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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자본발전사전>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반자본 발전사전 - 자본주의의 세계화 흐름을 뒤집는 19가지 개념
볼프강 작스 외 지음, 이희재 옮김 / 아카이브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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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반세기를 우리는 오직 발전, 개발, 성장만 외치며 살아왔다. 이와 반대되는 모든 개념은 악으로 치부하면서. 처음 목표는 국민소득 천 달러였다. 천 불 소득 백억 불 수출을 달성하면 어찌어찌 될 거라는 신동엽 화백의 그림 선전물은 정말 달콤했다.  

그리고 다음 목표가 정해졌다. 이번엔 만 달러였다. 만 달러만 넘어서면 선진국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런 목표가 제기될 당시 실제로 일본과 미국, 북유럽 선진국들의 국민소득은 대략 만 달러에서 2만 달러였던 것 같다. 

이제 2만 달러를 넘어섰지만, 소위 747 공약을 내걸고 4만 달러 시대를 열어야 비로소 선진국이 될 수 있다며 그렇게 만들겠다는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럼 4만 달러가 달성되면 이제 우리의 목표 갱신 행진은 그만 멈추어도 될까?  

천만에, 그 말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발전, 개발, 성장은 독이다. 치명적인 중독성을 가진 독. 개인의 행복과 자유, 평등하게 누릴 모든 권리를 박탈한 채 오로지 끝도 안 보이는 전진만을 강요하는 독인 것이다.  

이제 국가적 차원에서 벌어지던 이 발전에 대한 캠페인은 지역으로도 넘어왔다. 지방자치단체들은 너나없이 앞을 다투어 발전전략을 고민한다. 지자체들의 발전전략의 핵심은 개발이다. 바다를 메우거나 산을 깎아내고 거기에 공장을 짓는다. 

이렇게 해서 공장을 지어봐야 지역경제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아무리 외쳐봐야 발전의 종교적 신념에 포박된 관료들에겐 마이동풍이다. 그들은 이런 외침들을 그저 지역이기주의 내지는 대책 없는 진보주의자들의 반항 정도로만 치부한다. 

발전이라는 멈추지 않는 괴물은 20세기 말 자본주의의 위기를 맞아 퇴락할 듯이 보이기도 했지만, 세계화, 신자유주의란 이름으로 옷을 갈아입으며 오히려 그 명맥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한편으론 지구촌 전체로, 한편으론 작은 지역공동체까지 깊숙하게….  

발전은 말 그 자체로서는 부정하기 어려운 매력적인 이데올로기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이 함축된 개념이라고 말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발전의 이면에는 끝없는 임금착취와 빈부 격차, 자원의 고갈, 환경의 파괴, 문화의 학살이 필연적으로 뒤따른다.  

<반자본발전사전>은 바로 이런 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기 위해 엮은 책이다. 발전은 자본주의에서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사회주의에서도 역시 똑같은 문제다. 두 사회는 모두 화석연료에 입각하여 쌓아올린 공업문명의 막강한 생산력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앞에서 나는 발전이란 괴물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이 책의 저자 중 한 사람이며 엮은이인 볼프강 작스는 서문에서 발전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발전은 사회를 달래는 신화요, 욕망을 풀어놓는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작스는 발전은 결코 평등이니 공정이니 하는 신화를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단정한다. 남반구의 저개발국들이 발전을 통해 북반국의 선진국들처럼 되려고 했지만, 1960년대에 20배 더 잘 살았던 북반구 나라들이 그 차이를 1980년대엔 46배로 벌려놓았다는 것이다.  

이런 차이는 나라 안에서도 양극화란 이름으로 그대로 벌어진다. 나라는 전보다 잘 살게 됐는데 실질소득은 줄어들어 살기는 더 힘들어졌다고 불평하는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작스는 발전이 실패하는 것보다 성공하는 것이 더 무서울 수 있다고 경고한다.  

획일적인 삶과 의식이 다양성을 해치고 종잡기 어려운 미래를 우리에게 던져줄 것이라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완벽하게 이해하고 지지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공감은 가는 말이다. 지금은 누구나 승용차를 가져 편리해졌지만, 대신 많은 것을 잃었다.  

시내버스를 기다리며 부리던 여유, 생각에 빠져들 시간, 과도한 약속으로부터의 해방 같은 것들을 우리는 잃어버렸다. 스마트폰은 편리하지만 사람들을 더욱 꽁꽁 묶어놓는다. 개인의 자유를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보수든 진보든 발전(혹은 성장)을 약속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에서 이 책의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제 뭔가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해 고민할 때가 왔다는 것이다. 올바른 삶이란 어떤 건지, 진정한 행복이란 무언지, 무엇이 선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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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평전>을 읽고 리뷰를 남겨주세요
리영희 평전 - 시대를 밝힌 '사상의 은사'
김삼웅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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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 지식인들을 쁘띠부르주아의 범주에 포함시켰다. 그것은 사회를 자본과 노동의 계급투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는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가 많이 퇴색된 오늘날에도 여전히 부유하는 지식인들을 보면 매우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혹자는 지식인들을 일러 당대의 권력에 빌붙어 몇 자 익힌 지식을 팔아먹고 사는 배운 기생에 비유하기도 했다. 지식인을 형세에 따라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박쥐같은 부류로 폄하한 마르크스 자신도 실은 지식인이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긴 하지만, 그 말이 힘을 얻는 것은 슬프지만 현실이다.

'사상의 은사'란 고귀한 칭호로 불리는 이 시대의 진정한 스승


   
 
그러나 이 시대에 진정한 지식인으로서 ‘사상의 은사’란 가장 고귀한 칭호를 얻은 이가 있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리영희 선생이 그다. 선생의 사상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나는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다만, 어렴풋이 선생이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사회운동가였음은 알겠지만.

바로 그 선생의 평전이 나왔다. 살아온 역정이 고달팠던 만큼 매우 두텁다. 선생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군사정권 30년을 거치며 네 번이나 투옥됐다. 세 차례에 걸친 군사정권은 친절하게도 선생에게 영예로운 훈장을 수여하는데 빠지지 않고 동참했다.  

선생이 막 사회에 진출하던 시기는 한반도에 두 개의 태양이 떠있던 시기였다. 북쪽에는 김일성이란 태양이, 남쪽에는 이승만이란 태양이 서로 경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는 법, 그들은 어떻게든 상대를 거꾸러뜨리기 위해 혈투를 벌였다.

6.25동란 혹은 한국전쟁(일각에서는 민족해방전쟁으로 부르기도 한다)이란 열전이 끝나자 양쪽은 곧 냉전체제를 이용해 우상화를 시도했다. 장기집권음모가 노골화된 것이다. 북쪽도 그랬지만, 남쪽에서도 조봉암 선생이 이승만 일파에 의해 법살되는 등 비극이 잇따랐다.

리영희 선생이 본격적으로 이른바 반미의 길을 걷게 된 것은 박정희 정권에 저항하면서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원래 선생은 6.25가 발발하자 미군을 상대로 하는 통역장교에 자원하여 참전했으며 7년간의 복무 끝에 소령으로 예편했다. 그런 선생이 어쩌다가 철두철미 반미로 돌아섰을까?

반탁데모대에 가세했던 선생은 후일 이를 후회했다

아마도 숨겨진 미국의 추악한 실체를 보았기 때문인데, 어쩌면 그 공은 박정희 정권에 있었다. 해양대 학생이었던 1947년에 선생은 반탁데모대의 일원이었다. 후일 선생은 “이승만과 그 추종세력이 ‘반탁’의 여세를 몰아 민족분단, 단독정부 수립으로 민족의 열망을 악용할 줄은 몰랐다”고 회고했다.

“내가 존경하고 있던 김구 선생이 신탁통치의 성격을 이해하고 그것을 지지했더라면 나 역시 그랬을 것이다”라는 말로 선생은 아쉬움을 나타냈다. 해양대학에서 천문항법과 기상, 선박 운용실무, 출입항 사무 등을 공부하면서 치열한 당대의 정세 흐름을 간파하기엔 무리였을 것이다.

<리영희 평전>의 저자 김삼웅은 선생이 군에서 공로은성훈장을 받았지만 부실한 병사관리 탓으로 기재가 누락된 것을 두고 “그 사실이 기재돼 있었다면 어쩌면 그에 대한 군부독재정권의 탄압에 조금은 참작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리영희 선생 연보(백낙청, 정창렬 편, 두레)>의 글을 인용했는데, 과연 그럴까?

나의 부친도 6.25가 발발하자 즉각 입대하여 10년을 복무하고 세 개의 화랑은성무공훈장을 받았지만, 그 보답은 자식들 공부도 제대로 시키지 못하는 비참한 삶이었다. 아무튼, 선생은 젊어서부터 도덕심이 매우 투철했던 것 같다. 선생이 쓴 <분단을 넘어서>에 이런 일화가 나온다.

김삼웅의 표현대로라면 ‘숭고한 스캔들’이다. 지리산 공비 토벌작전이 끝나갈 무렵 연대장이 장교들을 위해 기생들이 나오는 소문난 술집에서 술판을 벌였다. 별로 술을 하지 않던 선생도 ‘논개의 후손들이 값싼 분내를 풍기며 따르는 술잔에 거나하게 취하자 제법 사내의 본성을 드러내는 시늉을 했다.’

젊은 시절 한때는 스캔들도 있었던 열혈남

요즘 말로 하자면 옆자리에 앉은 ‘논개’에게 2차를 가자고 약속을 했던 것인데, 나중에 보니 어느 틈엔가 그녀가 사라지고 없었던 것. 화가 난 선생은 그길로 운전병이 모는 지프를 타고 그녀의 집을 찾아갔는데, 한참만에야 나타나 오연하게 버티고 선 그녀를 보자 대뜸 권총을 뽑아 공중을 향해 발사했다.


   
▲ 부인과 나란히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 맨발이다. 이 사진이 가장 정겨웠다. 그러나 선생은 이 사진처럼 단란한 일상을 살지는 못했다.
총소리에 놀라 기겁한 ‘논개’가 허둥지둥 뛰어내려와 살려달라고 애원할 줄 알았건만 놀랍게도 툇마루에서 자세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그녀는 선생을 내려다보면서 오연히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그 모습에 선생은 오히려 기를 펴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젊은 장교님, 잘 들어두세요. 아무리 미천하고 힘없는 사람이라도 총으로 굴복시키려들지 마세요. 사람이란 마음이 감동하면 총소리 내지 않아도 따라갑니다. 당신도 차차 사람과 세상을 알게 될 겁니다. 돌아가세요. 언젠가 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 겁니다.”

“하찮게 보고 덤볐던 자신이 너무도 왜소해져, 자신의 전존재가 내면에서 산산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는 선생은 “맨손의 진정한 용자 앞에서 가장 비겁한 존재가 돼버린 권총 찬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 마음을 가다듬고 진심을 다하여 사죄한 다음, 깊은 절로 한 기생의 위대한 인격에 예의를 표시했다.”

그 기생도 대단하지만, 기생의 기개에 곧바로 잘못을 인정하고 고개를 숙일 줄 아는 선생이야말로 위대하지 않은가. 일개 기생의 위대한 인격에 깊은 절로 예의를 표시할 만한 위대한 인격을 가진 사람들이 과연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가.

외신부 기자가 되면서 진보적 세계관에 심취하다

동사무소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직원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해서 찾아가 행패를 부리는 시의원이나 자신이 추진하는 시책에 반대되는 의사표현을 한다고 해서 폭행을 하고 “너 같은 시민은 필요 없다”고 폭언을 하는 시장이 버젓이 큰소리치는 세상이다.

선생은 군복무를 마치고 해양대학(우수한 두뇌를 지녔던 선생이 국립해양대학을 택한 것은 순전히 가난 때문이었다)에 들어갈 때도 그랬던 것처럼 우연한 기회에 합동통신 기자 시험에 응모해 합격하게 된다. 영어와 불어, 일본어에 능했던 것이 다른 네 명의 서울대 출신들과 함께 꼴찌로 합격한 이유였다.

선생은 외신부에 배속됐는데, 이는 선생이 진보적인 세계관을 갖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듯하다. 외신기자로서 매일 하는 일은 세계 각국의 통신사로부터 들어오는 엄청난 분량의 기사를 취사선택해 번역하는 일이었다.

이 일은 선생으로 하여금 세계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피식민지 민족해방운동과 독립운동 그리고 민주화운동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선생은 나아가 필요한 지식을 얻기 위해 <경제학․철학 초고>나 <독일이데올로기> 등을 읽으면서 초기 마르크스의 휴머니즘에도 깊은 이해를 갖게 됐다.

중세 기독교시대의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진술을 하고 용서를 구걸하며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지만 리영희 선생은 끝끝내 자기 신념에 반하는 말이든 행동이든 한 바가 없으니 그 기개야말로 탄복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것이다.

'기개'란 정신으로부터 단련된 신념에서 나오는 것

도대체 그 기개는 어디서 나왔을까? 이 글의 초두에 지식인을 일러 이른바 기회주의자의 운명을 타고난 쁘띠부르주아란 말로 시작했지만, 어떤 폭압에도 굴하지 않는 기개는 바로 정신에서 나오는 것이요, 그 정신은 지식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리영희 선생에게 대학교수나 언론인 같은 지식인들은 비겁자였다. 특히 언론은 기회주의자의 전형이었다. 선생이 1993년 6월에 쓴 글을 보자. 거의 예언자의 수준이다. 이른바 3당 합당으로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자 “‘정권찬송가’를 합창하는 언론을 보고 비판한 글”을 간략하게 줄였다.

“언론들이란 무법적인 강한 정권엔 한없이 약하고 문치성 정부에는 폭력적으로 포악하다. 권력이 눈을 부라리면 두 손을 비벼가며 찬양하다가, 그토록 찬송을 바쳤던 권력이 기울기 시작하면 금세 안면을 바꾸고 누구보다 열렬히 비방과 매도를 일삼았다.”

이들 언론이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들어서자 ‘비판언론’이라는 미명으로 시퍼렇게 날을 세우다가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자 다시 ‘용비어천가 합창단’으로 변신한 수수보수언론의 행태를 내다보고 쓴 것과 같다”는 저자의 말이 하나 틀리지 않아 보인다.

6.25 발발 즉시 자진 입대하여 7년을 군에서 보낸 선생은 군의 부정부패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군은 어떤 집단보다도 푹 썩은 야만적인 집단이었던 것이다. 그런 선생에게 5.16쿠데타 세력이 개혁과 숙정을 들고 나온 것은 언어도단이었다.

박정희는 배신자에 기회주의자의 전형


   
▲ 결혼식 사진. 이때는 1957년 육군 대위 시절. 하숙집 아주머니의 소개로 결혼했다 한다.
특히 선생에게 천황 숭배자요 민족의 배반자에서 남로당에 들어가 공산주의자가 됐다가 다시 형세가 불리해지자 자신의 책임으로 관리하던 조직을 밀고하고 살아남은 철저한 기회주의자에 변절자인 박정희와의 싸움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10.26사태로 박정희가 피살됐다는 소식을 교도소에서 접한 선생이 한 일은 한바탕 눈물과 웃음으로 범벅이 된 채로 자신의 영치금을 털어 재소자들에게 김치를 돌리는 일이었다. 실로 선생의 당시 심경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일화가 아닌가.

<리영희 평전>은 6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이다. 책을 읽으며 저자 김삼웅의 선생을 존경하는 마음이 절절이 전해져 옴을 느꼈다. 선생의 모든 저작과 어록, 일화들을 이 잡듯 뒤지고 다닌 흔적이 역력하다. 그 파노라마가 읽혀진다. 그래서 지루하지 않다. 반세기전의 이야기도 오늘처럼 생생하다.

책의 가운데쯤 리영희 선생이 직접 소설체 형식으로 쓴 자신의 이야기가 나온다. <우상과 이성>으로 필화사건에 엮으려는 검사와 '리 교수'의 취조실 논쟁이다. 검사는 서울법대 출신임을 누누이 강조하면서 자신의 반공법 법리해석과 논리구성에 적이 만족해한다.

서울법대 출신의 무식한 검사와 취조실에서 논쟁하다

“음…, 리 교수 학력은 별거 아니구먼. 최종 대학이 국립해양대학이라. … 그것도 항해과인데,… 어떻게 사회평론이니 문명비판이니…, 게다가 당신의 말은 모두 궤변이에요…, 반성합니까?” 나중에 그 서울법대 출신의 검사는 압수한 서적 중 두툼한 일본어로 된 책을 내밀며 물었다.

“이건 뭐요? … <자본론>? 무슨 책이요? 저자가 누구지요?” 나는 이 대목에서 웃음이 나왔다. “저자가 누구냐니까? 내용이 뭐고?” 리 교수가 대답했다. “그거야… <바이블>이 어떤 책이냐고 묻는다거나 <훈민정음>을 누가 지었냐고 묻는 거나 다름이 없지 않겠어요?”

나는 정말 실소를 금할 수 없었는데 그때 정운찬 전 총리 생각이 났다. 그리고 김주완 기자(경남도민일보 편집국장)가 쓴 글 내용이 떠올랐다. “공부를 너무 많이 하면 머리가 나빠진다!” 정운찬 전 총리도 서울대 출신에 서울대 총장까지 지낸 사람이다.

그런 그는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마루타를 아느냐”는 질문에 “전쟁포로냐”고 되물었다가 “그럼 731부대를 아느냐”고 다시 질문하자 “항일독립군 아니냐”고 말해 망신을 산 적이 있다. 이게 정말 김주완 국장의 주장처럼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만들어진 에피소드일까?

누구보다 공부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리영희 선생의 경우는 그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마도 무엇을 위해, 어떤 자세와 가치관을 지니고 공부를 하는가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선생은 치열하게 공부하면서 늘 현장에서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살았다.

리영희는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 1960년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리영희 선생의 기고문
이승만 정권의 실상을 워싱턴포스트에 정기적으로 기고문을 보내 고발했으며, 4.19혁명 대열의 중심에 섰으며, 반독재투쟁의 일선에서 한 치도 비껴선 적이 없었다. 1989년에는 <한겨례> 창간기념으로 북한 취재기자단 방북을 기획한 혐의로 회갑의 나이에 네 번째 구속을 당했다.

바로 그 차이 아니겠는가? 전여옥이 그랬던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보고 대학도 못나온 사람이 대통령을 해서 되겠냐고. 그러고 보니 김대중 전 대통령도 대학을 못나왔다. 그럼 대학 나온 전여옥은 노무현이나 김대중 전 대통령보다 머리도 더 좋고 공부도 더 잘하나?

글쎄, 누가 이 말을 듣고 허무맹랑하다 하지 않겠는가. 리영희 선생은 수재였다. 그는 다만 어려운 시대를 살았으며 국비로 학비를 지원하던 해양대학을 선택했던 것이다. 항해과를 나온 ‘리 교수’보다도 인문학에 무지한 서울법대 출신의 검사, 둘 중에 누가 제대로 공부를 한 것일까?

이런 이야기들을 파노라마처럼 돌려볼 수 있는 <리영희 평전>,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 런닝셔츠 차림에 맨발로 마루에 앉아 아이를 안고 찍은 흑백 사진 속의 남자를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는 것은 즐겁다. 게다가 이 책에는 파란만장한 그의 일대기뿐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를 한눈에 읽을 수 있다.

나는 리영희 선생의 모든 것을 이해하지는 않는다. 몇 가지 점에서는 판단을 달리하는 부분도 분명히 있다. 특히 아직도 반미를 최고의 행동강령으로 생각하는 듯한 태도에는 정말 동의하기 어렵다. 고인이 되기 얼마 전 저자와 가진 인터뷰에서 한 말은 더욱 그렇다.

반미주의에 경도된 것은 선생이 처한 시대적 한계였을까?


   
▲ 저자 김상웅과 마지막 인터뷰 모습
“지금의 시기를 일제강제병탄 직전인 1905년으로 보는 거지. … 이명박 정권은 미국의 노예정권이야, 그것도 사상 최악의….”

물론 한미FTA, 전시작전권 반환 문제에 있어 분명 이명박 정권이 굴욕외교를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정권을 일거에 미국의 노예정권이라고 못 박을 수 있을까? 한때 카다피를 반미전선의 우상으로 치켜세우던 진보진영의 부끄러운 모습이 겹쳐보여 슬펐다.

지금 보라! 반미의 우상 카다피의 저 천인공노할 만행 앞에 누가 감히 나서서 규탄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선생이 반미의 시대를 살았던 것은 그의 탓이 아니다. 그는 그 시대에 그가 할 도리를 다했다. 선생이 살았던 시대는 일제와 미군정, 전쟁, 독재의 소용돌이였던 것이다.

흔히들 4.19세대니, 6.3세대니, 민청학련세대니, 386세대니 하고 이름들을 붙여 자화자찬하지만 변하지 않은 이가 몇이나 될까? 허니 선생의 이름 앞에 감히 고개 숙이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의 도리를 안다 하겠는가. 선생은 위대한 스승이었다. 적들에게마저도 존경받을, 혹은 받아야 할….

그러나 여전히 “오늘 이순간 선생께서 일어나셔서 리비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민중봉기를 보신다면 카다피를 보고 무슨 말씀을 하실까?” 하고 궁금해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나의 분파적 경향성 탓인가. 그럼에도 나의 궁금증은 멈추지 않는다. 선생에게 평생 최고의 가치는 인권이었기 때문이다.

위대한 휴머니스트는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게 철저하고 냉정하다는 것을 또한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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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주세요
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
아브람 노엄 촘스키.미셸 푸코 지음, 이종인 옮김 / 시대의창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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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와 푸코는 내개 어려웠다. 이들이 네덜란드에서 TV토론을 한 것이 1971년이라고 하니 나는 이때 글자도 해독하지 못한 초등학교 1년생이었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38년 전에 이들은 인간의 본성 문제를 놓고 격론을 벌였는데, 세월이 흘러 그 또래가 지난 딸을 둔 나는 아직도 이해하기 어렵다.

내가 이들의 토론을 접한 것은 물론 TV가 아니라 책이었다. 그들의 3시간에 걸친 토론을 가감 없이 묶은 책이 나왔던 것이다. <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 대중을 앞에 두고 벌인 토론이라 그렇게 전문적이거나 어려운 내용은 없었다. 서문이나 번역자 후기에서도 그렇게 말했지만, 그 말이 내겐 해당되지 않았다.

   
▲ 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시대의 창/이종인 옮김
결국 나는 이 책의 서평을 시간 내에 제출하지 못하는 불상사를 만들고야 말았는데, 알라딘으로부터 독촉을 받고는 다시금 책을 들었다. 그러나 결론은, “역시 어려워!”다. 두 사람의 토론에 사회를 맡은 엘더르스는 이들을 “전혀 다른 도구를 가지고 산의 정반대 방향에서 터널을 뚫어오는 사람”이라고 비유했지만, 그들이 들고 있는 도구부터가 이해되지 않았다.

“본능적인 지식, 제한된 정보로부터 고도로 복잡하고 조직된 지식을 이끌어내게 하는 도식 체계야말로 인간성을 구성하는 기본요소의 하나죠. 이것이 우리의 사회적‧지적‧개인적 행동을 인도한다고 보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인간 본성 개념입니다.” 촘스키는 인간의 본성을 도식체계의 덩어리로서 실존한다고 말한다.

이에 반해 푸코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식의 역사로 볼 때 인간성이라는 개념은 주로 인식론적 지표 구실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특정 유형의 담론이 신학, 생물학, 역사학 등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 혹은 갈등 관계를 맺는지 보여주는 지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성을 과학적 개념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것이 바로 엘더르스가 말한바 ‘산의 정반대 방향에서 터널을 뚫기 위해’ 이들이 들고 있는 도구다. 현재 미국 MIT대 명예교수로 있는 촘스키는 사회비판에 앞장서온 진보적 지식인으로 유명하다. 그는 특히 베트남전 등 미국의 대외정책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푸코 역시 평생을 노동자, 이민자, 동성애자 등 사회적 약자의 편에서 싸웠다.

푸코는 <광기의 역사>, <감시와 처벌> 등 명저를 남긴 프랑스의 지성이었으며 1984년 타계했다. 이들의 이력으로부터 엘더르스가 말한 산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은 유사한 목표와 가치를 갖고 있는 듯했다.  산이란 인간이다. 인간의 본성이란 동일한 주제에 대해 이들 두 학자는 정반대 방향에서 다른 도구를 들고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 노암 촘스키
그리고 이로부터 진정한 정의가 인간성의 바탕에 깔려있다고 생각하는 촘스키와 정의라는 것 자체가 인간의 발명품일 뿐이라고 규정하는 푸코의 열띤 토론이 전개된다. 촘스키와 푸코의 차이는 ‘정의’에 대한 논쟁에서 확연해진다. 푸코는 촘스키가 말하는 보편적 정의라는 관념을 이해할 수 없다.

푸코에게 정의란 어떤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계급이 만들어낸 지배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가령 그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를 타도하고 권력을 잡고자 하는 것도 권력의지일 뿐이지 정의와는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런 정당화를 내세우겠지만, 실제로는 정의보다 권력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정의에 대한 푸코의 생각은 전쟁에 대해서도 이어진다. “이기기 위해서 전쟁을 하는 거지 정의롭기 때문에 하는 게 아니라는 얘기죠.” 그러나 촘스키의 견해는 다르다. 그는 “가령 미국에서는 베트남으로 갈 탄약열차를 멈추게 하는 것을 시민의 불복종으로 규정하지만, 국가가 이런 결정을 내린 건 잘못”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합법적이고 정당하며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까요.” 촘스키에게 살인을 막기 위해 교통법규를 위반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건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가치 있는 행동으로서 인간 본성의 발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푸코는 계속해서 촘스키에게 더 나은 정의란 무엇인지, 그런 게 있다면 보여 달라고 주문한다.

만약 누구나 상식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더 나은 정의란 게 없다면 정의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것은 결국 특정한 계급적 입장에 근거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두 사람의 정의에 관한 태도가 이렇게 확연히 갈리는 것은 두 사람이 지닌 도구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언어학과 역사학을 주요 관심사로 다루는 두 철학자의 차이.

인간 정신이 가진 내재적 특성으로 인해 어떤 정의가 다른 정의보다 더 낫다고 판단할 수 있다고 보는 촘스키도 그러나 푸코의 주문에 대해 명확한 해답을 내놓지는 못했다. 이 부분을 토론할 때 두 사람은 자기 견해를 이해시키기 위해, 혹은 상대의 견해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분주하게 모색하는 모습을 보였다. 떠듬거리면서….

(푸코) 제 질문은 이런 것입니다. 당신이 분명 불법적인 행동을 저지를 때…….
(촘스키) ……국가가 아니라 내가 불법으로 생각하는 행동을 저지를 때.
(푸코) 아니, 아니, 국가의…….
(촘스키) ……그럼 국가가 불법으로 여기는…….
(푸코) ……그래요, 국가가 불법으로 여기는 행동을 할 때, 당신은 정의라는 이상을 위해 그 행동을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것이 계급투쟁에 유익하고 필요하기 때문입니까? 그러니까 이상적인 정의를 더 중시하는 겁니까, 그게 제가 알고 싶은 겁니다.
(촘스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저는 국가가 불법으로 판정하는 행동을 하면서 실은 그것이 합법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저는 국가 쪽이 범법을 저지르고 있다고 보는 겁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 그것은 사실이….

   
▲ 미셸 푸코
두 사람의 토론은 계속된다. 세 시간으로 이들이 지닌 사상의 정수를 모두 섭렵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나 이 정도만으로도 인간 본성과 같은 추상적 물음에 대한 서로 다른 개념 정립이 얼마나 큰 실천적 차이를 가져올 수 있는지 잘 보여준 토론이었다. 마치 지상에서 1 미크론의 차이가 먼 우주에서는 몇 십억 광년의 차이가 될 수 있다는 자연과학적 진리처럼.

사회를 보던 엘더르스가 푸코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당신은 왜 정치에 관심이 많은지 물어보겠습니다. 제게 철학보다 정치에 더 관심이 많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러자 푸코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되묻겠습니다. 왜 제가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말아야 하나요? 정치는 우리 일상생활에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왜 정치에 관심이 많으냐는 질문에 답변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왜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말아야 하느냐고 반문하고 싶습니다. 정치에 관심 없는 것, 그거야말로 문제죠” 하고 말한 푸코는 “그러니 저한테 그런 질문하지 말고, 정치에 관심 없는 사람에게 ‘젠장, 어째서 당신은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거요?” 하고 물어야한다고 한 답변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푸코가 보기에 교육제도는 지식 전파가 주된 임무처럼 보이지만, 다른 사회적 계급에게 권력이 넘어가지 않고 특정 사회적 계급이 계속 집권하는데 봉사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의료기관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겉으로는 중립적이고 독립적인 듯한 이런 기관들의 행태를 비판하고 폭로하면서 맞서 투쟁하는 것이 중요한 정치적 과제다.

이런 지점에 대해선 촘스키도 견해가 같았다. 촘스키는 푸코가 말한 “왜 제가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말아야 하나요?”란 되물음을 온몸으로 실천을 통해 보여준 지식인이다. 인간 본성에 대한 확신은 정의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방청객 중에 촘스키에게 “당신이 MIT에 재직하는 것은 그들에게 깨끗한 양심을 부여해주는 셈” 아니냔 비판적 질문을 던졌다.

촘스키의 답변은 좀 궁색했다. “글쎄요. 제 존재가 그만큼이나 될까요? MIT가 (군용무기 연구) 기관으로 활동하는데 반대하여 학생들이 시위를 벌일 때 도움이 되려고 애씁니다만, 제가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제가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경우가 다를지는 모르겠는데, 이런 편견과 오해는 우리 주변에서도 가끔 만날 수 있다. 예를 들면 삼성그룹의 비리를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의 경우도 그렇다. 그는 원래 삼성의 컨트롤 타워로 알려진 전략기획실의 법무팀장이었다. 그렇다고 “너는 그럼 왜 거기서 잘 먹고 잘 살았냐”고 따지는 사람들이 일부지만 있었던 것이다.

내 주변엔 4대강 사업에 발주를 받아 공사를 하는 건설업체의 임원이 한사람 있다. 그는 그러면서도 4대강 사업에 반대하는 시위나 집회에 빠지지 않고 동참하려는 열의를 가진 사람이다. 그는 매우 아름다운 생각을 가졌지만 그의 직업은 생각과는 반대로 그 아름다움을 파괴하는 일이다. 아이러니지만,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고 또 이해해야만 한다.

   
▲ KBS는 그야말로 어느날 갑자기 <TV 책을 말하다>를 폐지해버렸다.

어렵다고 하면서도 서평이 길어졌다. 일부러 두 사람의 발언을 많이 인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어렵다. 왜 그럴까? 내가 공부가 부족해서? 그런 탓도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철학적 사변에 약한 것은 어쩔 수 없는 나의 한계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으면서 참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이 토론이 네덜란드란 유럽의 어느 한 귀퉁이에 있는 나라에서 1971년에 벌어졌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해보라. 그리고 사회자 엘더르스가 토론회를 시작할 때 첫 멘트를 살펴보자. “신사 숙녀 여러분, <국제 철학자 프로젝트>의 세 번째 토론에 참석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부럽지 않은가?

내가 이렇게 쉽게 대화체 그대로 펴낸 책도 어렵다고 엄살을 피우는 것이 실은 책을 보는 내내 느꼈던 ‘왜 우리나라에선 이런 고급스런 토론 프로그램이 없는 것일까?’ 하는 부러움과 맞닿아있었다. 다음에 든 생각은 이것. ‘하긴 <TV 책을 말하다> 같은 프로그램도 이해하지 못할 이유로 폐지되는 나라이니.’

<TV 책을 말하다>가 폐지된 이유가 뭐라고 했더라? 김미화가 너무 미워서 그랬다나, 어쨌다나? 그런 소문이 사실이었을까? TV를 특별히 즐기는 내가 가장 아끼는 프로그램 중에 하나가 <풍경이 있는 여행>과 <TV 책을 말하다>였는데, 무척 아쉬운 일이었다. 아무튼, 책을 읽는 내내 부러우면서 한편 화가 났다.

“젠장, 어째서 우리나라엔 이런 프로그램 하나 없다는 거요?” 

* 이 글은 인터넷언론 <100인닷컴>(100in.com)에도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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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집권플랜>을 읽고 리뷰를 남겨주세요
진보집권플랜 - 오연호가 묻고 조국이 답하다
조국.오연호 지음 / 오마이북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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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사람답게 살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사실 정확하게 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면 어떨까요? “우리는 제대로 놀고 있는가?” 이 질문은 그리 어려운 질문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 난처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려서부터 노는 것을 악덕으로 생각해왔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즐겨 들을 수 있었던 전통 노래 가락 중에 이런 가사가 있었습니다. “노새 노새 젊어서 노새 늙어지면 못노나니….” 근면성실을 강조했던 시대에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노래였습니다.  

근면, 자조, 협동을 기치로 내건 유신 깃발 아래 일치단결해야한다고 교육받던 시대에도 어른들은 흥에 겨워 이 노래를 즐겨 불렀습니다. 그때는 이해 안 되던 젊어서 놀라는 그 가사가 그러나 이제 와서 새삼 새롭게 느껴집니다. “그래, 맞다” 하고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지금 사람답게 살고 있는가?”라는 물음이 “우리는 제대로 놀고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바뀐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을 뿐 아니라 바로 핵심을 찔렀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 <경남도민일보> 김주완 편집국장이 이런 제목의 칼럼을 썼습니다. “올해는 신나게 놀기로 했습니다.” 그는 평생 신년계획이란 걸 세워본 적이 없으며 그건 달력을 사람이 편리를 위해 만든 숫자일 뿐이라 생각하는 일종의 철학 때문이라고 했는데, 올해는 비장한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아마도 이는 그가 이제 평기자가 아니라 편집국장이 되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아침형 인간에 대해서도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교수의 말을 인용해 비판의 메스를 댔습니다. “아침형 인간은 오후가 되면 집중력이 떨어져 오히려 생산성이 떨어진다.”

그는 특히 신문사처럼 기획력과 창의력이 요구되는 조직에서 ‘근면․성실’은 정말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지식기반사회로 진화한 우리사회에 요구되는 핵심원리는 ‘근면․성실’이 아니라 ‘재미’라고 그는 외칩니다. 그리고 결심했다는 것입니다. “나부터 잘 놀자.”

“우선 나부터 올해는 휴가를 팍팍 쓸 예정이다. 벳푸온천도 가서 놀고, 앙코르와트 구경도 다녀와야겠다. 그리고 기자들의 휴가계에 서명할 때 만면에 웃음을 띠는 연습부터 해야겠다. 그러기 위해선 나부터 즐거워야 하지 않겠는가.”

요즘 차세대 리더로 부상하고 있는 조국 교수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기자와 대담형식으로 펴낸 책 <진보집권플랜>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실 우리사회에는 아이건 어른이건 ‘노는 권리’가 필요해요. 러셀의 표현을 빌리자면,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 필요합니다.”

조국 교수에 의하면 한국인들은 일 중독 상태에 빠져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짧은 시간에 자극적인 방법으로 놀 거리를 찾게 되고, ‘자기 파괴적 놀이’에 빠져든다는 것입니다. “직장일이 고되니까 후딱 폭탄주 마셔서 취하고, 노래방에 가서 악쓰고 노래하고 귀가해 토하고 뻗어버리는 식으로 카타라시스를 추구하고 있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에 대해 그도 김주완 국장과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전 사회적으로 ‘연차휴가 다 쓰기 운동’을 벌여야 합니다. <오마이뉴스> 등 언론에서 이런 운동을 해야 합니다. 법정공휴일이 주말과 겹치면 다음날을 대체공휴일로 지정해 쉬어야 합니다.”

‘대체공휴일’ 법안은 한나라당 윤상현 의원이 낸 법안 중 일부인데 조국 교수는 거기에 100% 찬성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또 문국현 씨가 유한킴벌리에서 실험했던 ‘4조 2교대’를 포스코 계열 철강재 포장업체인 삼정피앤에이가 이어받았는데 주목할 만한 제도라고 칭찬했습니다.

“기업인들은 아직도 컨베이어벨트만 빨리 돌리면 생산성이 높아진다는 포드주의나 도요타주의에 빠져있죠. 이런 생각이 박정희식 경제모델의 기본발상이었어요.” 이런 문화에서는 ‘노는 권리’의 중요성도 알 수 없고, 관광산업이나 여가산업의 발달과 새로운 고용창출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오연호 대표기자가 “앞으로 진보․개혁 진영에서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은 아예 공약으로 ‘나는 법정휴가를 다 쓰겠다고 밝히는 것이 어떨까요?”라고 하자 조국 교수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국민들에게 노는 권리를 찾아주는 상징적인 공약이 될 수 있겠죠.”

오연호 대표기자는 이 질문을 하기 전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읽었다는 책으로 유명한 <유러피언 드림>을 잠깐 언급했습니다. 제러미 리프킨은 이 책에서 미국과 프랑스의 노동시간 대비 생산효율성을 잘 비교해놓았는데, 놀랍게도 프랑스가 더 높다는 것입니다.

미국에 비해 프랑스가 노동시간이 훨씬 짧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물론 조선, 중앙, 동아일보 같은 보수언론들은 그래서 프랑스가 미국보다 형편이 어려운 거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음), 그걸 믿을 바보는 아무도 없을 겁니다.

아무튼, <오연호가 묻고 조국이 답하다, 진보집권플랜>은 “우리는 지금 사람답게 살고 있는가?”란 물음과 “우리는 제대로 놀고 있는가?”란 두 가지의 그러나 동일한 질문에 대하여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습니다. 요즘처럼 ‘복지’란 말이 난무하는 시대에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해보는 것이 그리 국익에 반하는 일도 아닐 것입니다.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도 그랬다고 합니다. “나의 아버지(박정희)가 꿈꾸던 나라는 복지국가였다.” 이제 바야흐로 보수정당의 리더도 복지에 대해 말을 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그런데 박근혜 전 대표는 복지가 무슨 뜻인지 알고나 그런 말을 썼을지 그게 궁금합니다. 무상급식을 망국적 포퓰리즘이라 말하는 정당의 대표였으니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연호 대표기자가 조국 교수에게 한 질문을 그녀에게 던져보고 싶습니다. “우리 국민들은 지금 사람답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국민들은 제대로 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이건 어떻습니까? 우리 국민들은 제대로 노는 방법이나 안다고 생각하십니까?” 

※ 이 글은 인터넷언론 <100인닷컴>과 블로그 <파비의 칼라테레비>에도 함께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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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도덕인가>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왜 도덕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진환.이수경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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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수 한나라당 대표가 오늘 대국민 사과했다. 허리를 90도로 굽혔다. 그러나 그의 사과는 진짜 자연산일까 하는 비아냥거림만 들릴 뿐 아무도 그 진정성을 믿지 않으려는 분위기다. 국민들의 반응은 냉담하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안상수. 그래도 한나라당 내에선 나름대로 괜찮은 인물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한나라당에서 입지를 다지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온 결과가 오늘날의 안상수를 만들게 된 것일까. 사람이 갈수록 이상해지는 분위기다. 하긴 그렇다.  

김문수도 그렇고 이재오도 그렇고 한나라당에 들어가 이상해지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들이 과거에 내세웠던 가치는 쓰레기통에 내던져졌다. 사실 어떻게 보면 안상수 대표로선 억울할 수도 있겠다. 불과 얼마 전에 이명박 대통령도 후보 시절 마사지 발언을 한 적이 있었다. 

“못생긴 여자가 서비스는 더 좋은 법이야!” 다년간의 경험에 따른 것으로 보이는 이 희한한 논리는 사람들의 분노를 샀다. 여기서 못생긴 여자가 왜 더 서비스가 좋다는 것인지에 대해선 구태여 설명할 필요는 느끼지 않는다. 

당시 이명박 후보의 발언 의도를 웬만한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다 이해하니 말이다. BBK 의혹, 성 비하 발언 등 온갖 악재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후보는 압도적인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이를 두고 우리 국민은 한 나라의 대통령을 뽑는데 도덕적 기준 따위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자조하는 이도 있었다. 그래서였던지 이후에도 이런 류의 성희롱, 성폭력 사건은 정치권에서 심심찮게 일어났다. 

불과 얼마 전엔 한나라당의 강모 의원은 대통령이 예쁜 여대생을 밝힌다는 투의 실언을 해 파문이 일기도 했다. 일각에선 그의 실언은 실언이 아니라 일상적인 사고 수준의 표출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이 보기에 실상 그런 정도의 발언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사모님만 안 계셨으면 바로 너 전번 땄을 거야.” 어쩌면 그건 강모 의원의 진심이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사실일 수도 있다. 그는 이 대통령이 불과 2년 전에 한 발언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마사지 업소에선) 못생긴 여자가 더 서비스가 좋은 법이야!” 

그는 대통령이나 여당인사들, 기업가들과 같은 계급에 속한 구성원으로서 대통령을 너무나 잘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강모 의원이나 안상수 대표나 억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왜 다들 나만 갖고 그러는 거야!” 

실로 도덕 타락의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이클 샌델의 책 제목처럼 <왜 도덕인가?>라고 물어본다는 자체가 실은 난센스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도덕이란 낱말이 어색하게 느껴진다. 도덕? 그런 것이 우리 사회에 존재하기나 한 것일까? 

어느 기업체 사장은 상습적으로 직원을 폭행하고 심지어 소위 기합이라 불리는 체벌까지 자행했다고 한다. SK그룹 최태원 회장의 사촌동생이라는 그는 이른바 ‘맷값폭행’이라 불리는 엽기적 행각을 벌였다가 결국 구속됐다. 

그 이전엔 한화그룹의 김승연 회장이 아들의 폭행사건에 개입해 조폭들을 동원해 야구방망이로 직접 폭력을 행사하다가 구속되기도 했었다. 얼마 전에 그의 나머지 아들도 폭행을 행사하므로써 부자들이 모두 폭행사건에 연루되는 진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몇 년 전에는 한나라당 국방위 소속의 송영선 의원과 공성진 의원이 해병대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다 카메라가 들이닥치자 남자화장실에 두 남녀가 함께 들어가 2시간 넘게 버티는 웃지 못 할 사건을 연출하기도 했다. 

송영선 의원은 지금도 버젓이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 전쟁불사를 외친다. 그런 그녀를 보면 인간의 가장 밑바닥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마음이 착잡하다. 체중 미달로 군대에 가지 않은 건강한 두 아들을 가진 어느 정당의 대표님도 여전히 강경대응, 전쟁불사를 외치긴 마찬가지다. 

나라 전체가 코미디다. 이런 나라에 살면서 도덕을 말한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이긴 한 것일까. 21세기 미국의 유권자들이 투표할 때 가장 큰 비중을 둔 것이 도덕적 가치였다는 마이클 샌델의 말은 그래서 너무나 부럽다. 

이런 마당에 경제적 도덕이니 사회적 도덕이니 하는 말들이 너무나 멀게만 느껴진다. 공공서비스니 온실가스배출이니 공정한 법 집행이니 시장논리가 공교육을 후퇴시킨다느니 하는 도덕적 가치에 대한 논의들이 너무나 공허하게 느껴진다. 

온갖 복지 예산들을 다 삭감시켜놓고 우리나라 복지가 유럽 선진국보다 낫다고 버젓이 언론에 나와 말하는 대통령의 거짓말을 보면서 우리나라에 도덕이란 가치가 존재하기는 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만약 그런 게 있다면 국민들이 가만히 있었을까? 

일국의 대통령이 이런 말 같지도 않은 거짓말을 버젓이 할 수 있는 나라에서 공정한 분배를 논하고 모두를 위한 경제정책을 논하고 진정으로 도덕적 가치가 관통하는 공동체를 추구한다는 것이 과연 가당키나 한 것일까. 

그래서 <왜 도덕인가?>에 등장하는 풍부한 주제들에 대한 논의를 보는 것만으로 부럽다. 아직도 우리는 “의무교육을 하면서 왜 아이들에게 무상으로 급식까지 해야 하는가” 하고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왜 도덕인가?’ 하고 말하는 것은 마치 돼지에게 진주목걸이를 던져주는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는 슬픔이 밀려든다. 그러고 보니 이명박 대통령도 마이크 샌델이 이 책 전에 쓴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었다고 했던가. 

그럼에도 역시 ‘왜 도덕인가?’가 우리 사회에서도 화두가 되어야 함은 너무도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래도 우리는 함께 살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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