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봉모 신부 지음. 134 p.
주님 수난 성지주일을 지내며, 예수님이 겪으셨던 고통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참 아프셨겠구나, 그러고 말았는데, 조금씩 나이를 먹어 가면서는 그분께서 겪으셨을 마음의 고통이 참 아프게 다가옵니다. 사랑하는 제자의 배신, 마음을 열지 않는 율법학자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열렬히 환호하다가 이제는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쳐대는 군중들.
모든 이들이, 예수님과 똑같지는 않아도, 외적 또는 내적 고통을 안고 삽니다.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도 있고, 아픈 마음을 안고 살아야 하는 사람도 있지요. 편안하고 기쁘기만 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모든 인간들이, 예수님까지도, 겪어야 하는 고통은 왜 우리에게 주어지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우리는 즐겁고 달콤한 시간만을 보내며 살지 못하고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일까요?
송봉모 신부님의 “고통 그 인간적인 것”은 저의 의문을 풀어 주었습니다. 피해 가고 싶었던 그 고통은, 떼어놓을 수 없는 인간 삶의 한 부분이고, 나아가 저를 하느님께 더 가까이 이끌어 주고 있었습니다.
본문을 조금 들여다볼까요?
모진 수난과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자주 들려주시는 성서 말씀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말은 성서에 365번 나온다. 일 년은 365일이니, 하루에 한 번은 주님께서 이 말을 들려주시면서 우리를 위로하신다는 소리다. 주님의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 인생길에 어떤 어려움이나 장애물도 없을 테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다. 주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당신이 우리의 앞길을 편안히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인생길을 걸으시면서 갈 길이 험난할 때에도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돌보아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 종교가 고통에 대해서 가르쳐 주는 유일한 말씀은 고통 한가운데에서도 우리는 주님과 함께 인생을 걸어간다는 것이다.
활기에 차고, 평화로운 삶의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았을 때에도 우리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창조적인 삶과 즐거움을 누리는 삶만이 의미있는 삶은 아니다. 우리 생의 모든 것이 의미가 있다. 고통스런 삶도 그렇다. 고통은 결코 제거할 수 없는 우리 삶의 한 부분이다. 고통과 죽음 없이 인간의 삶이 완성될 수는 없다.
고통 속에서 별로 의미를 찾지 못하면 우리는 마치 고통의 희생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긴다. 그러나 역경 중에서도 의미를 찾게 되면 고통은 우리의 성장과 변화를 위한 디딤돌이 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은 악을 허락하시지만 이는 그것을 더욱 큰 선으로 바꾸어 놓으시기 위함이다.”라고 하셨다. 그러니 삶의 의미를 찾고 고통을 받아들여야 한다.
삶의 의미를 찾고 고통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부분에 마음이 많이 머물렀습니다.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이유. 왜 살아야 하는가 하고 저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보았습니다. 제가 여러 가지 삶의 목표로 세웠던 것들이 떠올랐습니다. 이런 수도자가 되어서 이런 봉사를 하고 싶다, 하는 것들이요. 그런 저에게 다시 눈에 띈 부분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하느님 때문,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이 혼탁한 시기에 우리는 도대체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의미를 잊어버리고 살기 쉽다. 우리는 이 사람도 저 사람도 그럭저럭 살고 있으니 우리도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실을 말하자면,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게 할 수만 있다면, 세상 사람들이 예수와 같이 살게만 된다면, 또 그렇게 되어야만 우리 삶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예수와 같이 살지 않는다면, 비록 모든 사람이 우리를 존경하고 사랑할지라도 우리 삶은 무의미할 뿐이다.
제가 세웠던 목표들과 결심들을 돌아보며, 본질적인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절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 삶의 큰 부분인 고통을 묵상하고 어떻게 그것을 받아들이며 살 것인지 새로운 각오를 다져 보시는 것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