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라는 타이틀보다 더 많은 수식어를 안고 있는 이가 이외수 작가가 아닐까 싶다. 160만명의 팔로워를 거느린 트위터 대통령에서부터 연일 기사며 검색어에 오르는 그를 보면서 그저 기인과 같은 모습에 처음에는 호기심이 일었다면, 대체 무엇 때문에 이토록 사람들의 이야기 주제로 그가 등장하는 것인가 하는 물음이 들기도 한다.
트위터를 잠깐 하던 시절에는 나 역시도 그의 팔로워였기에, 그가 남기는 통쾌한 이야기들을 보면서 내가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직접 해주는 그 짧은 멘션들을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곤 했다. 그 이후 ‘하악하악’이나 ‘내가 너를 향해 흔들리는 순간’을 잠깐 들춰보기는 했는데 그것마저도 단편적인 접근으로 나는 이외수 작가에 대해 안다고 말할 수 없는 정도였는데, 그렇게 그저 그를 알고만 있는 사이, 그는 어느 새 모두의 멘토이면서도 또 모두의 강적이 되고 있었다.
뜨거운 감자로 급부상하고 있는 이외수 선생에 대해서 그의 언행이 옳고 그르다, 라는 것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하는 노력은 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대중의 사랑을, 그것이 오롯한 사랑인지 왜곡된 사랑인지는 몰라도, 어찌되었건 수 많은 이들의 입게 오르내리는 이라면 무엇이 이토록 그를 도마 위에 계속 오르게 하는지에 대해 알고 싶은 욕망이 일던 찰나, 이 책은 그러한 관심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종식시켜 주는 책이 되어 주었다.
‘마음에서 마음으로’라는 책은 이외수작가와 하창수작가의 대담을 엮은 것으로 이외수선생의 생각이 오롯이 담겨 있는 책이었다. 한 문장 안에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녹아 있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있어 그의 문학을 접하기 이전 일단 인간 이외수가 누구인지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는데 그는 이 책을 이성보다는 감성으로 읽기를 권하고 있었다.
작가가 창조자로서 세상을 만들어낸다는 생각은 일종의 오만이다. 세상이, 세상의 만물이 작가를 만드는 것이라고 하는 게 더 올바르다. –본문
한 줄의 문장은 생성해놓기 위해서 그는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그 안에 진심을 읽고 담으려 하고 있었다. 베스트셀러 작가이기에 내가 쓰는 것이 곧 모두에게 소통될 수 있는 글이라며 자만을 안고 있을 법도 한대 그는 여전히 매 순간 견습생과 같은 마음을 안고 자신의 마음을 읽고 독자들이 원하는 것과의 합치를 내어 놓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서양의 예술사를 보면 늘 기존의 예술을 거부하거나 파괴하는 운동들이 일어났고 그것을 곧 창조로 보았다. 문화나 예술, 철학이 일정부분 동일한 진행방식을 갖는 게 서양의 특징이다.
나는 동양적인 것을 고집하고 싶다. 반동이나 파괴가 아니라 조화를 통해 창조에 이르는 방식이었으면 한다. 나는 온고이지신이 헤겔의 정반합보다 훨씬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옛것 속에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이 많은데, 그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것이 진정한 예술의 발전이라고 생각한다. –본문
그는 무엇보다도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 주장하고 있었는데 인간이 만물을 사랑할 수 있는 가슴을 가진, 이성을 넘는 감성을 가진 존재이기에 세상 모든 것들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으며 이것이 곧 인간의 본성임을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그들 스스로 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의식에 젖어 발전을 한다는 미명하에 얼마나 많은 파괴를 불러일으켰는지, 특히나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틀림’으로 보기에 전쟁마저도 불사하지 않았는가에 대해 생각해보며 가만 고개를 숙이게 된다.
인간들의 지혜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수 십 억 권의 책을 소유하고는 있으나 나뭇잎 한 장에 관한 신비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를, 그는 “급조된 영장”으로 분류하며 진정한 만물의 영장이 되기 위해서는 사랑으로 가득 차있는 인간을 주문하고 있다.
만물이 아름답다는 것은 사랑의 눈으로 보았을 때만 가능하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변화와 작용의 근원이 되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을 동력으로 사랑이 지속적으로 복제된다. 이것이 우주가 존재하는 비밀이다. 사랑이 사라지면 인류도, 지구도, 우주도 사라진다. 가령 핵전쟁으로 인류가 절멸한다면, 인류를 절멸시킨 방법은 핵전쟁이지만 그 근본적인 원인은 사랑의 부재다. –본문
대담을 읽어 내려가며 이 대화 속에 합류하게 될수록, 어느 방향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즉 나를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언제나 편협한 부분이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4가지 파트로 구성되어 있는 부분 중 수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킬 것이라 염려되는 ‘우주’파트에 있어서도 내가 아직 모르는 세계에 대해서 다른 누군가가 경험한 것들에 대해서 혹은 그 생각에 대해서 나열하는 것을 기를 쓰고 틀렸다, 아니다, 라며 억류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다. 아직 내가 본 세상의 크기로는 그가 본 것들을 모두 담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이러한 세상도 있구나, 하면서 또 다른 세상의 존재를 인정하는 자세. 그것이 이 책을 통해서, 이외수선생을 만나며 배운 것이다.
진리를 탐구할 때는 관측자의 위치가 굉장히 중요하다. 흔한 예로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는 걸 영원불변의 진리처럼 얘기하지만, 관측자의 위치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 가령 북극에서 보면, 사방이 다 남쪽이기 때문에 해는 남쪽에서 떠서 남쪽으로 진다고 해야 옳다. 이것이 우리의 맹점이다. 모든 현상의 주체는 관측자이고, 신비적 현상의 주체 역시 관측자다. –본문
도마 위의 생선이 놓여 있다. 이 생선을 어떻게 요리할지에 관한 결정은 생선이 하는 것이 아니라 도마 위 칼을 쥔 나의 몫이다.
뜨거운 감자로 오른 이외수 선생에 대해서, 어떠한 이야기들이 오고 가고 있든 일단 그에 대해, 그의 생각에 대해 한 번쯤 마주하고 그 칼을 휘둘러도 충분치 않을까? 개인적으로 참 즐겁게, 그리고 많은 배움을 얻어간 이 책을 통해 나는 아주 맛있는 요리를 대접받은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