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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평전 - 시대를 밝힌 '사상의 은사'
김삼웅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마르크스는 지식인들을 쁘띠부르주아의 범주에 포함시켰다. 그것은 사회를 자본과 노동의 계급투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는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가 많이 퇴색된 오늘날에도 여전히 부유하는 지식인들을 보면 매우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혹자는 지식인들을 일러 당대의 권력에 빌붙어 몇 자 익힌 지식을 팔아먹고 사는 배운 기생에 비유하기도 했다. 지식인을 형세에 따라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박쥐같은 부류로 폄하한 마르크스 자신도 실은 지식인이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긴 하지만, 그 말이 힘을 얻는 것은 슬프지만 현실이다.

'사상의 은사'란 고귀한 칭호로 불리는 이 시대의 진정한 스승


   
 
그러나 이 시대에 진정한 지식인으로서 ‘사상의 은사’란 가장 고귀한 칭호를 얻은 이가 있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리영희 선생이 그다. 선생의 사상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나는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다만, 어렴풋이 선생이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사회운동가였음은 알겠지만.

바로 그 선생의 평전이 나왔다. 살아온 역정이 고달팠던 만큼 매우 두텁다. 선생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군사정권 30년을 거치며 네 번이나 투옥됐다. 세 차례에 걸친 군사정권은 친절하게도 선생에게 영예로운 훈장을 수여하는데 빠지지 않고 동참했다.  

선생이 막 사회에 진출하던 시기는 한반도에 두 개의 태양이 떠있던 시기였다. 북쪽에는 김일성이란 태양이, 남쪽에는 이승만이란 태양이 서로 경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는 법, 그들은 어떻게든 상대를 거꾸러뜨리기 위해 혈투를 벌였다.

6.25동란 혹은 한국전쟁(일각에서는 민족해방전쟁으로 부르기도 한다)이란 열전이 끝나자 양쪽은 곧 냉전체제를 이용해 우상화를 시도했다. 장기집권음모가 노골화된 것이다. 북쪽도 그랬지만, 남쪽에서도 조봉암 선생이 이승만 일파에 의해 법살되는 등 비극이 잇따랐다.

리영희 선생이 본격적으로 이른바 반미의 길을 걷게 된 것은 박정희 정권에 저항하면서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원래 선생은 6.25가 발발하자 미군을 상대로 하는 통역장교에 자원하여 참전했으며 7년간의 복무 끝에 소령으로 예편했다. 그런 선생이 어쩌다가 철두철미 반미로 돌아섰을까?

반탁데모대에 가세했던 선생은 후일 이를 후회했다

아마도 숨겨진 미국의 추악한 실체를 보았기 때문인데, 어쩌면 그 공은 박정희 정권에 있었다. 해양대 학생이었던 1947년에 선생은 반탁데모대의 일원이었다. 후일 선생은 “이승만과 그 추종세력이 ‘반탁’의 여세를 몰아 민족분단, 단독정부 수립으로 민족의 열망을 악용할 줄은 몰랐다”고 회고했다.

“내가 존경하고 있던 김구 선생이 신탁통치의 성격을 이해하고 그것을 지지했더라면 나 역시 그랬을 것이다”라는 말로 선생은 아쉬움을 나타냈다. 해양대학에서 천문항법과 기상, 선박 운용실무, 출입항 사무 등을 공부하면서 치열한 당대의 정세 흐름을 간파하기엔 무리였을 것이다.

<리영희 평전>의 저자 김삼웅은 선생이 군에서 공로은성훈장을 받았지만 부실한 병사관리 탓으로 기재가 누락된 것을 두고 “그 사실이 기재돼 있었다면 어쩌면 그에 대한 군부독재정권의 탄압에 조금은 참작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리영희 선생 연보(백낙청, 정창렬 편, 두레)>의 글을 인용했는데, 과연 그럴까?

나의 부친도 6.25가 발발하자 즉각 입대하여 10년을 복무하고 세 개의 화랑은성무공훈장을 받았지만, 그 보답은 자식들 공부도 제대로 시키지 못하는 비참한 삶이었다. 아무튼, 선생은 젊어서부터 도덕심이 매우 투철했던 것 같다. 선생이 쓴 <분단을 넘어서>에 이런 일화가 나온다.

김삼웅의 표현대로라면 ‘숭고한 스캔들’이다. 지리산 공비 토벌작전이 끝나갈 무렵 연대장이 장교들을 위해 기생들이 나오는 소문난 술집에서 술판을 벌였다. 별로 술을 하지 않던 선생도 ‘논개의 후손들이 값싼 분내를 풍기며 따르는 술잔에 거나하게 취하자 제법 사내의 본성을 드러내는 시늉을 했다.’

젊은 시절 한때는 스캔들도 있었던 열혈남

요즘 말로 하자면 옆자리에 앉은 ‘논개’에게 2차를 가자고 약속을 했던 것인데, 나중에 보니 어느 틈엔가 그녀가 사라지고 없었던 것. 화가 난 선생은 그길로 운전병이 모는 지프를 타고 그녀의 집을 찾아갔는데, 한참만에야 나타나 오연하게 버티고 선 그녀를 보자 대뜸 권총을 뽑아 공중을 향해 발사했다.


   
▲ 부인과 나란히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 맨발이다. 이 사진이 가장 정겨웠다. 그러나 선생은 이 사진처럼 단란한 일상을 살지는 못했다.
총소리에 놀라 기겁한 ‘논개’가 허둥지둥 뛰어내려와 살려달라고 애원할 줄 알았건만 놀랍게도 툇마루에서 자세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그녀는 선생을 내려다보면서 오연히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그 모습에 선생은 오히려 기를 펴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젊은 장교님, 잘 들어두세요. 아무리 미천하고 힘없는 사람이라도 총으로 굴복시키려들지 마세요. 사람이란 마음이 감동하면 총소리 내지 않아도 따라갑니다. 당신도 차차 사람과 세상을 알게 될 겁니다. 돌아가세요. 언젠가 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 겁니다.”

“하찮게 보고 덤볐던 자신이 너무도 왜소해져, 자신의 전존재가 내면에서 산산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는 선생은 “맨손의 진정한 용자 앞에서 가장 비겁한 존재가 돼버린 권총 찬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 마음을 가다듬고 진심을 다하여 사죄한 다음, 깊은 절로 한 기생의 위대한 인격에 예의를 표시했다.”

그 기생도 대단하지만, 기생의 기개에 곧바로 잘못을 인정하고 고개를 숙일 줄 아는 선생이야말로 위대하지 않은가. 일개 기생의 위대한 인격에 깊은 절로 예의를 표시할 만한 위대한 인격을 가진 사람들이 과연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가.

외신부 기자가 되면서 진보적 세계관에 심취하다

동사무소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직원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해서 찾아가 행패를 부리는 시의원이나 자신이 추진하는 시책에 반대되는 의사표현을 한다고 해서 폭행을 하고 “너 같은 시민은 필요 없다”고 폭언을 하는 시장이 버젓이 큰소리치는 세상이다.

선생은 군복무를 마치고 해양대학(우수한 두뇌를 지녔던 선생이 국립해양대학을 택한 것은 순전히 가난 때문이었다)에 들어갈 때도 그랬던 것처럼 우연한 기회에 합동통신 기자 시험에 응모해 합격하게 된다. 영어와 불어, 일본어에 능했던 것이 다른 네 명의 서울대 출신들과 함께 꼴찌로 합격한 이유였다.

선생은 외신부에 배속됐는데, 이는 선생이 진보적인 세계관을 갖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듯하다. 외신기자로서 매일 하는 일은 세계 각국의 통신사로부터 들어오는 엄청난 분량의 기사를 취사선택해 번역하는 일이었다.

이 일은 선생으로 하여금 세계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피식민지 민족해방운동과 독립운동 그리고 민주화운동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선생은 나아가 필요한 지식을 얻기 위해 <경제학․철학 초고>나 <독일이데올로기> 등을 읽으면서 초기 마르크스의 휴머니즘에도 깊은 이해를 갖게 됐다.

중세 기독교시대의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진술을 하고 용서를 구걸하며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지만 리영희 선생은 끝끝내 자기 신념에 반하는 말이든 행동이든 한 바가 없으니 그 기개야말로 탄복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것이다.

'기개'란 정신으로부터 단련된 신념에서 나오는 것

도대체 그 기개는 어디서 나왔을까? 이 글의 초두에 지식인을 일러 이른바 기회주의자의 운명을 타고난 쁘띠부르주아란 말로 시작했지만, 어떤 폭압에도 굴하지 않는 기개는 바로 정신에서 나오는 것이요, 그 정신은 지식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리영희 선생에게 대학교수나 언론인 같은 지식인들은 비겁자였다. 특히 언론은 기회주의자의 전형이었다. 선생이 1993년 6월에 쓴 글을 보자. 거의 예언자의 수준이다. 이른바 3당 합당으로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자 “‘정권찬송가’를 합창하는 언론을 보고 비판한 글”을 간략하게 줄였다.

“언론들이란 무법적인 강한 정권엔 한없이 약하고 문치성 정부에는 폭력적으로 포악하다. 권력이 눈을 부라리면 두 손을 비벼가며 찬양하다가, 그토록 찬송을 바쳤던 권력이 기울기 시작하면 금세 안면을 바꾸고 누구보다 열렬히 비방과 매도를 일삼았다.”

이들 언론이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들어서자 ‘비판언론’이라는 미명으로 시퍼렇게 날을 세우다가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자 다시 ‘용비어천가 합창단’으로 변신한 수수보수언론의 행태를 내다보고 쓴 것과 같다”는 저자의 말이 하나 틀리지 않아 보인다.

6.25 발발 즉시 자진 입대하여 7년을 군에서 보낸 선생은 군의 부정부패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군은 어떤 집단보다도 푹 썩은 야만적인 집단이었던 것이다. 그런 선생에게 5.16쿠데타 세력이 개혁과 숙정을 들고 나온 것은 언어도단이었다.

박정희는 배신자에 기회주의자의 전형


   
▲ 결혼식 사진. 이때는 1957년 육군 대위 시절. 하숙집 아주머니의 소개로 결혼했다 한다.
특히 선생에게 천황 숭배자요 민족의 배반자에서 남로당에 들어가 공산주의자가 됐다가 다시 형세가 불리해지자 자신의 책임으로 관리하던 조직을 밀고하고 살아남은 철저한 기회주의자에 변절자인 박정희와의 싸움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10.26사태로 박정희가 피살됐다는 소식을 교도소에서 접한 선생이 한 일은 한바탕 눈물과 웃음으로 범벅이 된 채로 자신의 영치금을 털어 재소자들에게 김치를 돌리는 일이었다. 실로 선생의 당시 심경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일화가 아닌가.

<리영희 평전>은 6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이다. 책을 읽으며 저자 김삼웅의 선생을 존경하는 마음이 절절이 전해져 옴을 느꼈다. 선생의 모든 저작과 어록, 일화들을 이 잡듯 뒤지고 다닌 흔적이 역력하다. 그 파노라마가 읽혀진다. 그래서 지루하지 않다. 반세기전의 이야기도 오늘처럼 생생하다.

책의 가운데쯤 리영희 선생이 직접 소설체 형식으로 쓴 자신의 이야기가 나온다. <우상과 이성>으로 필화사건에 엮으려는 검사와 '리 교수'의 취조실 논쟁이다. 검사는 서울법대 출신임을 누누이 강조하면서 자신의 반공법 법리해석과 논리구성에 적이 만족해한다.

서울법대 출신의 무식한 검사와 취조실에서 논쟁하다

“음…, 리 교수 학력은 별거 아니구먼. 최종 대학이 국립해양대학이라. … 그것도 항해과인데,… 어떻게 사회평론이니 문명비판이니…, 게다가 당신의 말은 모두 궤변이에요…, 반성합니까?” 나중에 그 서울법대 출신의 검사는 압수한 서적 중 두툼한 일본어로 된 책을 내밀며 물었다.

“이건 뭐요? … <자본론>? 무슨 책이요? 저자가 누구지요?” 나는 이 대목에서 웃음이 나왔다. “저자가 누구냐니까? 내용이 뭐고?” 리 교수가 대답했다. “그거야… <바이블>이 어떤 책이냐고 묻는다거나 <훈민정음>을 누가 지었냐고 묻는 거나 다름이 없지 않겠어요?”

나는 정말 실소를 금할 수 없었는데 그때 정운찬 전 총리 생각이 났다. 그리고 김주완 기자(경남도민일보 편집국장)가 쓴 글 내용이 떠올랐다. “공부를 너무 많이 하면 머리가 나빠진다!” 정운찬 전 총리도 서울대 출신에 서울대 총장까지 지낸 사람이다.

그런 그는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마루타를 아느냐”는 질문에 “전쟁포로냐”고 되물었다가 “그럼 731부대를 아느냐”고 다시 질문하자 “항일독립군 아니냐”고 말해 망신을 산 적이 있다. 이게 정말 김주완 국장의 주장처럼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만들어진 에피소드일까?

누구보다 공부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리영희 선생의 경우는 그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마도 무엇을 위해, 어떤 자세와 가치관을 지니고 공부를 하는가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선생은 치열하게 공부하면서 늘 현장에서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살았다.

리영희는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 1960년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리영희 선생의 기고문
이승만 정권의 실상을 워싱턴포스트에 정기적으로 기고문을 보내 고발했으며, 4.19혁명 대열의 중심에 섰으며, 반독재투쟁의 일선에서 한 치도 비껴선 적이 없었다. 1989년에는 <한겨례> 창간기념으로 북한 취재기자단 방북을 기획한 혐의로 회갑의 나이에 네 번째 구속을 당했다.

바로 그 차이 아니겠는가? 전여옥이 그랬던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보고 대학도 못나온 사람이 대통령을 해서 되겠냐고. 그러고 보니 김대중 전 대통령도 대학을 못나왔다. 그럼 대학 나온 전여옥은 노무현이나 김대중 전 대통령보다 머리도 더 좋고 공부도 더 잘하나?

글쎄, 누가 이 말을 듣고 허무맹랑하다 하지 않겠는가. 리영희 선생은 수재였다. 그는 다만 어려운 시대를 살았으며 국비로 학비를 지원하던 해양대학을 선택했던 것이다. 항해과를 나온 ‘리 교수’보다도 인문학에 무지한 서울법대 출신의 검사, 둘 중에 누가 제대로 공부를 한 것일까?

이런 이야기들을 파노라마처럼 돌려볼 수 있는 <리영희 평전>,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 런닝셔츠 차림에 맨발로 마루에 앉아 아이를 안고 찍은 흑백 사진 속의 남자를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는 것은 즐겁다. 게다가 이 책에는 파란만장한 그의 일대기뿐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를 한눈에 읽을 수 있다.

나는 리영희 선생의 모든 것을 이해하지는 않는다. 몇 가지 점에서는 판단을 달리하는 부분도 분명히 있다. 특히 아직도 반미를 최고의 행동강령으로 생각하는 듯한 태도에는 정말 동의하기 어렵다. 고인이 되기 얼마 전 저자와 가진 인터뷰에서 한 말은 더욱 그렇다.

반미주의에 경도된 것은 선생이 처한 시대적 한계였을까?


   
▲ 저자 김상웅과 마지막 인터뷰 모습
“지금의 시기를 일제강제병탄 직전인 1905년으로 보는 거지. … 이명박 정권은 미국의 노예정권이야, 그것도 사상 최악의….”

물론 한미FTA, 전시작전권 반환 문제에 있어 분명 이명박 정권이 굴욕외교를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정권을 일거에 미국의 노예정권이라고 못 박을 수 있을까? 한때 카다피를 반미전선의 우상으로 치켜세우던 진보진영의 부끄러운 모습이 겹쳐보여 슬펐다.

지금 보라! 반미의 우상 카다피의 저 천인공노할 만행 앞에 누가 감히 나서서 규탄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선생이 반미의 시대를 살았던 것은 그의 탓이 아니다. 그는 그 시대에 그가 할 도리를 다했다. 선생이 살았던 시대는 일제와 미군정, 전쟁, 독재의 소용돌이였던 것이다.

흔히들 4.19세대니, 6.3세대니, 민청학련세대니, 386세대니 하고 이름들을 붙여 자화자찬하지만 변하지 않은 이가 몇이나 될까? 허니 선생의 이름 앞에 감히 고개 숙이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의 도리를 안다 하겠는가. 선생은 위대한 스승이었다. 적들에게마저도 존경받을, 혹은 받아야 할….

그러나 여전히 “오늘 이순간 선생께서 일어나셔서 리비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민중봉기를 보신다면 카다피를 보고 무슨 말씀을 하실까?” 하고 궁금해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나의 분파적 경향성 탓인가. 그럼에도 나의 궁금증은 멈추지 않는다. 선생에게 평생 최고의 가치는 인권이었기 때문이다.

위대한 휴머니스트는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게 철저하고 냉정하다는 것을 또한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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