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가 돌아왔다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이우일 그림 / 창비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김영하의 싸인이 들어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덜컥 예약 주문을 신청하고, 열흘 후쯤 책이 도착하자마자 게눈 감추듯 하루 밤에 읽어 치워 버린 것이 벌써 두 달도 더 전의 일이다. 오래 기다린 보람을 오래오래 되새김질 하고 싶던 마음은 책을 다 읽자마자 횅하니 사라져버리고 뭐라 딱 꼬집을 수 없이 흐리멍텅한 기분만이 남았고, 책을 읽고 리뷰까지는 아니더라도 어설픈 끄적임이라도 남겨두는 편인 내 수첩의 이 책 제목 옆은 하얗게 비어 있었다. 애써 노력한 것은 아니나, 그를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로 만나서 단편집 [호출]에 홀라당 팬이 되고 그 후 자연스레 수순을 밟아, 소위 말하는 그의 전작주의자가 된 내게 이번 단편집만큼 큰 감흥 없이 덤덤하게 읽힌 책은 하나도 없었다. 매번 그가 내미는 신선한 소재들에 감탄하고 날 선 허구성에 감복하며 얕은 듯 깊은 문장들에 열광하기조차 했던 과거의 행태들에 비추어 볼 때 스스로도 조금은 놀랐다.

  그의 소설은 마치, 퍼덕거리는 파란 생선이 갓 잡아 올려져 통 속에 팅 던져졌다가 하얀 도마 위로 다시 스슥 건져 올려 눕혀 지고 이어 커다란 식칼질 한 방으로 목이 댕겅 날아가면서 그 파란 생선의 빨간 내장이 드러나며 싱싱하게 회가 쳐지기까지의 과정, 같은 생생한 이미지로 다가왔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생선회가, 그 매운탕이 더욱 더 숙성된 맛을 내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간간히 맛보여지던 [굴비낚시]나 [포스트 잇] 같은 밑반찬(?)들은 그 확신을 공고하게 할 만큼 감칠맛이 났다. 그런데 비유하자면 이번 소설집 <오빠가 돌아왔다>는 싱싱한 회도 잘 우러난 매운탕도 아닌, 그냥 맛있는 밥, 정도라고 해야 어울릴 것 같다. 밥이 맛있기는 하지만 반찬 없이 그냥 맨밥만 맹숭하게 먹으면 마냥 싱거운 것처럼 왠지 간이 심심한 소설들이었다. 자꾸만 뭔가가 빠진 것 같아서 다 읽고 나서 괜한 심통에 책을 휙휙 뒤집어보기까지 했는데, 그 이유는 어쩌면 처음 만난 [나는 나를 파괴할......]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했고 그 첫경험이 뇌리에 파박 꽂혀버린 때문으로 빚어진 그에 대한 나의 기대와 오해, 순전한 그것 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길든 짧든 어떤 주제로든, 퍼덕이는 생선에 비유할 만큼 어떤 '살아있음' 의 이미지들을 지속적으로 가공해 주었던 이전과 달리 [오빠가 돌아왔다]는 좀 더 통속적이고 일상적인 느낌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전반적으로 조금씩 싱겁고 간혹 씁쓰름한 여러 단편 중 단연 불량식품처럼 달달한 작품은 역시 [오빠가 돌아왔다]이다.  이혼한 부모, 창피한 인간성의 아버지, 그 아버지를 개패듯 패는 패륜아 오빠, 그 오빠의 기이한 혼전동거 그리고 이 모든 과정 속에서 오직 섹스와 돈으로만 엮어지는 가족이라는 이름의 어설픈 결합. 이런 일들을 실제로 겪는다면, 그리고 진지하게 대면한다면, 칙칙하고 껄끄러운 조건들이 단 하나도 아니고 이렇게 굴비두름처럼 주루룩 엮어져 있는 삶을 겪는다면, 아마 그저 한없이 우울한 이야기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삐딱한 사춘기가 까진(?) 말투로 털어놓는 그 가족의 일상은 극단적으로 해체되고 삐걱거리면서, 그 치우침이 고통의 상황을 넘어서는 순간 오히려 코미디가 된다. 지나치게 진지한 사람이 때로 실소를 자아내게 하듯, 이 조용하지 않은 가족의 진지한 합집합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족이라는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한, 영원히 코미디이다. 그리고 그들의 교집합이 도덕 교과서에나 나오는 사랑이니 뭐니 하는 뻔하게 당연해 마지않는 것이 아니라 그저 돈이나 육체적 욕망으로만 점철되어 있다는 것에 어쩌면 우리는 쉽게 안도한다. 허나 서커스 가두 홍보단 같은 콩가루 가족을 보면서 마냥 큭큭 대다가, 나와는 좀 다르다는 사실에 조금은 안도하다가, 결국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 속의 나, 그리고 나의 욕망이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쩌면 가족은 모두 '서커스 가두 홍보단' 이 아닐까. 열혈한 마음으로 손에 손잡고 전세계를 돌며 순회공연을 하는 일류팀이냐 아니면 장이 열릴 때만 뭉쳐서 쿵짝대다가 이내 제 갈길로 흩어지는 삼류팀이냐의 차이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예전에 쓴 작가의 말에서, 그는 담배처럼 매캐한 소설을 쓰고 싶다고 했고, 실제로 그의 소설들은 내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들어와 일정한 중독성으로 그를 끊지 못하게 만들었었다. 그런데 이번 작가의 말을 보니, 그가, 조금은, 변한 듯도 싶다. 투망을 던지듯이 아니라 그저 낚시대를 드리우고 고기야 물려라 아니면 말고 하는 심정으로, 라는 말에서 보이는 어떤 여유. 어찌되었건 나는 그가 계속 못생긴 여자애를 달았건 이상한 몽둥이를 들었건 그렇게 계속, 더 자주 돌아와 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안 돌아오면 말고, 라고 시큰둥하게 말하기에는 내가 이미, 여전히 그리고 어쩌면 내내 그를 끊을 수 없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계속 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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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한 밤,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전라도로 달려갔다.
초등학교 때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 이후로 가깝다고 할 만한 사람의 죽음은 단 한 번도
보지도 겪지도 못한 내게, 단 이주간에 걸쳐 연달아 내 주위 두 사람이 저 세상으로 향했다는
사실은 낯설고도 아득한 충격이 되어 다가왔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에 바로 이런 과정들이
포함되어 있으려니 하고 담담하게 생각하고 싶지만, 죽음이라는 건, 언제나 감상적인
뭉텅이들을 한없이 부려놓을 수 밖에 없는 거라고 애써 자위하며
안그래도 유치한 내 마음이 자꾸만 어려지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잔잔하게 깔린 서해 바다를 보았다. 마침 구색이라도 맞춰주듯 비까지 서벅서벅 내렸다.
푸르딩딩한 회색을 띤 바다와 무겁고 낮게 내려앉은 하늘은 마치 원래부터 한 덩어리였다는 듯
함께 뭉뚱그려져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그 사이를 가르는 가느다란 빗줄기들은,
내리는 것인지 솟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게 조용히 흩날려대었다.

감상을 경계하는 감상적인 마음이야말로 오히려 더한 감상이다.
가야 할 사람이 가야 할 곳으로 돌아간 것은 당연하고 누구도 그 고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한, 죽음이란 단어가 자아내는 슬픔은 살아남은 자들의 이기심에서 비롯되는 것일 뿐,
갑작스러운 것이 아닌 마냥 준비되어왔던 그 것은 그저 하나의 절차에 불과하다.
그래서 나는 벌써 모든 것을 다 잊었다.
한정없는 슬픔 따위, 이제 더이상 내 곁에 붙어있을 수 없어 영원히 길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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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와 바다 이야기
마르틴 발저 외 지음, 크빈트 부흐홀츠 그림, 조원규 옮김 / 민음사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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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온라인 책방에서 간간이 보내오는 뉴스레터인가 하는 한 통의 정기 메일을 통해서였다. 그렇다고 내가 이런저런 책 사진과 몇 권의 신간 소개 등과 함께 날씨도 좋은데 좋은 하루 보내세요 하며 책도 한 권 주문하시면 더 좋지요 하는 메시지에 평소처럼 귀를 코끼리처럼 펄럭거리며 그저 홀랑 넘어갔던 것만은 아니다. 크빈트 부흐홀츠 라는 발음하기에도 낯선 독일 아저씨가 그림을 그리고 마르틴과 요한나 발저라는 부부인지 남매인지 모를 한 쌍이 글을 써넣었다는 이 완벽하게 생소한 그림책을 내가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장바구니에 집어넣게 된 것은 책 속에서 발췌된 단 세 문장, 단지 그 때문이었다.
  바라건대, 지치지 말기를. 제발 그러하기를. 모든 것이 유한하다면, 무의미 또한 끝이 있을 터이니.

  나날의 삶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것조차 무의미하게 느껴질 만큼 한없이 힘이 빠지고, 내 몸이 냉장고 속에라도 들어가 있는 듯 심장마저 답답하고 차갑게 식고 있다고 생각될 때  즈음, 바로 그런 순간에 절묘하게도 내게 날아온 그 문장들은 마치 누군가가 내 손을 꼭 잡으며 다정하게 말을 건네어 주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멈춰졌던 피돌기가 다시 시작되어 몸이 새롭게 더워지는 듯한 약간의 열띤 기분. 그렇게 펼쳐든 이 책의, 그림 한 장 글 한 줄 한 줄들. 그것을 보고 읽는 동안 마음이, 조금은 헤매기를 멈추었다.

  이 책은 예전에 나온 <The Blue Day Book >과 조금은 닮아 있는 모습이다. 자기도 모르게 웃음 짓거나 공감하게 되어 버리는 동물 사진과 그 사진 옆 한 줄의 글이 만났을 때 발휘되던 시너지 효과처럼, 이 책의 그림과 글도 서로 손을 꼭 맞잡은 채 빛을 발하며 조용조용 말을 붙여 온다. 하지만 별 것 아닐 수도 있는 말이 사진과 만나서 빛을 내던 <The Blue Day Book >과는 달리 <호수와 바다 이야기>의 문장들은 홀로 그 자체로 충분히 살아서 아름답게 움직이며 그림 속에 스며들고 때로는 부딪히며 또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게다가 그림들은 절묘한 점 점의 질감들이 풍부하게 깊이를 자아내고 평온하게 또는 격정적으로 움직이며, 한 장 한 장이 때로 선명한 사진처럼 단단하고 때로는 어릴 적 그리던 상상화처럼 발랄한데, 모두 깊이 오래 들여다보면 볼수록 자꾸만 마음속에 어떤 물음표 혹은 느낌표들이 끊임없이 생겨난다.

 결정적으로 이 책은 숱하게 있을 법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우리 한번 웃으며 열심히, 하는 마구 희망적인 불안치유용 책들과는 조금은 다른 지점에 서 있다.  애써 쓴웃음을 지으면서 결국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 현실을 그냥 덮어두지 않고 덤덤하게 말해간다.
  사람들의 끝없는 잡담...... 그들은 공허하게 지껄이고 또 되뇌이고, 다정한 마음 또는 증오로 영영 입을 다물어 버리고, 더러운 빗물을 맞으며 술 단지 속을 저렇게 빙글빙글 날아다니는 나를, 버려도 버려도 끈질기게 쫓아오는 그림자 인 나 자신을, 끝끝내 스스로에게 상기시킨다. 허나 결국, 처음 이 책이 건넨 한 마디에 화들짝 놀라며 덥석 손을 내밀어버렸던 그 이유처럼, 기저를 흐르는 따뜻한 시선과 풍성한 이미지에 어쩔 수 없이 사로잡히면서 스스로도 모르게 불끈, 사는 동안 희망적일 필요는 언제나 있는 거라고,  아름다운 세상에서 불행해하는올바른 태도가 아니지 하는, 뻔하지만 힘겨운 그 말을 삐딱한 내 속에 쑤욱 밀어 넣게 된다.
  어느 날 문득 책꽂이 귀퉁이에 꽂혀있는 이 책이 눈에 띌 때, 그저 쓱 뽑아들고 아무 데나 휙 펼쳐서 읽을 때, <호수와 바다 이야기>의, 그 살아감에의 지속한 의지들을,  내 안에 계속 계속 충전할 수 있기를 그리고 그 약발이 아주 아주 오래 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내 자신이 비어 있되 차갑지 않기를, 친밀한 기다림을 내내 잃지 말기를, 또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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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이라고 하면, 일정한 환경이나 구속에서 빠져나감, 이라고 네이버 국어사전에 나와 있는 것처럼

일종의 벗어남, 변화를 의미한다. 그리고 해석아래 예문에 그럴 듯하게도 '포로수용소를 탈출하다'고 나와있는 것처럼 대부분 안좋은 것에서 몸을 빼내는 모습이 자연스레 연상된다.

그런데 백수라는 일반적으로 안좋은 상황과 탈출이라는 단어가 과감히 만났음에도 불구,

사전에 예문까지 들먹이며 탈출!이라고 생기있게 외치고 싶은 기분이 그닥 들지 않는게 문제라면 문제다.

오늘부터 저임금 저노동의 일을 대충 하게 되었다. 이로써 3개월 혹은 6개월의 구분짓기 애매한 나의 백수시절은 일단 종지부를 찍는다. 그 시간동안 나는 그냥 있 었 다. 하지만 이젠 아름답고도 편안한, 내 천성과 가장 부합하며 내 피와 가장 잘 섞이는 만판널럴만고땡의 시절은 바야흐로 끝나고 돈을 남의 주머니에서 내 주머니로 옮기는 수월찮은 짓을 시작하려고 한다.

돈이 필요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내년과 내 후년 그리고 그 다음해. 향후 삼년의 계획을 새로 정립하면서 난 아주 돈이 많이 드는 복잡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몸의 나이는 이제 중반을 향해 치달아 가는데 정신의 나이는 왜 아직도 자꾸만 가정환경조사서 장래희망 란의 빈칸을 또박또박 채우고 싶어하는 어린아이의 그것으로만 내닫고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나는 항상 그냥 있.고.싶다.

하지만 앞으로 오래 그러기 위해서 오늘의 이 탈출을 계속 감행하리라 다짐해본다.

 

보태기> 나에게 내 삶의방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케해준 사람이 있으니, 우습지만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알라딘 서재의 어느 분이다.  나중에라도, 이 고마움을 꼭 표현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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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이 영화를 봤다. 그리고 그 날, 이 영화에 대해 그리고 내가 한 때 믿었던 기독교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느라, 아니 나도 모르게 머리가 지혼자 생각을 해대느라 내내 복잡한 심경이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오늘까지 알 수 없는 기분으로 이 영화를 기억하고 있다. 그건 정말 감동적이라서 가슴이 저린 기분이나 진정 동감해서 박수치는 기분이거나 아니면 너무 재밌어서 좋아라 하는 기분도 아닌, 정말 알 수 없는 명치 끝의 동요,였다고 느끼고 있다.

고등학교 때 친구 때문에 몇 번 방문 한 것을 제외하고 진정 자발적으로 교회에 간 것은 초등학교때가 전부인 내가, 한 때 나름대로 진정한 마음으로 매일밤 자기 전 침대맡에서 기도를 했던 중학교 시절을 이미 까맣게 잊어먹은 내가, 이 영화를 보고 새삼스런, 기독교에 대한 나의 무지막지한 불신과 편견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 것은 생각컨대 진정 역사 속에 존재하는 예수라는 한 인간의 힘이었다. 그는 신의 아들이기 전에 인간의 아들이었고 그 자체로 악마의 유혹을 받는 나약한 인간이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의 갈등이 나오는 영화의 처음 장면에서 나는 이미 이 영화를 괜찮은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장면이야말로 이후의 잔인 혹은 진실, 참혹 혹은 사실적인 내용들보다 가장 잘 이 영화의 내면을 꿰뚫고 있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말하면, 집에 와서 집구석을 샅샅이 뒤져서 먼지가 한 10센티는 내려앉은 작은 성경책을 찾아내서 영화에서 나온 장면들을 뒤져 볼 만큼, 이 영화가 내게 준 인상은 상당히 강렬한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나으 좌석이었다. 작아터진 극장에서 맨 앞줄, 맨 오른쪽. 으으으흑. 좌석이 그것 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을 때 좀 더 심각하게 갈등하고 고려를 했어야 했는데, 갈등 때리는 것도 귀찮고 나중에 극장 다시 오려면 열배로 더 귀찮고 해서 그냥 본 것이 그렇게 큰 고통을 내게 선사할 줄은 정말 몰랐다.

중반, 후반부로 가면서 영화는 피와 살점의 향연으로 치달아가고 감동의 곡선은 그에 발맞춰 가파르게 상승해주어야 할 것만 같은데, 난 내 바로 앞에 육박해있는 커다란 자막을 읽어대느라 눈이 금새 뻑뻑해졌고 붉은 피, 튀는 살점들은 뻣뻣한 내 머리어깨목허리와 함께 어우러져 지독한 현기증을 유발했다. 

장담컨대, 편안한 좌석과 적당한 거리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면 난 집에 와서 성경을 찾아내서 한 번 스윽 펼쳐보고 마는 것이 아니라 아예 독파를 감행해내었을지도 모른다. 신의 존재는 부정하지 않지만(하느님이든 누구든) 예수의 존재 자체에 대해 무지로 인한 불신만을 내세웠던 내게 이 영화는 종교라는 것에 대해 한 번 날잡아서 심사숙고를 해봐야겠다는 중대한 결심을 하게 만들어주었다. 무교에다가 기독교에 대한 맥락없는 등돌림만을 고수해온 내가 이 정도로 반응을 보인다는 건,  기독교인들이 보기엔 상당히 고무적인 일은 아닌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미 난 어린 양이 아니라 늑대 한 마리니까;;;)  

덧붙여,  다시는 극장 맨 앞 좌석에는 앉지 않겠다는 시퍼런 결의가 가슴에 자리잡은 의미있는 경험이었다고 기억해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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