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바람이 소슬해 질 때 쯤 나비도 잦아든다. 가을의 싸늘함을 나비가 견디기 쉽지 않아서일 테다. 일찍이 시인 김기림도 나비의 나약함을 시로 읊었다. ‘청무우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 어린 나래가 물결에 절어/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결국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승달이 시리게 된 까닭도 다 그 잔약함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정신만은 어기차다. 바다를 두려워하지 않는 그 정신.

 푸치니 또한 나비의 잔약함에 주목했다. 나비부인이란 오페라 제목에서 부서질 듯 여린 영혼을 상상하긴 어렵지 않다. 임 기다리다 배신을 당해 서글픔에 젖은 그녀는 천생 나비였다. 여투어 둔 정을 주체하지 못해 스스로를 버린 그 어기찬 결정도 나비를 떠올리게 한다. 푸치니의 선율에 나비부인의 곡진한 사연이 얹히면 마음이 쉬이 다습해진다. 눈물이 서린다.

 나비에겐 발랄한 이미지도 있다. 슈만은 그의 초기 피아노 소품에서 왈츠 풍의 경쾌한 나비를 들려준다. 대롱을 감빨며 하늘하늘 날갯짓 하는 나비가 슈만의 오선지 위에 팔랑인다. ‘나비야’라는 동요에서도 그런 발랄함을 엿볼 수 있다. 약하지만 어기차고 발랄하지만 한없이 나른한 게 나비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노자는 호접몽을 통해 나비의 몽환적 이미지를 그렸다. 조지훈은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접어 나빌레라’며 번뇌를 별빛처럼 여긴 해탈한 비구니에게 나비의 몸짓을 읽었다. 여기서 나빌레라는 ‘나비 같아라’라는 뜻이다. 서양에서도 나비의 이미지는 특별하다. 영혼을 뜻하는 프쉬케(psyche)는 그리스어로 나비란 뜻을 가지고 있다.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만들어 숨을 불어 넣을 때 지혜의 여신 아테나가 만든 나비가 인간의 콧구멍 속으로 들어갔다는 데서 연유한 뜻이다. 나비처럼 연약하지만 어기찬 면도 있는 사람의 영혼을 빗댄 것일 게다.

 이렇듯 나비에 대한 이미지는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건 희망의 나비다. 그리스 신화에서 에로스와 프쉬케의 사랑은 유명하다. 프쉬케는 에로스의 사랑을 의심하다 정인을 잃고 모진 고난을 겪는다. 하지만 결국 진실한 사랑인 에로스와 결혼하여 행복한 여생을 보낸다. 모든 고난을 이겨낸 행복한 프쉬케가 영혼과 나비란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나비가 애벌레 단계를 통과해 예쁜 날개를 가지듯 인간도 애벌레 때와 같은 고난을 통해 영혼의 성숙을 얻는다는 뜻일 게다. 소슬한 새벽바람에 마음이 시린 청춘은 나비 한 마리씩 가슴에 품을 일이다.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지 않나. 희붐하게 밝아오는 먼동이 나비의 꿈이 몽상이 아니라며 쳐진 어깨를 곧추 세워 줄 테다. 나비야 날아라.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09-07-23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니, 올리신 글이 지금 돌아가고 있는 시대의 상황과 전혀 무관하지 않게 들립니다. TV와 담쌓고 산지는 오래되었지만 들려오는 말만 들어도 몇몇 장면들은 정신을 아찔하게 합니다.
앞으로 대체 어떻게 되려는지..

마음이 어수선하니 훈훈한 글도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네요.

바밤바 2009-07-24 19:22   좋아요 0 | URL
추풍삭막한 계절이죠. 바람은 뜨겁지만 마음은 소슬하네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