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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
아브람 노엄 촘스키.미셸 푸코 지음, 이종인 옮김 / 시대의창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촘스키와 푸코는 내개 어려웠다. 이들이 네덜란드에서 TV토론을 한 것이 1971년이라고 하니 나는 이때 글자도 해독하지 못한 초등학교 1년생이었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38년 전에 이들은 인간의 본성 문제를 놓고 격론을 벌였는데, 세월이 흘러 그 또래가 지난 딸을 둔 나는 아직도 이해하기 어렵다.
내가 이들의 토론을 접한 것은 물론 TV가 아니라 책이었다. 그들의 3시간에 걸친 토론을 가감 없이 묶은 책이 나왔던 것이다. <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 대중을 앞에 두고 벌인 토론이라 그렇게 전문적이거나 어려운 내용은 없었다. 서문이나 번역자 후기에서도 그렇게 말했지만, 그 말이 내겐 해당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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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시대의 창/이종인 옮김 |
결국 나는 이 책의 서평을 시간 내에 제출하지 못하는 불상사를 만들고야 말았는데, 알라딘으로부터 독촉을 받고는 다시금 책을 들었다. 그러나 결론은, “역시 어려워!”다. 두 사람의 토론에 사회를 맡은 엘더르스는 이들을 “전혀 다른 도구를 가지고 산의 정반대 방향에서 터널을 뚫어오는 사람”이라고 비유했지만, 그들이 들고 있는 도구부터가 이해되지 않았다.
“본능적인 지식, 제한된 정보로부터 고도로 복잡하고 조직된 지식을 이끌어내게 하는 도식 체계야말로 인간성을 구성하는 기본요소의 하나죠. 이것이 우리의 사회적‧지적‧개인적 행동을 인도한다고 보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인간 본성 개념입니다.” 촘스키는 인간의 본성을 도식체계의 덩어리로서 실존한다고 말한다.
이에 반해 푸코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식의 역사로 볼 때 인간성이라는 개념은 주로 인식론적 지표 구실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특정 유형의 담론이 신학, 생물학, 역사학 등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 혹은 갈등 관계를 맺는지 보여주는 지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성을 과학적 개념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것이 바로 엘더르스가 말한바 ‘산의 정반대 방향에서 터널을 뚫기 위해’ 이들이 들고 있는 도구다. 현재 미국 MIT대 명예교수로 있는 촘스키는 사회비판에 앞장서온 진보적 지식인으로 유명하다. 그는 특히 베트남전 등 미국의 대외정책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푸코 역시 평생을 노동자, 이민자, 동성애자 등 사회적 약자의 편에서 싸웠다.
푸코는 <광기의 역사>, <감시와 처벌> 등 명저를 남긴 프랑스의 지성이었으며 1984년 타계했다. 이들의 이력으로부터 엘더르스가 말한 산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은 유사한 목표와 가치를 갖고 있는 듯했다. 산이란 인간이다. 인간의 본성이란 동일한 주제에 대해 이들 두 학자는 정반대 방향에서 다른 도구를 들고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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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암 촘스키 |
그리고 이로부터 진정한 정의가 인간성의 바탕에 깔려있다고 생각하는 촘스키와 정의라는 것 자체가 인간의 발명품일 뿐이라고 규정하는 푸코의 열띤 토론이 전개된다. 촘스키와 푸코의 차이는 ‘정의’에 대한 논쟁에서 확연해진다. 푸코는 촘스키가 말하는 보편적 정의라는 관념을 이해할 수 없다.
푸코에게 정의란 어떤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계급이 만들어낸 지배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가령 그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를 타도하고 권력을 잡고자 하는 것도 권력의지일 뿐이지 정의와는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런 정당화를 내세우겠지만, 실제로는 정의보다 권력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정의에 대한 푸코의 생각은 전쟁에 대해서도 이어진다. “이기기 위해서 전쟁을 하는 거지 정의롭기 때문에 하는 게 아니라는 얘기죠.” 그러나 촘스키의 견해는 다르다. 그는 “가령 미국에서는 베트남으로 갈 탄약열차를 멈추게 하는 것을 시민의 불복종으로 규정하지만, 국가가 이런 결정을 내린 건 잘못”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합법적이고 정당하며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까요.” 촘스키에게 살인을 막기 위해 교통법규를 위반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건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가치 있는 행동으로서 인간 본성의 발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푸코는 계속해서 촘스키에게 더 나은 정의란 무엇인지, 그런 게 있다면 보여 달라고 주문한다.
만약 누구나 상식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더 나은 정의란 게 없다면 정의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것은 결국 특정한 계급적 입장에 근거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두 사람의 정의에 관한 태도가 이렇게 확연히 갈리는 것은 두 사람이 지닌 도구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언어학과 역사학을 주요 관심사로 다루는 두 철학자의 차이.
인간 정신이 가진 내재적 특성으로 인해 어떤 정의가 다른 정의보다 더 낫다고 판단할 수 있다고 보는 촘스키도 그러나 푸코의 주문에 대해 명확한 해답을 내놓지는 못했다. 이 부분을 토론할 때 두 사람은 자기 견해를 이해시키기 위해, 혹은 상대의 견해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분주하게 모색하는 모습을 보였다. 떠듬거리면서….
(푸코) 제 질문은 이런 것입니다. 당신이 분명 불법적인 행동을 저지를 때…….
(촘스키) ……국가가 아니라 내가 불법으로 생각하는 행동을 저지를 때.
(푸코) 아니, 아니, 국가의…….
(촘스키) ……그럼 국가가 불법으로 여기는…….
(푸코) ……그래요, 국가가 불법으로 여기는 행동을 할 때, 당신은 정의라는 이상을 위해 그 행동을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것이 계급투쟁에 유익하고 필요하기 때문입니까? 그러니까 이상적인 정의를 더 중시하는 겁니까, 그게 제가 알고 싶은 겁니다.
(촘스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저는 국가가 불법으로 판정하는 행동을 하면서 실은 그것이 합법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저는 국가 쪽이 범법을 저지르고 있다고 보는 겁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 그것은 사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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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셸 푸코 |
두 사람의 토론은 계속된다. 세 시간으로 이들이 지닌 사상의 정수를 모두 섭렵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나 이 정도만으로도 인간 본성과 같은 추상적 물음에 대한 서로 다른 개념 정립이 얼마나 큰 실천적 차이를 가져올 수 있는지 잘 보여준 토론이었다. 마치 지상에서 1 미크론의 차이가 먼 우주에서는 몇 십억 광년의 차이가 될 수 있다는 자연과학적 진리처럼.
사회를 보던 엘더르스가 푸코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당신은 왜 정치에 관심이 많은지 물어보겠습니다. 제게 철학보다 정치에 더 관심이 많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러자 푸코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되묻겠습니다. 왜 제가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말아야 하나요? 정치는 우리 일상생활에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왜 정치에 관심이 많으냐는 질문에 답변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왜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말아야 하느냐고 반문하고 싶습니다. 정치에 관심 없는 것, 그거야말로 문제죠” 하고 말한 푸코는 “그러니 저한테 그런 질문하지 말고, 정치에 관심 없는 사람에게 ‘젠장, 어째서 당신은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거요?” 하고 물어야한다고 한 답변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푸코가 보기에 교육제도는 지식 전파가 주된 임무처럼 보이지만, 다른 사회적 계급에게 권력이 넘어가지 않고 특정 사회적 계급이 계속 집권하는데 봉사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의료기관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겉으로는 중립적이고 독립적인 듯한 이런 기관들의 행태를 비판하고 폭로하면서 맞서 투쟁하는 것이 중요한 정치적 과제다.
이런 지점에 대해선 촘스키도 견해가 같았다. 촘스키는 푸코가 말한 “왜 제가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말아야 하나요?”란 되물음을 온몸으로 실천을 통해 보여준 지식인이다. 인간 본성에 대한 확신은 정의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방청객 중에 촘스키에게 “당신이 MIT에 재직하는 것은 그들에게 깨끗한 양심을 부여해주는 셈” 아니냔 비판적 질문을 던졌다.
촘스키의 답변은 좀 궁색했다. “글쎄요. 제 존재가 그만큼이나 될까요? MIT가 (군용무기 연구) 기관으로 활동하는데 반대하여 학생들이 시위를 벌일 때 도움이 되려고 애씁니다만, 제가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제가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경우가 다를지는 모르겠는데, 이런 편견과 오해는 우리 주변에서도 가끔 만날 수 있다. 예를 들면 삼성그룹의 비리를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의 경우도 그렇다. 그는 원래 삼성의 컨트롤 타워로 알려진 전략기획실의 법무팀장이었다. 그렇다고 “너는 그럼 왜 거기서 잘 먹고 잘 살았냐”고 따지는 사람들이 일부지만 있었던 것이다.
내 주변엔 4대강 사업에 발주를 받아 공사를 하는 건설업체의 임원이 한사람 있다. 그는 그러면서도 4대강 사업에 반대하는 시위나 집회에 빠지지 않고 동참하려는 열의를 가진 사람이다. 그는 매우 아름다운 생각을 가졌지만 그의 직업은 생각과는 반대로 그 아름다움을 파괴하는 일이다. 아이러니지만,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고 또 이해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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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는 그야말로 어느날 갑자기 <TV 책을 말하다>를 폐지해버렸다. |
어렵다고 하면서도 서평이 길어졌다. 일부러 두 사람의 발언을 많이 인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어렵다. 왜 그럴까? 내가 공부가 부족해서? 그런 탓도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철학적 사변에 약한 것은 어쩔 수 없는 나의 한계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으면서 참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이 토론이 네덜란드란 유럽의 어느 한 귀퉁이에 있는 나라에서 1971년에 벌어졌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해보라. 그리고 사회자 엘더르스가 토론회를 시작할 때 첫 멘트를 살펴보자. “신사 숙녀 여러분, <국제 철학자 프로젝트>의 세 번째 토론에 참석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부럽지 않은가?
내가 이렇게 쉽게 대화체 그대로 펴낸 책도 어렵다고 엄살을 피우는 것이 실은 책을 보는 내내 느꼈던 ‘왜 우리나라에선 이런 고급스런 토론 프로그램이 없는 것일까?’ 하는 부러움과 맞닿아있었다. 다음에 든 생각은 이것. ‘하긴 <TV 책을 말하다> 같은 프로그램도 이해하지 못할 이유로 폐지되는 나라이니.’
<TV 책을 말하다>가 폐지된 이유가 뭐라고 했더라? 김미화가 너무 미워서 그랬다나, 어쨌다나? 그런 소문이 사실이었을까? TV를 특별히 즐기는 내가 가장 아끼는 프로그램 중에 하나가 <풍경이 있는 여행>과 <TV 책을 말하다>였는데, 무척 아쉬운 일이었다. 아무튼, 책을 읽는 내내 부러우면서 한편 화가 났다.
“젠장, 어째서 우리나라엔 이런 프로그램 하나 없다는 거요?”
* 이 글은 인터넷언론 <100인닷컴>(100in.com)에도 함께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