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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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맹이 없는 이야기 하나. 세상에 빛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애초부터 빛이란 것이 없었다면 그것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어떤 색깔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촉감을 주는지 상상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맞춰서 특이한 문명과 문화, 역사가 이룩되었을 것이다. 알맹이 없는 이야기 둘. 세상은 다양한 물질들과 그 물질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은 무수한 조합들 가운데 상당히 특이한 경우에 속하는 것 같다. 스스로 생각을 하고 의심을 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심지어는 스스로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줄도 아는 매우 독특한 생명체. 아, 이 생명이란 것도 어떤 것은 있는 것으로, 어떤 것은 무생물로 분류된다. 문득 이런 알맹이 없는 생각들 때문에 난 상당히 신비한 기운에 휩싸이곤 한다. 그리고 길을 잃은 아이처럼 한동안 멍하니 삶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정말 어떤 심오한 목적에 의해 세상이 운영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모든 것이 우연의 연속에 불과한 것인지 등에 대한 생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앤드루 포터의 소설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는 친구의 죽음으로 자기 잘못이 아닌데도 평생을 악몽과 같은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사람의 독백을, 천재적인 영화감독으로서 주목받았지만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해하려 하는 한 아들의 목소리를, 교수 자신도 1년이 걸려서야 해결한 방정식을 시험문제로 내면서 끝까지 남아 시험지를 제출한 한 여학생과 겪게 되는 복잡한 물리학 이론만큼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사랑의 문제를 다룬 이야기, 보통의 마을 소년과 아미쉬 마을 소녀의 만남을 통해 기존의 문명을 거부하고 살아가는 아미쉬 사람들에 대한 새로운 일면을 보여주는 이야기 등이 담겨 있는데,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쉽게 접하지 못하지만 반드시 인식하고 있고 문제 삼을 소지가 다분한 소재들을 바탕으로 쓰인 이야기 하나하나에서, 있는 그대로 드러낸 상처가 시간이 지나면서 천천히 아물어가는 모습을 보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평생을 사랑할 것만 같았던 두 사람이 왜 헤어져야만 하는 것인지, 그 사람은 왜 죽어야만 했는지, 그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이 왜 이렇게 실감이 나지 않는지, 어색하게 웃음으로 무마하려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에 무릎이 풀려버리는 것은 어째서인지, 왜 사람과 세상에 대해 희망을 가질 수 없는 것인지, 어떤 상황이나 사람을 그토록 두려워하거나 피하려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왜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어떻게’라는 방식으로 밖에 대응할 수 없는 것인지... 이 책은 살면서 가볍게든 심각하게든 어찌해서든지 들게 되는 무궁무진한 의문들에 대한 답을 직접적인 방식이 아닌 작가만의 담담한 목소리로 몇 가지 상황에 대해 거울로 반사하듯 우리에게 보여줌으로서 역으로 우리에게 스스로 답을 찾으라고 다시 질문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이에 대해 고민하거나 그냥 스쳐지나가는 등의 반응을 보일 것이고 이러한 일련의 현상들은 우주 전체를 포괄하는 어떤 덩어리의 부피를 키우거나 줄이는 자양분이 될 것이란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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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람다 2011-05-24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성스런 서평 잘 읽었습니다.
 
미스 헴펠 연대기
세라 S. 바이넘 지음, 박찬원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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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을 읽으면서 예전에 느낌표 선정도서이기도 했던 ‘내 생애의 아이들’이라는 작품과 집 안에서 옛날 책들을 뒤지다가 우연히 책꽂이에서 발견해 편안한 마음으로 읽었던 ‘따뜻한 학교’라는 작품이 떠올랐다. 두 편 다 선생님과 학생들 간의 사랑과 우정, 성장과정을 그린 교육소설에 해당하는 작품들이었는데 캐나다의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18세의 어린 여선생님이 등장한다는 점과 경북 상주의 한 중학교를 배경으로 갓 사범학교를 졸업한 여선생님이 등장한다는 점 등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다. 이런 작품들은 급격한 감정의 변화는 없지만 잔잔한 감동과 교훈을 준다는 점에서 자극적인 독서에 지친 사람들에게 휴식과도 같은 책읽기의 경험을 제공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이런 소설들은 내게는 독서의 즐거움은 주지만 경험적인 측면에서 동조하기는 쉽지 않았다. 나는 일반적인 중고등학교의 과정을 거쳐 온 것도 아니었고 실제로 내가 보고 느꼈던 학창시절의 모습이란 드라마나 영화, 소설에서 다뤄지는 것처럼 낭만적이거나 달콤하다거나 미래지향적인 것들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교육소설들 속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현실에서도 가능하단 말인가? 이야기니까 아름답게 표현된 거겠지, 식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미스 헴펠 연대기’의 장점은 앞서 내가 언급한 일반적인 성장소설 혹은 교육소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훨씬 솔직하고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슬쩍 넘어갈 수도 있는 내용도 있는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색다른 재미를 주고 있다. 예를 들어 민감한 시기에 가장 왕성한 호기심을 보이는 성 문제에 대해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라든지, 교사 본인도 앞으로의 진로나 연애 문제 등에서 아직 많이 혼란스러워하고 여전히 성숙해가는 과정에 있는 내면의 모습을 담담히 묘사하고 있는 부분, 등장하는 학생들의 캐릭터도 적당한 성격의 친구들뿐만 아니라 개성이 강한 친구들에 대한 에피소드도 많이 할애하고 있다는 점 등을 통해 잔잔한 가운데서도 보다 현실적으로 교육현장의 모습을 그려낸 것 같다. ‘미스 헴펠 연대기’는 성장 및 교육소설의 분야에서 기존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는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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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아트리스와 버질
얀 마텔 지음, 강주헌 옮김 / 작가정신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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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고통스러운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는 방법으로는 최대한 있는 그대로 유무형의 기록을 수집하고 보존하면서 후세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슬픈 흔적들을 예술의 영역에서 다룬다는 것이 합당한 일일까? 사실 전쟁을 비롯한 갖가지 흉악한 범죄의 내용들이 최근 엔터테인먼트를 위한 재료로 각광을 받게 되면서 이제는 인간의 온갖 추악함과 잔인함, 피범벅이 나오지 않고서는 사회적 이슈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무섭게 느껴질 때가 많다. 그런 것들을 보며 스릴을 즐기고 쾌감을 느끼면서도 뭔가 이건 잘못된 것 아닌가 하는 찜찜함을 지울 수가 없다.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일 수도 있다. 삶과 죽음, 선과 악, 성, 정의와 불의, 죄 등의 문제는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우주의 법칙일지도 모르니까. 착한 사람의 불행한 죽음, 악인의 풍요롭고 윤택한 일생 등을 보면 우리는 그 모든 기가 막힌 상황들을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적당한 자세인 것은 아닐까?

   홀로코스트, 즉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인류에게 가장 부끄럽고 치욕적인 사실을 전혀 다른 시선으로 다룬 얀 마텔의 신작소설 ‘베아트리스와 버질’은 역사적 사실의 언급은 거의 드러내지 않은 채 죄를 지은 자가 또 다른 정의를 추구하면서 구원을 얻으려는 인간의 이중성을 맞닥뜨린 한 작가의 이야기다. 주인공인 소설가 헨리는 역사가 예술로 표현되지 않는다면 인류의 기억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에 홀로코스트를 새로운 관점에서 접근한 책을 출판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이사를 하고 모든 것을 잊은 채 여유로운 삶을 살아가던 헨리는 어느 날 독특한 희곡을 우편으로 받게 되는데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대화 내용에 이끌려 이 희곡을 보낸 사람을 직접 만나기까지 이른다. 희곡을 쓴 사람은 박제 일을 하고 있는 한 노인이었는데 무뚝뚝하고 때론 무례하다고 느낄만한 태도를 보여주는 사람이지만 헨리는 그와의 만남을 통해 잃어버렸던 문학의 즐거움을 회복하게 된다. 당나귀와 붉은고함원숭이의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대화로 가득한 희곡 ‘20세기의 셔츠’의 의미를 파악해가던 중 헨리는 자신이 전에 출판하려고 했던 책의 내용과 이 의문의 노인이 평생에 걸쳐 작업해왔다는 희곡이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노인의 진실을 알게 되면서 상황은 급박하게 전개된다.


   예술은 때로 굉장히 잔인한 방식으로 그 아름다움과 가치를 드러내려고 한다. 이런 뻔뻔한 행위는 후세 사람들에게 어쩌다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 이면의 진실을 왜곡하고 망각하게 하는 작용이 더 큰 것 같다. 작품의 진정한 의미보다는 경제적 가치가 어떻게 되느냐에 더 목을 매기도 하고 또 다른 정치적인 도구로 이용되기도 하면서 본래 목적이 아무리 순수하다고 해도 결국은 의미가 퇴색되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진정한 예술이 가난과 고통에서만 나온다고 하기도 좀 그렇지만. 이 소설은 불편한 질문을 던지면서 끝을 맺고 있다. 예를 들면, ‘당신의 딸은 확실히 죽었다. 그런데 당신은 딸의 머리를 밟고 올라서야만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다. 어떻게 하겠는가?’는 식의 질문 말이다. 그리고 같은 방식의 질문을 스스로 만들어 내고 답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모순과 불합리가 가득한 이 세상에 묵묵히 순응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저항하고 투쟁해야 할 것인가.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한동안 피해왔던 고민을 어찌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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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복 수사 제복경관 카와쿠보 시리즈 1
사사키 조 지음, 이기웅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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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읽었던 일본 미스터리 소설 중에 경찰이 주요 등장인물로 나온 소설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사사키 조의 소설 ‘제복 수사’는 좀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전에 도서관에서 보았던 같은 작가의 ‘경관의 피’라는 제목의 영향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보통 미스터리물이라고 하면 제도권에 최적화된 인물보다는 조금 튀고 개성이 강한 인물이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모습을 많이 봐왔던 것 같은데 이 소설은 물론 주인공이 꽉 막힌 인물은 아니지만 강력계 형사로서 25년이란 경력을 가지고 있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경찰의 이미지를 가진 인물이 주인공이라서 그런 점이 오히려 특색 있게 느껴졌다. 찾아보면 그런 캐릭터가 많겠지만 그건 뭐... 나의 독서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니 할 수 없다.

   한 경관의 실수로 인해 주인공이 속한 도경 전체가 불합리한 인사이동의 바람에 휩싸이게 되는데 주인공 카와쿠보 역시 이 바람을 피할 수는 없었다. 베테랑 강력계 형사의 경력이 효율적으로 쓰일 수 없는 인구 6,000명의 작은 마을 시모베츠로, 우리에게는 다소 낯선 주재 경관이란 신분으로 근무지 이동을 하게 된다. 표면적으로는 아주 평화롭고 조용한 마을인 것 같지만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날부터 발생한 사건을 시작으로 총 5건의 사건을 통해 폐쇄적인 지역 이기주의가 가진 추악한 이면을 연작소설 형식으로 흥미진진하게 그려내고 있다. 청소년 문제에서부터 일그러진 가족사, 무너진 가정 내 폭력 문제, 교묘한 탐욕, 어린이 유괴 및 성범죄 등이 이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내용이다. 더 무서운 것은 이런 흉악한 사건들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마을의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이 울타리를 형성해서 철저하게 외부의 차단을 막고 자기들끼리의 방식으로 ‘해결’해 오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른 마을과의 병합으로 얻어질 이익에 방해가 될까봐 조직적으로 은폐하고 있었던 것이다. 피해자들은 그 마을을 떠나거나 숨소리조차 죽이며 살아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주인공 카와쿠보는 시모베츠 마을에 부임한 이후로 점점 드러나는 마을의 실상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비록 그것이 법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게 되더라도 개별사건들을 처리해 간다. 작가가 원래는 시리즈로 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처음 이 소설을 썼다고 하는데 부득이하게 시리즈화하게 되면서 오히려 더 흥미진진한 효과를 내고 있는 것 같다. 아주 작은 마을 단위에서도 갖가지 기가 막힌 사건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이야기로 엮어나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다음 시리즈도 한국에서 곧 출간될 예정이라고 하니 꼭 읽어봐야겠다. 


카와쿠보는 생각했다. 이 마을에서 유리창이 처음 깨진 것은 아주 오래전이 아니었을까. 최소한 카와쿠보가 주재 경관으로 부임한 이후의 일은 아니다. 나는 유리창이 연이어 깨진 곳을 마을 안 몇 군데서나 목격했다. 이 황폐화는 끝 간 데까지 가고말 것이다. 이제는 그 누구도 황폐화의 흐름을 막을 수가 없다. 최소한 주재 경관인 자신이 할 수 있는 몫은 아니었다. (p.208)


   카와쿠보라는 인물은 특별한 개성은 없지만 특유의 성실함과 묵직함, 침착함이 돋보이는 캐릭터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런 인물들이 세상에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탐욕과 이기심으로 인해 오염된 세상을 뒤집을 만한 힘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소설을 재미있게 읽으면서도 불편했던 것은 이 세상과 인간의 한계라는 것을 계속 떠올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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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실격 외 세계문학의 숲 5
다자이 오사무 지음, 양윤옥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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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서로에 대한 불신 속에서 여호와고 뭐고 전혀 생각하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히 살아가는 거 아닌가요? (p.25)
서로 사기를 치면서도 다들 이상하게 아무 상처도 입지 않고 서로 속이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실로 훌륭한, 그야말로 맑고 밝고 명랑한 불신의 사례가 인간의 삶에 가득한 것입니다. (중략) 나는 바른생활 교과서에 나오는 정의감이니 뭐니 하는 도덕성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요. 오히려 서로가 서로를 속이면서도 맑고 밝고 명랑하게 살아가는, 혹은 살아갈 자신이 있는 것 같은 인간이 내게는 난해하기만 합니다. (p.26,27)

   나는 요즘 인간의 조건에 대해서 참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 예전부터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았고 자라온 환경을 통해서도 인간이란 존재 자체의 지저분하고 어두운 면, 치졸하고 역겨운 면에 적잖이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내게 삶은 굉장히 고통스러운 것이었고 희망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우연히 심취하게 된 종교의 영역에서 잠시나마 빛을 본 것 같기는 했지만 그 약발은 오래가지 않았다.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뿐, 종교 안에서의 인간의 이기심과 구별짓기, 탐욕의 형태는 더 고도화되어 있는 시스템으로써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고 미치게 했다. 결국 지금 나는 그 어떤 것도 정해져 있는 규칙이나 절대 진리는 없으며 다만 거대한 어떤 흐름의 일부분으로서 지금의 세상과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받아들이고 있다. 의미나 가치 같은 것은 애초에 없었고 삶의 존재 이유 같은 것도 배부른 사람들이 지껄이는 유희에 불과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물론 숨이 붙어 있는 동안은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계시와도 같은 힘은 느끼고 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좀 더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욕구라는 말로도 뭔가 좀 부족하고, 허영심이라는 말로도 뭔가 좀 부족한, 색과 욕이라고 두 개를 나란히 놓고 봐도 좀 부족한, 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인간 세상의 밑바닥에는 경제만은 아닌 이상한 괴담 같은 구석이 있는 것 같습니다. (p.50)


   인간 같잖은 인간들이 너무 많다. 짐승의 탈을 쓰고 있는? 아니다. 짐승보다 못한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너무 많은 것이다. 기본적인 예의도 모르고 상대방을 전혀 배려할 줄 모르며 왜 사는지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주어진 조건에 맞춰 흥청거리며 살거나 거지처럼 살거나 절망하며 사는 게 다인 것 같다. 예전에는 뭔가 꼭 지켜야 하는 절대적인 규칙이나 진리? 혹은 윤리 같은 것이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살아갈수록 그런 것은 헛소리에 가깝다고 생각하게 된다. 평생을 양심을 지키며 고귀하게 살던 훌륭한 분이 비참한 최후를 맞는가 하면, 당장 벼락에 맞아 죽어도 당연하다고 생각할 인간 말종이 죽을 때까지 떵떵거리며 사는 모습을 우리는 쉽게 볼 수 있다. 그런 터무니없는 현실에 포장질을 해대는 역겨운 성인군자들은 아마 세상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했거나 머리가 이상해져서일 것이다. 세상이 비정상적으로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고 사람들은 서로 위선을 떨다 못해 마비 상태에 이르렀으니 정상과 비정상, 선과 악, 옳고 그름 등을 바꿔서 이해하고 있다고 해도 사실 뭐라 할 수가 없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순응해야 하나? 저항해야 하나? 아니면 지금의 나처럼 관망해야 하나.


비합법(非合法) 나는 그것이 적잖이 즐거웠던 것입니다. 오히려 그쪽이 마음 편했습니다. 세상에 통하는 합법이라는 것이 무섭고(거기에서는 수렁처럼 강력한 것이 느껴집니다) 그 구조가 불가해하고, 그 창문도 없이 뼛속까지 냉랭한 방에는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차라리 비합법의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치고 이윽고 죽음에 이르는 게 나에게는 더 마음 편한 일 같았습니다. (p.50,51)


   ‘인간실격’의 주인공은 백지 상태에서 세상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살아가야 했기에 이해하는 척 연기를 하며 평생을 살아왔다. 기본적인 욕구나 이기심,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작동하는 원리가 지독한 위선의 탈을 쓰고 있는 것을 끝끝내 받아들이지 못했다. 차라리 짐승들처럼 본능에 충실했으면 덜 괴로웠을지도 모른다. 뒤로는 온갖 더러운 행태를 일삼으면서 겉으로는 아닌 것처럼 뻔히 보이는 이중성을 서로 묵인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주인공 자신도 그렇게 변해가는 과정을 갈등하고 괴로워하며 죽는 순간까지 끌고 간다. 


나에게 ‘세상’은 역시 끝없는 무서운 곳이었습니다. 결코 그런 단판 승부 따위로 결정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곳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p.106)


   지옥이나 다름없는 세상을 새롭게 인식할 최후의 수단으로 주인공은 절대적 신뢰와 순수한 아름다움, 순결의 상징인 한 소녀와의 동행을 결심한다. 그러나 결국 그것도 해답이 될 수 없음을 이내 확인하고 만다. 한 사람의 목숨을 건 도전도 그저 곧 가라앉고 말 잔물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순수하고 센스 있고, 하느님 같이 착한 아이였던 그가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오늘날 자기들만의 정의를 가지고 입씨름하고 크게는 미사일을 쏘아 대며 피를 보고야 마는, 문화를 운운하고 문명, 인권을 지껄이는 오늘날의 모습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삶에 옳고 그래야만 하는 정답은 없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살 필요가 없었다. 주어진 그대로를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였어야 했다. 의미 없는 죽음이었다. 


   이 책에는 저자의 고뇌에 찬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간실격’ 외에도 다자이 오사무의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멋진 작품들 - ‘물고기비늘 옷’, ‘로마네스크’, ‘새잎 돋은 벚나무와 마술 휘파람’, ‘개 이야기’, ‘화폐’ 가 기다리고 있다. 모두 인간의 근원적인 공허함, 외로움, 허영심을 짧지만 깊이 있게 다룬 수작들이다. 이런 작품들을 읽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조금 슬프다. 좋은 의미에서가 아니라 지독히도 부정적인 의미에서 말이다. 진짜 인간으로서 실격되어야 할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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