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아트리스와 버질
얀 마텔 지음, 강주헌 옮김 / 작가정신 / 201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고통스러운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는 방법으로는 최대한 있는 그대로 유무형의 기록을 수집하고 보존하면서 후세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슬픈 흔적들을 예술의 영역에서 다룬다는 것이 합당한 일일까? 사실 전쟁을 비롯한 갖가지 흉악한 범죄의 내용들이 최근 엔터테인먼트를 위한 재료로 각광을 받게 되면서 이제는 인간의 온갖 추악함과 잔인함, 피범벅이 나오지 않고서는 사회적 이슈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무섭게 느껴질 때가 많다. 그런 것들을 보며 스릴을 즐기고 쾌감을 느끼면서도 뭔가 이건 잘못된 것 아닌가 하는 찜찜함을 지울 수가 없다.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일 수도 있다. 삶과 죽음, 선과 악, 성, 정의와 불의, 죄 등의 문제는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우주의 법칙일지도 모르니까. 착한 사람의 불행한 죽음, 악인의 풍요롭고 윤택한 일생 등을 보면 우리는 그 모든 기가 막힌 상황들을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적당한 자세인 것은 아닐까?

   홀로코스트, 즉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인류에게 가장 부끄럽고 치욕적인 사실을 전혀 다른 시선으로 다룬 얀 마텔의 신작소설 ‘베아트리스와 버질’은 역사적 사실의 언급은 거의 드러내지 않은 채 죄를 지은 자가 또 다른 정의를 추구하면서 구원을 얻으려는 인간의 이중성을 맞닥뜨린 한 작가의 이야기다. 주인공인 소설가 헨리는 역사가 예술로 표현되지 않는다면 인류의 기억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에 홀로코스트를 새로운 관점에서 접근한 책을 출판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이사를 하고 모든 것을 잊은 채 여유로운 삶을 살아가던 헨리는 어느 날 독특한 희곡을 우편으로 받게 되는데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대화 내용에 이끌려 이 희곡을 보낸 사람을 직접 만나기까지 이른다. 희곡을 쓴 사람은 박제 일을 하고 있는 한 노인이었는데 무뚝뚝하고 때론 무례하다고 느낄만한 태도를 보여주는 사람이지만 헨리는 그와의 만남을 통해 잃어버렸던 문학의 즐거움을 회복하게 된다. 당나귀와 붉은고함원숭이의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대화로 가득한 희곡 ‘20세기의 셔츠’의 의미를 파악해가던 중 헨리는 자신이 전에 출판하려고 했던 책의 내용과 이 의문의 노인이 평생에 걸쳐 작업해왔다는 희곡이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노인의 진실을 알게 되면서 상황은 급박하게 전개된다.


   예술은 때로 굉장히 잔인한 방식으로 그 아름다움과 가치를 드러내려고 한다. 이런 뻔뻔한 행위는 후세 사람들에게 어쩌다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 이면의 진실을 왜곡하고 망각하게 하는 작용이 더 큰 것 같다. 작품의 진정한 의미보다는 경제적 가치가 어떻게 되느냐에 더 목을 매기도 하고 또 다른 정치적인 도구로 이용되기도 하면서 본래 목적이 아무리 순수하다고 해도 결국은 의미가 퇴색되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진정한 예술이 가난과 고통에서만 나온다고 하기도 좀 그렇지만. 이 소설은 불편한 질문을 던지면서 끝을 맺고 있다. 예를 들면, ‘당신의 딸은 확실히 죽었다. 그런데 당신은 딸의 머리를 밟고 올라서야만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다. 어떻게 하겠는가?’는 식의 질문 말이다. 그리고 같은 방식의 질문을 스스로 만들어 내고 답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모순과 불합리가 가득한 이 세상에 묵묵히 순응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저항하고 투쟁해야 할 것인가.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한동안 피해왔던 고민을 어찌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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