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실격 외 세계문학의 숲 5
다자이 오사무 지음, 양윤옥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인간은 서로에 대한 불신 속에서 여호와고 뭐고 전혀 생각하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히 살아가는 거 아닌가요? (p.25)
서로 사기를 치면서도 다들 이상하게 아무 상처도 입지 않고 서로 속이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실로 훌륭한, 그야말로 맑고 밝고 명랑한 불신의 사례가 인간의 삶에 가득한 것입니다. (중략) 나는 바른생활 교과서에 나오는 정의감이니 뭐니 하는 도덕성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요. 오히려 서로가 서로를 속이면서도 맑고 밝고 명랑하게 살아가는, 혹은 살아갈 자신이 있는 것 같은 인간이 내게는 난해하기만 합니다. (p.26,27)

   나는 요즘 인간의 조건에 대해서 참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 예전부터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았고 자라온 환경을 통해서도 인간이란 존재 자체의 지저분하고 어두운 면, 치졸하고 역겨운 면에 적잖이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내게 삶은 굉장히 고통스러운 것이었고 희망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우연히 심취하게 된 종교의 영역에서 잠시나마 빛을 본 것 같기는 했지만 그 약발은 오래가지 않았다.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뿐, 종교 안에서의 인간의 이기심과 구별짓기, 탐욕의 형태는 더 고도화되어 있는 시스템으로써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고 미치게 했다. 결국 지금 나는 그 어떤 것도 정해져 있는 규칙이나 절대 진리는 없으며 다만 거대한 어떤 흐름의 일부분으로서 지금의 세상과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받아들이고 있다. 의미나 가치 같은 것은 애초에 없었고 삶의 존재 이유 같은 것도 배부른 사람들이 지껄이는 유희에 불과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물론 숨이 붙어 있는 동안은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계시와도 같은 힘은 느끼고 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좀 더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욕구라는 말로도 뭔가 좀 부족하고, 허영심이라는 말로도 뭔가 좀 부족한, 색과 욕이라고 두 개를 나란히 놓고 봐도 좀 부족한, 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인간 세상의 밑바닥에는 경제만은 아닌 이상한 괴담 같은 구석이 있는 것 같습니다. (p.50)


   인간 같잖은 인간들이 너무 많다. 짐승의 탈을 쓰고 있는? 아니다. 짐승보다 못한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너무 많은 것이다. 기본적인 예의도 모르고 상대방을 전혀 배려할 줄 모르며 왜 사는지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주어진 조건에 맞춰 흥청거리며 살거나 거지처럼 살거나 절망하며 사는 게 다인 것 같다. 예전에는 뭔가 꼭 지켜야 하는 절대적인 규칙이나 진리? 혹은 윤리 같은 것이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살아갈수록 그런 것은 헛소리에 가깝다고 생각하게 된다. 평생을 양심을 지키며 고귀하게 살던 훌륭한 분이 비참한 최후를 맞는가 하면, 당장 벼락에 맞아 죽어도 당연하다고 생각할 인간 말종이 죽을 때까지 떵떵거리며 사는 모습을 우리는 쉽게 볼 수 있다. 그런 터무니없는 현실에 포장질을 해대는 역겨운 성인군자들은 아마 세상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했거나 머리가 이상해져서일 것이다. 세상이 비정상적으로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고 사람들은 서로 위선을 떨다 못해 마비 상태에 이르렀으니 정상과 비정상, 선과 악, 옳고 그름 등을 바꿔서 이해하고 있다고 해도 사실 뭐라 할 수가 없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순응해야 하나? 저항해야 하나? 아니면 지금의 나처럼 관망해야 하나.


비합법(非合法) 나는 그것이 적잖이 즐거웠던 것입니다. 오히려 그쪽이 마음 편했습니다. 세상에 통하는 합법이라는 것이 무섭고(거기에서는 수렁처럼 강력한 것이 느껴집니다) 그 구조가 불가해하고, 그 창문도 없이 뼛속까지 냉랭한 방에는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차라리 비합법의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치고 이윽고 죽음에 이르는 게 나에게는 더 마음 편한 일 같았습니다. (p.50,51)


   ‘인간실격’의 주인공은 백지 상태에서 세상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살아가야 했기에 이해하는 척 연기를 하며 평생을 살아왔다. 기본적인 욕구나 이기심,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작동하는 원리가 지독한 위선의 탈을 쓰고 있는 것을 끝끝내 받아들이지 못했다. 차라리 짐승들처럼 본능에 충실했으면 덜 괴로웠을지도 모른다. 뒤로는 온갖 더러운 행태를 일삼으면서 겉으로는 아닌 것처럼 뻔히 보이는 이중성을 서로 묵인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주인공 자신도 그렇게 변해가는 과정을 갈등하고 괴로워하며 죽는 순간까지 끌고 간다. 


나에게 ‘세상’은 역시 끝없는 무서운 곳이었습니다. 결코 그런 단판 승부 따위로 결정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곳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p.106)


   지옥이나 다름없는 세상을 새롭게 인식할 최후의 수단으로 주인공은 절대적 신뢰와 순수한 아름다움, 순결의 상징인 한 소녀와의 동행을 결심한다. 그러나 결국 그것도 해답이 될 수 없음을 이내 확인하고 만다. 한 사람의 목숨을 건 도전도 그저 곧 가라앉고 말 잔물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순수하고 센스 있고, 하느님 같이 착한 아이였던 그가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오늘날 자기들만의 정의를 가지고 입씨름하고 크게는 미사일을 쏘아 대며 피를 보고야 마는, 문화를 운운하고 문명, 인권을 지껄이는 오늘날의 모습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삶에 옳고 그래야만 하는 정답은 없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살 필요가 없었다. 주어진 그대로를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였어야 했다. 의미 없는 죽음이었다. 


   이 책에는 저자의 고뇌에 찬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간실격’ 외에도 다자이 오사무의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멋진 작품들 - ‘물고기비늘 옷’, ‘로마네스크’, ‘새잎 돋은 벚나무와 마술 휘파람’, ‘개 이야기’, ‘화폐’ 가 기다리고 있다. 모두 인간의 근원적인 공허함, 외로움, 허영심을 짧지만 깊이 있게 다룬 수작들이다. 이런 작품들을 읽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조금 슬프다. 좋은 의미에서가 아니라 지독히도 부정적인 의미에서 말이다. 진짜 인간으로서 실격되어야 할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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