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마 <나의 아저씨> 7회에는 극중 장회장(신구)이 불멍예찬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장회장은 누가 말리지 않으면 하루 종일 장작을 태운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대사가 이어진다.
장회장 曰 : 네덜란드인가? 노르웨이인가? TV 프로그램 중에 하루 종일 모닥불이 타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게 있는데 근데 그게 시청률이 나온대. 나 같아도 볼 거 같아. 마음이 쉬고 싶은 거지. 눈을 감고 누워 있어도 이 생각 저 생각 계속 생각이 떠오르는데 불을 보고 있으면 희한하게 생각이 없어져.
장회장의 말처럼 사람은 이 생각, 저 생각 끊임없는 생각을 한다. 생각을 멈추어 본적이 있는가? 생각은 내 마음대로 멈춰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생각이나, 의식에는 항상 어떤 대상이 있다. 무엇무엇에 대한 의식이나 생각이다. 현상학이라는 서양철학 분파는 이것을 자신들의 근본 철학용어로 “의식의 지향성”이라고 했다. 생각, 의식이 독자적으로 순수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무엇에 관한 의식’ 이고 의식은 늘 내용이나 대상이 있다는 뜻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노트북 화면을 보고 있으니 내 시각 의식에는 화면이라는 대상이 있고 이번에 매수한 주식이 오를 건지 아닌지 걱정이 떠 올랐다가 어제 회사에서 동료에게 했던 말이 적절했나 하는 후회도 떠 올랐다가 오늘 점심은 또 무엇을 먹을지 오후에 미용실에 헤어컷을 하러 갈지 말지. 이처럼 의식은 끊임없이 어떤 대상이나 개념, 관념, 이미지, 상상등을 떠 올린다. 아무런 대상이 없는 무엇도 떠 오르지 않는 그런 순수의식이나 순수한 생각을 우리는 단 1분도 의식적으로 유지할 수 없다. 생각은 늘 생각거리를 찾는다. 가만있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깨어있는 동안 피곤할 수 밖에 없다. 장회장처럼 큰기업의 최고경영자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 생각거리는 보통 사람들과 달리 스케일이 훨씬 커지겠지. 눈을 감고 자려고 해도 생각은 멈추지 않는다. 걱정이 많은 사람은 생각이 무거워진다. 무거운 짐을 든 사람은 쉽사리 쉬지 못한다. 생각만큼 무거운 것도 없다. 그런데 생각의 무게, 의식하는 것에 대한 고단함을 쉬게 해주는 매체로서 불만한 것이 없다. 불 앞에 앉으면 장회장의 말처럼 희한하게 생각이 없어진다. 불은 자신의 연료를 태울 뿐만 아니라 불 앞에 앉은 사람의 생각거리도 다 태워 없애버리는 효능이 있다. 불을 바라보고 있을 때 우리는 생각의 씨앗이 자라지 않는다. 그저 불이라는 연소 현상만이 있을 뿐이다. 불을 바라볼 때 불을 떠 올리는 나 자신이 없어진다. 불과 나의 분열이 사라진다. 자아가 없어지면 미쳐 날뛰던 생각은 소멸한다. 우리는 왜 불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렇게 편안해질까?
장작불을 바라볼 때와 같은 멍한 상태의 의식은 자아에 의한 의식의 중앙집권화를 잠시나마 해제하고 일종의 원형질 의식 혹은 무의식 상태로 진입하는 것이 아닐까? 아득한 과거 인류가 아직 문명사회에 진입하지 못했을 때, 그들은 밤이면 동굴이나 움막에서 화톳불을 피워놓고 불을 바라보면서 생존의 고단함과 피로를 잊으며 견뎠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불멍의 습관이 시간이 지나면서 의식의 원형질로 우리 뇌 속에 새겨져서 무의식 혹은 기저의식으로 루틴화 되었을 것이다. 뇌의 피로감을 해소하고 초기화하는 어떠한 의식 상태의 긍정적 효과는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또 그런 긍정적 효과를 자주 느끼고 체험한 사람은 피로감을 쉽게 이기고 더 활동적으로 일을 할 수 있으니 생존 경쟁이나 자손 번식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을 것이다. 불을 단순히 생존 도구가 아닌 안식과 치유의 도구로 잘 이용할 수 있었던 개체들의 유전자는 자연이 선택할 가능성이 훨씬 높아졌을 것이다.
아마도 인간은 자의식의 탄생과 더불어 그 자의식을 잊어버리는 특정한 의식상태도 병행하여 진화적으로 자연선택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뇌의 피로감을 해소하고 초기화하는 어떠한 의식 상태의 긍정적 효과 또한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감각기관으로 받아들인 수없이 다양한 현실의 정보들을 종합해서 하나로 꿰고 통합해서 자의식의 탄생은 인간이라는 종의 생존과 번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그대신 일종의 반대급부로 자의식으로 인한 고통에 시달리게 되었는데 그 고통은 바로 실존적 고통이다. 자아를 중심으로 미래를 시뮬레이션 할 수 있게 되자 그저 자연적 소멸에 불과한 죽음 같은 현상이 문제가 되기 시작했는데 바로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게 되는 실존적 문제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자아+미래=죽음이라는 필연적 진리를 타인들의 죽음을 관찰하면서 얻게 되자 그저 죽음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이 문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인간을 제외한 지구상의 그 어떤 동물도 인간처럼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죽음을 문제시 삼는 존재는 인간만이 유일하다. 죽음에 대한 인식을 예로 들어 설명 했지만 이외에도 인간은 자의식을 중심으로 집단, 사회적 생활을 하면서 수없이 다양한 피로감과 고단함, 스트레스에 노출되었을 것인데 그러한 스트레스 해소방식의 방법도 아마 다양했으리라 여겨진다.
그래서 사람은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자기 자신도 잊어버릴 정도로 즐겁게 놀 때 가장 행복하고 즐겁다.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일 중에 하나가 불멍이다. 또 생각이 없어지거나 줄어들 때도 마찬가지로 평온해지고 긍정적으로 변하고 심지어 시간이 흐름도 의식하지 못한다. 내 의식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고 그저 눈앞에 불만 아른거리는 상황은 자아의식이라는 주인의 입장에서 해방되어 구경꾼이 되는 상황이다. 구경꾼은 걱정이 없다. 나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부담 없이 구경만 하면 된다. 온갖 잡다한 걱정과 근심은 주인의 몫이다. 그러니 우리가 언제까지나 피곤한 주인 노릇만 하라는 법이 있을까? 가끔은 구경꾼, 손님이 되어 주인한테 다 맡겨버리고 나면 현실감각도 더욱 선명해진다. 불멍을 하고 나면 내 삶은 새로워지고 기운이 솟는다. 충분히 잘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을 바라보는 시간은 안식과 치유의 시간이다. 불을 바라볼 때 심각함과 복잡함을 내려놓고 자아가 해체되어 생각이 잡아당기는 무거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생각은 자의식이 성성하게 살아있을 때 가장 무겁다. 자아라는 핵이 해체되면 생각의 중력은 사라진다. 불을 바라보는 시간은 온갖 상상력과 창조적 영감이 샘솟는 시간이기도 하다.
도시에 살고 있으니 불멍 할 곳이 없다. 엄마 혼자 계신 본가에 가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장작을 가져와 불을 지피는 것이다. 기름보일러 방이라 불을 피워 난방할 곳도 없고 불로 음식 조리를 할 것도 아니지만 일단 불을 피워놓고 나무 타는 냄새가 나고 장작불이 타닥타닥 터지면 마음이 편안해지기 시작해서 좋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장만해 놓은 장작은 너무 오래돼서 삭기 시작했다. 엄마는 아버지가 해놓은 이 장작만은 절대로 쓰지 않았다. 땔감이 필요하면 동네 복숭아밭을 갈아엎은 곳에 가서 복숭아나무 줄기를 주워 와서 쓴다. 엄마는 그 장작들이 삭아서 벌레들이 파먹고 있음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아버지가 생전에 애쓴 흔적이라서 불태워 없애버리는 게 마음에 걸려서 그런 것일까? 하지만 난 그 장작들 한 팔 가득 들고 와서 아궁이에 넣어 가스토치로 불을 붙인다. 오랫동안 말라서 잘 타는 장작들 바라보고 있으면 엄마가 와서 보고 “왜 쓸데없이 불피우노. 나무 아깝게.” 소리친다. 아무래도 엄마는 불멍을 즐거움을 전혀 모르는 것 같다. 장작들을 쓸데없이 불붙여 태워 없앤다는 잔소리 듣기 싫어서 나중에는 마트에 가서 캠핑용 참나무 장작 몇 자루를 사서 불을 피웠다. 내가 사온 장작으로 불을 피우니까 더 이상 엄마는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다음에 불 피울 때는 엄마도 불곁에 모셔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