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바꾸는 글쓰기 공작소 - 한두 줄만 쓰다 지친 당신을 위한 필살기 이만교의 글쓰기 공작소
이만교 지음 / 그린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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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두 줄만 쓰다 지친 당신을 위한 필살기? 이건 아니다. 난 아직도 이 책을 다 읽지 못했다. 384쪽이나 되는 어마 어마한 분량을 읽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하도 광고를 해 대길레 바로 구입한 책이다. 워낙 글쓰기에 흥미가 많고 좋아하기 때문이다. 특히 블로그를 하면서 글쓰기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한 탓에 고민없이 주문했다. 그러나 구입해서 읽어 보니 결코 쉬운 글쓰기는 아니다. 여러 글쓰기 책과 그리 다르지 않다.  

어떤 면에서 매우 탁월한 부분도 있기는 하지만 내용들이 산만하고 어디선가 베껴온 내용들을 짜집기한 듯한 내용들이 가득하다. 무슨 이유때문인가 좀더 생각해보니 너무 많은 설명구와 예들 때문으로 생각된다. 간결하고 정확한 내용들로 채워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 책은 너무 길고 복잡하다.  

난 벌써 이 책을 다 읽기도 전에 글쓰기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읽기가 상당히 주저되고 벌써 책꽃에 삭혀두고 있다. 충분히 시간이 되면 읽기 위해서다. 대충 끝까지 살펴보기도 하고 중간 중간 필요하다 싶은 부분은 집중적으로 읽기는 했지만 아직 충분히 소화해 내지는 못했다.  

저자에게 부탁드립니다. 이 책의 요약집을 다시 편집해서 내심이 어떨런지.. 너무 바쁜 시간 속에서 이 책을 무료하게 읽는다는 것은 너무 버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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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전쟁 - 종교에 미래는 있는가?
신재식 외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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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무엇인가? 경험과 관찰이 아닌가? 종교란 무엇인가? 믿음의 영역이 아닌가? 과학과 종교가 토론을 한다고.. 만도 안돼! 생각해보라. 창조의 문제를 과학으로 풀 수있다고? 너무 오만한 것이 아닌가? 어떻게 경험되지 못한 사실을 과학의 이름으로 정의할수 있단 말인가? 과학을 종교의 이름으로 정죄한다고?? 이것 또한 아이러니 아닌가? 미국에서 일어났던 원숭이 재판이 될 것이 아닌가? 과학의 종착역은 어디인가? 무엇 때문에 과학을 하는가? 과학의 종착역은 역시 철학이요, 종교이다. 진실로 과학도 자신의 의도된 사기극이라는 토마스쿤의 제안을 다시한번 생각해 보야 한다. 이 문제는 전적으로 인간이 물질에 불과한가? 아니면 영혼을 가진 존재인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없이 시작되는 무모한 시도에 불과한 것이다. 너무 극성 맞게 광고하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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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민 2009-06-30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책을 구매하고 읽어 보셨는지 궁금하네요. 다소 자극적인 책의 마케팅 전략과 제목(원제목은 "과학과 종교의 대화"였지요)은 저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전체적인 책의 내용에는 부합하지 않는 서평이라 생각됩니다. 깊게 읽어 보시면 생각할 가치가 있는 내용이 많습니다. 과학과 종교 모두 인간과 사회가 섞여 있는 것이니깐요.

낭만인생 2009-06-30 20:33   좋아요 0 | URL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 문제는 책에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저자들을 모두 알지는 못하지만, 대충 알고있는 분들이고 저들의 신앙관도 어느정도 압니다. ..참고는 저는기계공학, 철학과 신학을 전공했습니다. 저도 좋은 부분이 어느정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이나 자연철학등 배타적으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토론 자체가 부족합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을 뿐입니다.
 
십자가와 칼 - 위에 서는 힘, 아래에서 섬기는 힘
그레고리 보이드 지음, 신선해 옮김 / 한언출판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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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911테러 이후 급격히 좌경화되어가는 조국인 미국을 향해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곳인가를 도전적으로 제시한다.  

십자가와 칼은 저자가 보려주는 참된 신앙인의 생존방식을 일러주고있다. 일찌기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고 선언했으며, 또 다른 곳에서 칼을 가진자는 칼로 망하며, 하나님의 나라에서 최고의 자리는 이 땅에서 가장 낮은 자가 앉는다고 역설적으로 말씀하셨다.  

그렇다. 하나님의 나라는 물리적 힘이나, 강제적으로 되는 곳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스스로 낮아지는 곳이요, 섬기는 곳이요, 헌신하는 곳이다. 십자가는 바로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표식이다.  

칼빈 이후 개신교 안에는 특히 네덜란드의 칼빈주의 사상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일하시는 일터이며, 모든 직업은 신성한 것이라고 선언함으로 이원화된 세계관을 하나로 묶는 놀라운 작업을 단행했다. 어떤 면에서 놀라운 혁명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아주 날카로운 비수가 그 신학사상 안에 숨겨져있다는 것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타락한 이세상, 부조리와 부패가 가득한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하는 오류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네덜란드의 수상이요, 3대 칼빈주의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아브라함 카이퍼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소유가 아닌 곳은 단 한평도 없다고 선언하며 이 세상의 신성화의 신학적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소위 하나님 주권사상이라 불리는 이러한 신학사상의 맹점은 교회가 더이상 소외되고 연약한 자들의 피난처요, 위로자가 아니라 통치자의 입장에서 선다는 것이다. 교회가 정치에 가담하고, 경제를 주도하고, 교육계를 지배하는 것이다. 왜? 모든 곳은 다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단척결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기독교회가 그토록 혐호해왔던 세상에 대한 이해가 완벽하게 전복되어 이제는 멋진 천국으로 화한 것이다. 교회는 더이상 섬김의 단체가 아니다. 지배하고, 물리적으로 강제하고, 요구하고, 착취할 수있는 가능성을 무한히 갖게 되었다. 십자가가 아니라 칼을 잡은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현대 기독교의 어리석음을 폭로하면서 진정으로 다시 교회가 십자가로 돌아가야 할 것을 도전한다. 만약 교회가 칼을 쥐게 되면 사람을 죽이고 억압하게 되지만, 십자가는 죄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십자가로 돌아가자. 그 높은 고딕건축물을 버리고 낮고 천한 광야의 배회하는 청년으로 돌아가자. 교회는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렸다. 더 이상 멈출수가 없다. 지금 당장 십자가로 돌아가야 한다. 바로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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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phen55 2022-01-10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좌경화? 우경화 아닌가요?;
 
예언자적 상상력 - 구약연구시리즈 24
W.브루지만 지음, 김쾌상 옮김 / 대한기독교서회 / 1981년 11월
품절


오늘 우리들의 의식은 허위의식과 언어와 논리의 우상적 체계에 의해 물들어있다.-11쪽

이와같은 문화적응 현상을 빚어낸 내적인 원인은 우리가 신상의 전승을 버림으로써 우리의 주체성을 상실한 때문이다. 우리의 소비문화는 역사에 거슬러 조직화된 것이다. 기억을 얕잡아보고 희망을 우습게 여기는 것은 모든 것을 현재-그것이 코 앞의 현재이거나 영원한 현재이거나-에 붙박아 두는 것이다. 우리가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는 한, 모든 형태의 신앙상의 권위란 빛을 잃고, 우리의 신앙생활이나 목회라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12쪽

모세의 대항문화란 결핍된 세계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모든 군왕들이 항상 인식했듯이 이와 같은 의식에 대항 할 수 있는 단하나의 길은 포만이다. 포만한 상황에서 자유와 정의의 혁명을 지속시킨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44쪽

이스라엘 예언자의 특징적인 방식은 시와 서정이다. 모든 것을 실현 가능케 하는 이 왕권의식이 상상력을 위축시킨다. 따라서 전체 주의적 체제는 예외 없이 예술가를 두려워한다.-64쪽

따지고 보면 지배적인 현실에 도전하고 그와 맞서는 마지막 남겨진 길은 시적인 상상력이다. 지배적 현실은 어쩔 수 없이 산문적이다.-65쪽

이렇듯 현재의 질서의 지나친 권리주장은 희망없음을 전제로 한다. 실현된 종말론의 이 음험한 형태는 인간들로 하여 희망 없이 살 것을 요구한다.-94쪽

이 아픔을 느끼는 인간이 무감각해져 버린 예루살렘 한복판에 자리잡는다. 그리고 오로지 이 아픔만이 마침내 무감각 상태에 침투할 수 있다.-142쪽

예수가 여기서 선언한 희망은 무겁고 힘들다. 이 희망은 왕권의식에서 나온 값싸고 십자가 없는 희망과는 날카로운 대조를 이룬다. 이미 부요하고 배부르고 지금 웃어대는 사람들에게 희망은 안이하고 옅은 것이지만, 부를 거부당하고 배부름에서 차단되고 도대체 웃을 사연이 없는 사람들에게 희망은 힘든 것이다. 이러한 예언자적 동력화의 신기함은 그것이 바로 역사 없는 무인격들에겍 전해진다는 점에 있다. -1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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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 뜨거운 기억, 6월민주항쟁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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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어야 한다면.. 정말 슬픈일이다.  

난 이 책을 읽지 않았다. 또 읽지도 않을 것이다. 쓰디쓴 추억 때문에..  전라도가 고향인 내게 광주라는 말은 듣기만 해도 주체 할 수 없이 흥분된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신작로 위로 군인차들이 군인들을 싣고 어디론가 급히 가는 모습들을 자주 보았다. 어린 마음에 군인들이 지나가면 손을 흔들고 건빵을 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당시엔 그것이 추억인지 악몽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정확히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선생임께서 지금은 너희들에게 말해도 모르지만 나중에 반드시 밝혀질 날이 올 것이다라고 말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내가 이 말을 잊지 못하는 것은 정확하게 잘은 모르지만 선생님께서 사뭇 진지하고 무엇가에 극히 조심하는 말투 때문에 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광주항쟁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대학교를 다니면서 점차 알게되었다. 청문회 당시에도 난 광주사태의 심각성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광주항쟁을 하나하나 알아 가면서 피가 거꾸로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시에 갑자기 보이지 않던 형들이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 실종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직도 그 이야기는 많은 동네 어르신들에게 현재화된 악몽이다.  

임신한 아이들의 배가 갈라지고, 지나가는 여고생들을 머리채를 잡아 옷을 벗기고, 진압하는 전투경찰(특수부대들이었다.)들에게 마약을 투여하는 수다한 사실은 정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끓게했다.  

 

난 이책을 읽지 않을 것이다. 정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 쓰러질 것 같다.. 잊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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