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도정일 / 민음사 / 1994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유명한 생물학자 최재천 박사와 도정일 교수의 『대담-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라는 책을 매우 재미있게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에서 인문학자 도정 일 교수는 동서양의 모든 신화와 해박한 인문학적 지식을 동원하여 기술문명과 인간의 삶에 대한 성찰과 비전을 매우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 내가 놀란 건  생물학  전공자인 최재천 박사에게도 생물학을 한 수 가르칠 정도로 해박한  도정일씨의 생물과 과학에 대한 지식과 깊은 안목이었다. 자신의 본래 전공영역도  아닌 생물학, 과학에 대한 지식이 저정도이면 도대체 그의 전공인 인문학, 문학에 대한 수준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라는 호기심이 발동하여 그의 다른 책을 찾아보게 되었다.

 

 그런데 도정일 교수는 책을 출판 안하기로 유명한 분이다. 그의 책 중에서 순수하게 그의 글로만 이루어진 책은 이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 한다>와 <시장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 이라는 단 두 권의 단행본 밖에 없었다. 도정일 교수는 글을 잘 쓰기로 유명하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빈틈없이 정확하게 짜여진 톱니바퀴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듯 미끈하고 무리 없는 논리와 유려한 문체에 매료되지 않을 독자는 드물 것이다. 그래서 그의 글은 독특한 문장력과 뛰어난 설득력이 조합된 명문중의 명문이다. 아쉬운 것은 주옥 같이 훌륭한 글들을 묶은 이 책이 출판사에서도 이미 오래전에 절판되어 돈이 있어도 구하기 어려운 희귀서가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얼마 전 우연히 인터넷 헌책방인 북코아에서 이 책을 운 좋게 구입했다.
 
 ‘문화, 문학, 시대에 대한 에세이’를 담고 있는 이 책은 크게 문학비평이론과 문화에세이로 나뉘어져 있다. ‘3부 혼돈시대의 소설’ 이라는 문학비평이론에서 관심이 가는 부분은 ‘시뮬레이션 미학, 또는 조립문학의 문제와 전망’이라는 글이었다. 도정일 교수는 이 글에서 이인화씨의 소설<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텍스트를 매개로 하여 조립소설, 혹은 짜깁기 소설이란 무엇이며 그러한 소설이 문학과 소설의 이름으로 용인 받을 수 있는지, 또 그런 조립소설을 지탱하는 이론적 토대는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를 담담하고 논리적으로 펼쳐 보인다. 이인화 씨의 소설<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소설을 나는 오래전에 매우 재미있게 읽었고, 그 파격적인 소설의 형식에 대해 전율하면서도 이런 구성도 소설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 기억이 있다. 이인화씨는 자신의 소설은 혼성기법을 차용한 구성이라고 주장하였다지만 도정일 교수는 이러한 혼성기법을 정당화하는 간텍스성(intertextuality)의 미학은 이인화의 소설적 구성을 용인해주는 이론적 토대가 될 수 없음을 지적한다.

 

 도리어 흔히 짜깁기 소설, 혹은 조립소설을 정당화하는 가장 강력한 이론적 근거는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레이션 이론이라고 도정일은 주장한다. 시뮬레이션 이론은 이 세상에 진품과 모조품을 구분할 수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모든 소설, 모든 텍스트, 그리고 우리의 삶에 이르기까지 무엇이 진본이고 무엇이 모조인지 구분할 수 없는 디지털시대에서 이인화의 소설은 단순한 짜깁기, 조립소설이 아니라 철저한 시뮬레이션 미학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소설이 표절이라는 도덕적인 비난을 받을 수 없고, 다만 우리는 그러한 시뮬레이션 미학을 추구하는 문학작품을 받아들일 것이냐 말 것이냐의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을 뿐이다라고 도정일 교수는 결론을 내린다. 이인화의 소설에 대한 도정일 교수의 긍정적 인식은 타당한 듯 하고 나도 그러한 인식에 대체로 공감하는 편이다.

 

  4부는 문화 에세이 글 묶음인데  4부에 실린 5편의 글들이 이 책의 백미라 할 수 있다. 특히 <압구정의 유토피아/디스토피아>라는 글은 근대적 생산, 소비 양식의 절정에서 생긴 우리시대의 유토피아 압구정이라는 공간이 우리가 자본주의의 실천 30년 끝에 이룩한 ‘계급문화의 천국’이자 우리 사회의 정치경제적 모순이 남김없이 그 추악한 몰골을 드러내고 있는 모순의 디스토피아 임을 역설하고 있는데 그 옛날의 오렌지족들과 서울 강남의 문화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재밌고 흥미롭다 못해 통쾌한 쾌감? 마져 느끼게 하는 명문?이다. 이 글은 1990년 초반의 서울 압구정과 강남 일대를 다루고 있지만 2011년 현재의 서울 강남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유효한 도구적 틀을 제공하고 있다. 도정일 교수의 인식과 사유는 결코 일회성에 그치는 단순한 감상문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화두를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는 셈이다. 

 

 <문화의 몰락과 비평의 위기>라는 글에서 도정일 교수는 산업과 생산양식, 현대적 소비문화와 인간의 사회적 존재방식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사회적, 현실적 모순을 해소하기 위한 희생양이 되었던 마광수 교수에게 애정 어린? 충고를 해주는 동시에 더불어 면죄부도 부여해 준다. 마광수 교수의 외설문학이 위선을 고발한다는 미명하에 우리사회에 던진 소통의 방식은 어린아이들 수준의 유치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도정일 교수는 마 교수의 문학을 외설로 치부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나는 요즘 마 교수의 책은 읽지 않지만 마교수의 문학적 소통방식에 대해서는 여전히 호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도정일 교수가 말하는 외설과 외설이 아닌 것의 차이점(도정일은 외설이란, 성기와 성행위 장면 묘사의 파편적 연속 즉, 섹스 이외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이러한 외설산업 생산물의 특징으로 진부성, 천박성, 반복성을 들었다. 이러한 시각에서 음란물, 포르노물 만이 외설산업이 아니라는 점은 명백해진다. 외설이란 성행위를 묘사하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총체성을 파편화하여 증오의 문화를 확대하는 일체의 모든 것이 해당된다는 것이 도정일의 생각이다)은 매우 적절하고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맨 마지막 글<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 한다>는 문학교육에 있어서 문학적 감수성의 모태인 자연 자체가 이미 산업화로 인해 불구의 형태가 되어버린 지금, 우리는 아이들에게 과연 어떻게 감성의 모태로서 본래의 자연을 다시 회복하고 가르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문학교육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다. 도정일은 현대문명의 자연에 대한 야만성을 감수성어린 분노의 언어로 폭로한다. 근대적 생산 방식은 ‘자연의 품위에 대한 적극적 멸시’를 그 특징적 운용원리고 갖고 있다는 도정일의 표현이 다소 과격하게 느껴진다면 다음의 표현들은 어떤가?

 

 “이 원리(근대적 생산방식)는 어떤 의미에서도 가이아 여신(Gaea,땅)의 품위를 존중하지 않는다. 근대산업의 눈에 비친 그녀는 멍청이이며 산업과 호출의 명령 앞에 24시간 대기하는 도구적 노예이고, 쥐어짜기에 따라 석탄에서부터 다이아몬드 또는 곰 발바닥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 내놓아야 하는 식민지적 벙어리 자원창고... 산업폐기물 처리장을 제공하기 위해 자기 내장까지도 내놓아야 하는... 소리 없이 대기하는 벙어리 처녀, 아니 창녀로서만 존재하는..”

 

 이러한 거침없는 표현과 폭로만이 이글의 전부는 아니다. 도정일은 이러한 생태계의 전면적 위기라는 모순 앞에서 문학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극복의 모색 지점은 바로<문명의 재편>을 통한 자연 회복이라고 주장한다. 문명의 재편이 완료되어 불구의 자연이 회복되면 시인은 숲으로 가게 될 것이다. 과연 시인은 언제쯤 숲으로 돌아 갈 수 있을까?


 이 책의 전반부를 차지하고 있는 문학 분야의 글들은 평소 관심이 있었던 독자가 아니라면 소화하기 힘들지도 모르지만 후반부의 이 시대의 문화, 시대에 대한 밀도 있는 글들은 독자들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도정일의 미끈한 문장을 즐기고 싶은 독자들은 필독서..

 

                                                                                            2011년 작성

도정일 교수는 작년(2014년)2월에 두 권의 산문집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과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을 동시에 출간했다.
책 안내기로 유명한 분이라서 동시에 두 권의 책을 출간소식이 반가웠고 예약주문하여 구입했다.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도정일 문학선을 기획한 것 같은데 앞으로 도정일교수의 단독저서를 꾸준히 볼 수 있을 것 같다. 또 오래전에 절판된<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의 출간 20주년 개정판도 곧 선보일 예정이라고 한다. 도정일교수의 글을 기다리는 사람들한테 반가운 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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