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조금 알던 지인에게 전화가 왔다. 살갑지도 돈독하지도 않았던 사이이기에 의외였다. 그는 그냥 생각나서 전화했다며 이런 저런 얘기를 늘여 놓는다. 같은 반은 아니었지만 고등학교 동창이고 대학도 같이 나왔으니 그럴 수도 있다고 여겼다.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진 않았지만 나를 찾아준 고마움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내 일상이며 삶의 진행 방향 따위 말이다.

난 순진하게 정말 안부전화인 줄 알았다. 부러 사람의 말을 비틀어 들을 이유가 없기에 그렇다. 갑자기 그는 고등학교 때 우리반 담임 전화번호를 물었다. 순간, 이게 전화 용건이었구나 싶었다. 약간 섭섭하면서도 화가 났다. 지인이 사립고등학교 선생을 하려고 하는데 우리 담임 샘의 도움이 필요했나 보다. 번호를 모른다고 하니 그런 것도 모르냐며 타박을 가하더니 선소리만 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찜찜했다.

고 3때 담임선생님은 나를 무척 아꼈다. 공부를 잘해서만은 아니었다. 맹랑하면서도 또박또박 할 말을 하는 영특함 덕이었다. 한 때, 담임 샘은 우리 반 분위기를 쇄신하겠다며 단체 삭발을 명한 적이 있었다. 담임은 별명은 저승사자였다. 단순한 레토릭이 아니라 정말 그분은 화가 날 때면 아이들을 초주검으로 만들곤 했다. 다들 삭발을 할 수밖에 없다며 고개를 떨구었다. 허나 난 그 부당함을 참을 수 없었다. 배에 힘을 주고선 선생님께 따지러 갔다.

반장을 대동하고 갔지만 기실 말은 내가 다했다. 왜 삭발이 부당한지, 분위기 쇄신은커녕 사기저하를 낳는 다는 실효성 측면까지 이야기하며 꾸준히 선생님을 쏘아 붙였다. 옆에 있던 학주(학년주임)는 혀에 비단을 감았냐며 내 유려한 말솜씨를 칭찬했다. 덕분에 삭발은 면하게 됐지만 삭발령 전면 백지화는 불가능했다. 결국 단체로 스포츠머리를 한다는 타협점에 이르렀다. 단, 협상안을 도출한 나부터 머리를 짧게 깎아야 했다. 친구들은 그런 수정안이나마 다행이라 여겼고 담임 샘은 그 후로 나를 더더욱 아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후배들 앞에서 내 이야기를 하길 좋아하시며 나를 추어올리곤 한 덴다.

그런 보살핌과 기대가 묵직이 가슴을 누른 적이 몇 번 있었다. 세속적으로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그런 마음의 채찍질 말이다. 허나 세속적 출세를 바라기엔 그런 우직한 싸움을 하기 싫었고 나 자신을 돌아보는 공부에 탐닉했다. 덕분에 지금은 어디에도 적을 두지 않는 노마드가 되었다.

지인의 전화는 선생님의 기대를 저버렸다는 내 사소한 미안함을 건드렸다. 근 3년 만에 전화와선 제 잇속만 챙기고 냉큼 전화를 끊어버린 그 심상한 결례도 괘씸했다. 지인에게 우리 담임을 만나도 내 얘길 하지 말라는 문자를 보냈지만 10시간 째 답이 없다. 생각할수록 그 무례함이 언짢고 그의 전화를 선의로 해석했던 내 미욱함이 원망스럽다.

강준만은 ‘전화의 역사’에서 안부전화를 꾸준히 하는 건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수단이라 하였다. 소식도 없던 이가 제 앞가림이 급하여 정보만 캐내고 내빼는 전화를 받고 나니 그 말이 더 와 닿는다. 오히려 처음부터 용건을 직접 이야기했으면 어땠을까. 생각나서 전화했단 허울 좋은 겉치장이 아닐 날것의 언어 말이다. 게다가 내 근황을 알리지 말라는 문자에 회신이 없으니 그 겉치장이 더더욱 역겨워 보인다. 덕분에 내 노마드적인 삶에 대해 다시금 회의(懷疑)가 든다. 정겨운 추억이 현실을 초라하게 만드는 걸 보면 내 자존감은 그리 탄탄하지 않은가 보다. 오늘 밤은 어제보다 더욱 차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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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1-23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쓰시는 글 읽을 때마다 왠지 바밤바님의 모습을 마음속으로 그려보게 하는 것 같네요.
음.. 어쩌면 바밤바님의 음악이나 음반의 선호도도 예측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춥습니다. 건강하세요!!

바밤바 2010-01-23 17:39   좋아요 0 | URL
일기를 써서 그런거 같네요~ ㅎ
기분이 나쁘면 왜 나쁜지 글로 풀어내야 감정의 실체를 직시할 수 있는 듯하여 부지불식간에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ㅎ
오늘은 좀 따스하네요~ 바람결님 화이팅!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