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륄을 뒤 따라 가며....


엘륄의 가장 깊이 있게 다가왔던 책은 도시의 의미이다. 그 책에서 가장 강열하게 다가왔던 주제는 도시의 의미를 통하여 나타내고자 했던, 뿌리 잃은 이들을 위한 뿌리 내림을 돕는 공동체의 역할이다. 역사 속에서 정체성을 잃고 방황하는 현대의 방랑자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려 했던 엘륄의 도전은 저주 받은 도시에서 찾아야 하는 인간의 의미는 아닐까? 하여튼 이러한 묘한 연결고리들은 나 혼자만의 푸념이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마지막 구원의 걸림돌은 정통신앙이다” 혁명적으로 다가왔던 그 짧은 문장은 가슴 깊이 사무치도록 나를 괴롭혔다. 인간의 구원은 교리나, 논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잊어버리는 망각의 헌신을 통해서이다. 그들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마25장에는 아주 이상한 비유가 나온다. 예수님께서 종말의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의인들을 향하여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그 말을 들은 의인들은 깜짝 놀라서 이렇게 외친다.

37 '주님, 저희가 언제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38 또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 들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으며, 39 언제 주님께서 병드셨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저희가 찾아가 뵈었습니까?'

예수님의 의도는 명확하다. 의인의 조건, 좀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구원의 조건은 자신이 구원 받을 만한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구원을 선포했을 때 놀라는 것이다. 그들은 철저히 자기의 희생적 삶을 잊어버리며 살아갔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 기억되는 것이라고 누군가는 말했다.

다음으로 나오는 저주받은 자들 역시 의인들과 동일한 질문을 한다. 우리가 언제 주님을 입히지 않았고, 먹이지 않았고, 찾아뵙지 않았습니까? 그들의 질문이다. 그들 역시 의인들처럼 놀라 경악하고 있다. 어떤 철학자는 그랬지, 사람들이 심판대 앞에서 놀라는 이유는 자신이 모르는 상급이 있기 때문이며, 자신이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답변을 듣기 때문이라고.

칼빈주의가 자랑하는 ‘하나님의 주권사상’ 때문에 얼마나 고민했던가? 그것 때문에 수많은 이단들(?)이 죽어갔고, 바로 그것 때문에 세상에서 소유한 것들이 하나님의 선물이 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되고,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 아니었던가? 내가 너무 칼빈을 오도하는 것일까? 그도 사회적 약자로 살았던 사람인데. 칼빈의 정치사상은 그야말로 이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너무나 매혹적인 이론이었다. 모든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신자는 그것들을 관리하는 청지기적 소명을 받은 자들이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바르게 사용만 한다면 얼마든지 좋은 것들이다. 정말이지 이처럼 좋은 이론이 어디 있단 말인가? 저 위대한 칼빈주의 후계자인 아브라함 카이퍼의 “이 세계에 하나님의 땅이 아닌 곳은 단 한 평도 없다”는 유명한 말은 철저한 칼빈주의자인 나에게 얼마나 가슴 설레게 했던가!

그러나 엘륄을 접하면서, 그 말은 곧 나에게 수치가 되었다. 병들고 연약한 자들을 위하여 목마르고, 헐벗고, 고통당하셨던 주님의 모습은 도무지 찾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초대교회 교인들이 카타콤에서 칙칙한 모습으로 서 계시는 익명의 주님을 그리다가 얼마 후 시대가 변하여 천상의 주인이요, 우주적 주권자인 그리스도를 그리는 성화의 변천을 보는 듯하다. 천박하기 그지없던 주님이 만유의 그리스도로 그려지자 그들의 신앙은 아름답고 화려해지고, 세련되고 교양적이 되었다. 그러나 세상이 두려워하게 했던 그들의 시퍼런 신앙은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하는 권력으로 다시 태어났다.

나는 분명 엘륄파는 아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벌써 따라가고 있다. 어색한 동행이다. 십자가를 지고 저주받은 골짜기로 나아가셨던 주님의 Via dorosa를 따라 가야지. 아직도 도시 밖에서 떠돌아다니는 가인의 저주받은 백성을 찾아 가 봐야지. 영문 밖으로 나아가야지. 그리고 잊혀지고 또 잊혀져 망각의 삶을 살아 가련다. 그것은 나팔이 아닌 침묵, 그것은 거리가 아닌 골방.  

자크엘룰의 책들은 비범한 통찰력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탁월한 책은 아무래도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자유의 투쟁]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0년 동안 읽은 책

고독은 어디서 오는가? 

고독은 혼라자는 자의식에서 오는 것이다. 즉 친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는 친구는 육체적 동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측면에서의 친구이다. 

인류의 원시 역사인 구약성경의 창세기 속의 아담은 홀로 고독한 존재였다. 성경은 그가 독처했다고 표현한다. 즉 친구가 없다는 것이다. 함께 마음을 나누고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 교제할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고독한 존재라고 평한 키에르 케고르의 주장은 의미있다.  

그렇다면 고독은 인간의 타락과 상관 없는 어떤 무엇일까? 답은 '그렇다'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고독한 존재이다.  

두번째의 이야기는 창세기 4장으로 넘어간다. 이곳에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아벨의 제사를 하나님이 받으시고 형인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자 가인은 아벨을 들로 불러내어 돌로 찍어 죽여버린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 호소한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세기 4:14)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가인과 아벨 외에 다른 사람이 어디있느냐고 따지려든다. 생각해보라. 지금으로부터 수천년전의 사람이 글을 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바보가 아니다. 놀라운 식견과 비상한 머리를 가진 존재이다. 그가 말하려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이 한 구절을 통해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인간은 고독한 존재]라는 것이다. 아무도 자신을 해하려는 사람이 없다고 할지라도 사람들은 자신 스스로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 우리나라 속담에 [방귀 뀌 놈이 먼저 성낸다]라는 말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양심이 올바른다면 자신의 죄에 대한 대가를 잊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는 인간의 고독을 더욱 강화시켰다.  

현대의 가장 고질병은 고독이다. 수많은 사람이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는 이유도 바로 고독 때문이다. 얼마 전 고인이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아무도 나의 편이 되어주지 않는다]고 말한 것을 들었다. 또한 우리나라 최고의 인기 연예인이 자살하기전 얼마전에도 동일하게 [모두가 나를 버렸다]고 했다. 절대 고독이다. 자신을 이해하고,, 설령 잘못했다 하더라도.. 친구가 되어줄 사람이 없는 것이다. 익명성을 요구하는 현대사회의 필연이다.  

고독의 치유법은 없는 것일까? 있다. 그것은 죽음이다. 죽어야 고독은 사라진다. 키에르 케로르는 마지막 고독의 치유법을 알려 준다. 그것은 복음을 받아 들이라는 것이다. 예수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믿고 받아 들어라는 것이다. 예수가 당신을 위해 죽었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 즉 신을 부인하고 절대 고독 속에 침잔하려는 자아를 죽이고-자살- 자신 안에 예수의 사랑을 가득 채워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나는야똥글 > 스타일리스트-황수미씨 집 실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니르바나 > 등교길의 에스컬레이터를 그린 평범한여대생님의 글에

에스컬레이터에는 인생철학이 숨어있군요.


또 서서히 드러나는 미학이 숨어있어 상업광고로 자주 담아내기도 하지요.


그런데 제가 이용하는 역에는 언제나 서있는 에스컬레이터가 있습니다.


환승역이기에 이용객이 넘쳐나는데도 항상 널부러져있는 것을 보면 이상하게 답답해옵니다.


에스컬레이터가 전기소비량이 많아서 서 있는줄로만 알았는데

 

물리학자이신 김정흠박사님이 방송에서 그러시더군요.


엘리베이터와 달리 전력소비량이 적다고 하시면서 세우지 말고 가동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분이 보기에도 일껏 만들어 놓고 고장도 아닌데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처사가

안 좋아 보이셨나봐요.


그러고 보면 살아 움직이는 에스컬레이터에도 氣運生動이 있어

평범한 여대생님의 만남과 헤어짐을 다 담아내고 있는 모양입니다.


이쯤되면 사람만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만물, 그중에 기계에도 機心이 있다는

김지하시인의 말씀에 수긍이 가네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