다운'은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 정도로 완벽한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시간이 점차 지날 수록 들어나는 몸에 어버린 학대의 잔인한 고통은 그녀를 또 다른 괴물로 만들고 있었다.

그녀와는 전혀 겹칠만한 교집합 따위는 없을 것만 같은 또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박이경은 하루하루를 겨우 살고 있는, 살해 현장을 청소하며 부모님의 뒷바라지를 하는, 허황된 로또의 꿈으로 아스라히 사라져버린 가정을 살리기 위해 꿋꿋이 살고 있다.

 

그보다 가난을 경멸하는 그녀의 갈퀴 같은 말에 가슴이 쓰렸다. 과연 가난이 노력만으로 극복 가능한 것인가 묻고 싶었다. 매달 돌려 막기로 당신 통신의 이자를 보태 주는 수많은 채무자들에게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지 따지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엄마의 뺨을 갈겨주고 싶었다. 마음에 날이 바짝 서자, 문득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껏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었다.

",천박해!" -본문

 

단명할 운명이라던 박이경과 가을이의 생명의 교환 의식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한 질투에 의해 고약하게 꼬여버린 가을이와 단아름다운과의 치정때무이었을까. 한 번 꼬여버린 이 실타래를 더 이상 풀어버릴 수도 없게 엉켜버렸으며 이 실타래를 놓고서 또 이해관계의 집단들이 만들어가는 후반 이야기는, 인간들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악마들의 레이스를 보는 듯 하다.

 

온갖 비리와 편법으로 알랄하게 돈을 그러모은 남사장, 나와 다운을 건조실에 가두고 죽음을 방조한 왕태봉, 죄책감 없이 손녀의 시신을 팔아 치우고, 살인을 부추긴 늙은 염낭거미 노파, 문득 장례식장에서 만난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만약 이 자리에 부모님이 옆에 있었다면 옳은 것보다 살아남는 방법을 택하려고 응원했을 것이다. -본문

 

초반의 서로의 삶에 대해 꿈을 통해서 오가며 공유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너무나 신선하고 재미있는 현상이라며 마음을 사로잡았다면 후반에 가서는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이 부모와 자식간의 천륜마저 저 버릴 정도로 잔혹한 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목도하는 순간, 신물이 올라오는 느낌이다.

마지막까지도 살아남은 자는 누구이며 과연 누구의 모습으로 살게 될 지에 대한 수수께끼를 던져주는 이 소설 앞에서, 이럼에도 당신은 다른 사람의 모습을 탐할 것인가? 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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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의 탄생 / 이재익저

 

 

 

 

 

독서 기간 : 2013.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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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집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71
최상희 지음 / 비룡소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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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을 보면서 왜 '칸트의 집'일까, 라는 물음표를 안고 책을 펼쳐 보았다. 그 어디에도 그다지 철학적인 모습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따스하기도 하고 소소한 일상이 펼쳐진 이 이야기 속에서 대체 왜 칸트, 라는 인물을 끌어 들인 걸까? 라는 의문은 금새 풀리게 된다.

 

매일 똑같은 시간에 산책을 즐겼다는 칸트는 규칙적인 생활 패턴 때문에 그의 산책 시간을 기준으로 시간을 맞췄다고 한다.

 

이전의 나는 꿈을 꾸지 않고 형은 환상을 품지 않는 아이였다. 칸트는 우리에게 꿈과 환상을 가르쳐 주었다. 이것은 내가 만난 두 명의 칸트에 관한 이야기다. -본문

 

칸트와 같이 매일 동일한 시간에 마을을 산책하는 소장님과 자폐증을 앓고 있는 형, 그 형이 만들어 놓은 울타리 안에서 형을 지켜야만 하는 나, 이렇게 세 사람이 있는 각각의 자신들의 만들어 놓은 집안에 갇혀 있는 생활을 하듯, 소통의 단절을 안고서 그들만의 삶을 안고 있었다면 이 시간이 흐를 수록 이들은 서로의 집을 타인들을 향해 열어두고 있었다.

 

왜 이해는 늘 형에게만 돌아가야 하는 것인가. 칸트의 말은 틀렸다. 세상에 가득 찬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불공평이다. 난 늘 형 때문에 부당한 대우를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냉정하게 따져 보니 부당한 대우라면 형이 훨씬 많이 받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고 해서 기분이 나아지는 건 아니었지만. -본문

 

세상과 소통하는 법이 조금 다른 형을 두고 있는 나는, 일반적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형과 동생의 모습이 아닌, 동생이지만 언제나 형에게 양보 해야 하고 형을 돌봐야 하는 그 모습에 지쳐 짜증을 내기도 한다. 형이 아닌 '걔는' 이라고 지칭하면서 자신이 처해있는 현재에 대해 투정을 부리고는 있지만 새로 전학간 교실에서 혹시나 형에게 누군가가 또 상처를 주지 않을까, 하면서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그간 이 두 형제를 바라보는 세상의 녹록치 않던 눈길과 행동이 이들에게 얼마나 상처를 줬던 것일까, 라는 반증이 더해져 안타깝기만 했다. 틀림이 아닌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웃는 얼굴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병신, 이라는 말을 내뱉는 어른들이야 말로 그들만의 불행한 집을 짓고 사는 이들이 아닐까. 왜 상처는 이 아이들이 받아야 하는 것인가, 라는 한탄과 함께 계속 책장을 넘겨 본다.

 

가끔 궁금해지곤 했어요. 형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중략) 형이 만든 세상 외에, 그 바깥쪽은 형에게 아무 의미도 없어요. 형이 내가 누군지나 알까요? 내가 동생이고, 동생이란 게 어떤 관계이고, 어떤 의미인지 알까요? 내가 죽는다고 해도 형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거예요. 조금도 슬퍼하지 않을 거예요 그게..... 슬퍼요.." -본문

 

칸트는 열무와 나무 형제에게 자신들이 원하는 집을 생각해 볼 것을 권한다. 언제나 보이는 것만을 스케치북에 그리던 나무에게는 자신이 갖고 싶은, 살고 싶은 집을 그리는 것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개똥철학이라고 믿는 나무는 무덤과도 같은 집에 살고 있는 칸트의 말을 받아들 일 수가 없다.

 

이토록 뭔가 쉽지 않은 그들간의 조우는 시간의 힘 덕분일까, 아니면 그들 모두가 각자 자신만을 위한 집 에서 틀어박혀 세상과의 소통을 잊고 있었다는 공통점 때문일까. 칸트, 나무와 열무 형제는 점차 그 간극이 줄어들게 되면서 그들만의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자식을 먼저 보내고 홀로 이곳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칸트 앞에 나타난 이 두 형제는 처음에는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었을지도 모른다. 습관처럼 방문 하게 된 이들의 관계는 그저 머물러만 가는 손님이 아닌 이제 공간을 함께 나누게 되는 이들이 되어간다.

오롯이 혼자만이 있던 공간에 타인을 들이면서 그 안에서 자신의 것을 공유하면서 이뤄지는 소통의 장. 그것이야 말로 칸트가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였으며 아이들이 칸트와 함께 하고 싶은 것이었으리라.

 

그렇기에 칸트는 마지막 순간, 모두를 위한 공간은 물론, 열무와 나무와 함께할 수 있는 그들만의 아담한 공간을 남겨둔 것일 게다.

 

아마도 형은 어떤 것이 끝나지 않고 영원히 계속 된다는 말을 마음에 들어 했던 것 같다. 어떤 것이 끝난 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라는 것을 형이 알고 있었던 걸까? 형이 그 무언가가 계속되느 ㄴ것을 바라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그건 나도 그랬다. -본문

 

자폐, 서번트 증후군 등의 단어를 단 한번도 등장시키지 않았다는 저자의 의도를 들으면서 그 작은 배려가 이 이야기들이 더 따뜻하게 다가오는 듯 했다. 우리 개개인들 역시 소통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모두다 웃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진정한 자신에 대해서는 드러내지 않는 것이 더 익숙할 테지만 오히려 그것이 정상인 냥 행동하는 것이 더욱 병폐가 아닐까.

 

남들과 조금 소통이 어렵고 자신의 생각에 깊이 빠져있는 이들에게 자폐 혹은 서번트 증후군이란 이름을 명명하며 그들에게 병명을 내리기 보다는 우리 스스로는 과연 정상이라는 그 범주 안에 있는 것일까, 라는 것과 좀 더 타인과의 소통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라는 반성을 해 보게 된다.

아르's 추천목록

 

『더 리버』 / 마이클 닐저

 

독서 기간 : 2013.10.31~11.01

 

by 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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