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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와 바다 이야기
마르틴 발저 외 지음, 크빈트 부흐홀츠 그림, 조원규 옮김 / 민음사 / 2001년 2월
평점 :
이 책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온라인 책방에서 간간이 보내오는 뉴스레터인가 하는 한 통의 정기 메일을 통해서였다. 그렇다고 내가 이런저런 책 사진과 몇 권의 신간 소개 등과 함께 날씨도 좋은데 좋은 하루 보내세요 하며 책도 한 권 주문하시면 더 좋지요 하는 메시지에 평소처럼 귀를 코끼리처럼 펄럭거리며 그저 홀랑 넘어갔던 것만은 아니다. 크빈트 부흐홀츠 라는 발음하기에도 낯선 독일 아저씨가 그림을 그리고 마르틴과 요한나 발저라는 부부인지 남매인지 모를 한 쌍이 글을 써넣었다는 이 완벽하게 생소한 그림책을 내가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장바구니에 집어넣게 된 것은 책 속에서 발췌된 단 세 문장, 단지 그 때문이었다.
바라건대, 지치지 말기를. 제발 그러하기를. 모든 것이 유한하다면, 무의미 또한 끝이 있을 터이니.
나날의 삶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것조차 무의미하게 느껴질 만큼 한없이 힘이 빠지고, 내 몸이 냉장고 속에라도 들어가 있는 듯 심장마저 답답하고 차갑게 식고 있다고 생각될 때 즈음, 바로 그런 순간에 절묘하게도 내게 날아온 그 문장들은 마치 누군가가 내 손을 꼭 잡으며 다정하게 말을 건네어 주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멈춰졌던 피돌기가 다시 시작되어 몸이 새롭게 더워지는 듯한 약간의 열띤 기분. 그렇게 펼쳐든 이 책의, 그림 한 장 글 한 줄 한 줄들. 그것을 보고 읽는 동안 마음이, 조금은 헤매기를 멈추었다.
이 책은 예전에 나온 <The Blue Day Book >과 조금은 닮아 있는 모습이다. 자기도 모르게 웃음 짓거나 공감하게 되어 버리는 동물 사진과 그 사진 옆 한 줄의 글이 만났을 때 발휘되던 시너지 효과처럼, 이 책의 그림과 글도 서로 손을 꼭 맞잡은 채 빛을 발하며 조용조용 말을 붙여 온다. 하지만 별 것 아닐 수도 있는 말이 사진과 만나서 빛을 내던 <The Blue Day Book >과는 달리 <호수와 바다 이야기>의 문장들은 홀로 그 자체로 충분히 살아서 아름답게 움직이며 그림 속에 스며들고 때로는 부딪히며 또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게다가 그림들은 절묘한 점 점의 질감들이 풍부하게 깊이를 자아내고 평온하게 또는 격정적으로 움직이며, 한 장 한 장이 때로 선명한 사진처럼 단단하고 때로는 어릴 적 그리던 상상화처럼 발랄한데, 모두 깊이 오래 들여다보면 볼수록 자꾸만 마음속에 어떤 물음표 혹은 느낌표들이 끊임없이 생겨난다.
결정적으로 이 책은 숱하게 있을 법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우리 한번 웃으며 열심히, 하는 마구 희망적인 불안치유용 책들과는 조금은 다른 지점에 서 있다. 애써 쓴웃음을 지으면서 결국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 현실을 그냥 덮어두지 않고 덤덤하게 말해간다.
사람들의 끝없는 잡담...... 그들은 공허하게 지껄이고 또 되뇌이고, 다정한 마음 또는 증오로 영영 입을 다물어 버리고, 더러운 빗물을 맞으며 술 단지 속을 저렇게 빙글빙글 날아다니는 나를, 버려도 버려도 끈질기게 쫓아오는 그림자 인 나 자신을, 끝끝내 스스로에게 상기시킨다. 허나 결국, 처음 이 책이 건넨 한 마디에 화들짝 놀라며 덥석 손을 내밀어버렸던 그 이유처럼, 기저를 흐르는 따뜻한 시선과 풍성한 이미지에 어쩔 수 없이 사로잡히면서 스스로도 모르게 불끈, 사는 동안 희망적일 필요는 언제나 있는 거라고, 아름다운 세상에서 불행해하는 건 올바른 태도가 아니지 하는, 뻔하지만 힘겨운 그 말을 삐딱한 내 속에 쑤욱 밀어 넣게 된다.
어느 날 문득 책꽂이 귀퉁이에 꽂혀있는 이 책이 눈에 띌 때, 그저 쓱 뽑아들고 아무 데나 휙 펼쳐서 읽을 때, <호수와 바다 이야기>의, 그 살아감에의 지속한 의지들을, 내 안에 계속 계속 충전할 수 있기를 그리고 그 약발이 아주 아주 오래 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내 자신이 비어 있되 차갑지 않기를, 친밀한 기다림을 내내 잃지 말기를, 또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