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2 1
아다치 미츠루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1999년 3월
평점 :
절판


무뎌져 가고 있다고 느낄 때, 예전 같으면 뒤집어지게 웃거나, 땅 파고 누울 듯이 울 만한 일에도 그저 피시시 웃음을 흘리고 달랑 눈물 한 방울 흘리는 스스로를 발견할 때, 살아간다는 것은 이렇게도 나날이 덤덤해지며 세월을 쌓아가기만 하는 것이냐 하는 자조적인 혼잣말을 뇌까릴 때, '만화' 라는 녀석은 내게 묘한 힘으로 생기를 돋궈주는 참 신기하고도 고마운 존재다. 아끼면서 모아둔 마일리지와 적립금을 보태서 주문을 하고 일부러 안기다리는 척 외면을 하다가 한아름 책이 담긴 큰 상자를 편의점에서 받아 안고 간만에 입이 찢어지게 웃었다.

예전의 나는 일본만화에 대해 전혀 출처를 알 수 없는(지금 생각하면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그저 무조건 가볍고 재미없을 거라는 희한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스포츠 만화라고 하면 스포츠라는 말만 나와도 바로 라이벌, 좌절 그것의 극복과 눈물나는 승리의 감동적인 결말, 과 같은 뻔한 스토리가 머리 속에 자동으로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통에 그것들을 온통 뻔하다는 편견 속에 집어던져 버리고는 괜히 일부러 볼 필요 없다는 일관된 태도를 유지했다. 그러나 역시, 빈약한 근거와 무모한 아집으로 버티는 편견덩어리는 항상 뒤통수를 얻어 맞도록 되어 있는 모양이다. <H2>는 단숨에 잡다한 내 편견들을 장외로 날려버렸고, 이어서 나를 방망이로 얻어 맞은 것 마냥 녹진녹진하게 만들어 버렸다.

<H2>의 그림체는 전혀 화려하지도 예쁘지도 않은 진짜 단순하다 싶은 모양새를 지닌다. 오죽하면 머리 모양만 다를 뿐 주인공들의 생김새가 다 비슷비슷해서 헷갈린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들린다. 게다가 대사도 그다지 많지 않고 헐렁헐렁하다. 고등학생이 주인공인 야구 만화에다 삼각 관계가 등장하는 청춘물이니 뭐 대사가 촘촘할 필요가 있겠냐 할수도 있지만 흔히 등장할 법한 로맨틱한 혹은 인생격언류의 진지한 대사조차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H2>는 진정으로 빛을 발한다.

미묘한 표정, 간결하지만 1000% 함축적인 대사, 무심한 듯 그려놓은 배경, 지나치기 쉬운 빈 공간까지도 이 만화에서는 절대로 놓칠 수 없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하나의 흐름이다. 단순하면서도 미묘한 인물들의 표정으로, 섬세하게 구성된 칸나눔으로 그리고 구구절절 필요없이 말줄임표 단 하나로 가슴을 내려앉게 만들 수 있는 신선한 힘은 진정 이 만화만이 지니고 있는 최대의 장점이다.

심지어 늘상 쓰는 '왜' 나 '미안' 같은 단어들도 이 만화 속에서는 순식간에 인상적인 대사로 탈바꿈한다. 만화를 보지 않은 사람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그 앞 뒤 상황에 맞물려 절묘한 타이밍으로 가슴을 후벼파는 단어들, 즉 이 만화는 대사 하나하나가 아니라 온 몸(?)으로 말을 건네오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여러 번 보면 볼 수록, 줄거리가 아니라 세부에 집중할 수록  이전에는 놓쳤던 작은 칸 하나, 말풍선 하나에도 또다른 감흥을 즐길 수 있다. 덧붙여 곳곳에서 튀어 나오는 어찌보면 어설프고 썰렁해 보이는 아다치 미츠루 특유의 유머는 자신도 모르게 슬그머니 웃음 짓게 만드는 따뜻한 에너지로 넘실거린다.

두 명의 야구소년 히로와 히데오, 그리고 둘 사이의 히까리. 서로 좋아하고 질투하고 경쟁하고 성장해가는 이야기. 늘상 느끼는 거지만, 뻔한 이야기를 뻔하지 않게 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이야기꾼이다. 그리고 어려운 말을 쉽게 만드는 것, 긴 이야기를 압축할 줄 아는 것, 똑같은 말이라도 다정하게 건넬 줄 아는 것은, 진정으로 행복한 능력이 아닐까.

34권이라는 분량이 조금도 많다거나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 흔히 말하는 여백의 미, 행간의 묘미를 맛보기 위해 자꾸만 다시 들추게 만들고 눈을 가까이 들이대게 만드는 <H2>는, 여전히 내 눈을 계속 나빠지게 만드는 아주 고약한 만화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작년이었나 내가 토토로에 환장한 것을 알고 난 친구 녀석이 그 영화를 구해서 시디로 구워주었다. 가끔씩 기분이 좀 안 좋을 때, 난 그 토토로 시디를 돌려 보면서 그 속의 음악처럼 둥당둥당 다시 기분이 좋아지는 걸 지켜보는 게 무척이나 좋다. 그런데 그 친구가 토토로를 주면서 몇 개 다른 영화도  같이 구워줬는데 매번 토토로만 보느라 바빠서 다른 것들은 그냥 방구석을 굴러다니도록 내버려 두고 있었다. 그러다 어제, 우연찮게 그 중의 하나를 골라서 보다가...... 정말 우느라고 죽는 줄 알았다. 제목은  <반딧불의 묘>.

 

 

 

 

 

 

 

 

 

 

 

 

 

 

 

 

 

 

 

 

 

 

대강의 줄거리 정도는 어찌어찌 주워 들어 알고 있었고 또 감독인 다카하시 이사오라는 사람이 미야자키 하야오와 같은 지브리 스투디오를 어쩌구 저쩌구 한 여차저차한 사이라고도 하니(잘 모르면서 아는 척을 해야하니 대충 얼버무리기 전법;;) 내 마음은 이미 예전부터 심각하게 반딧불의 묘를 원하고 있은 셈. 허나 함부로 그 시디를 돌려보지 못한 단 하나의 이유는, 주변에서 본 인간들마다 무지하게 슬퍼서 펑펑 울었다는 사실. 그래서,
나는 (우는게 겁나서)매번 시디 껍데기만 만지작만지작 망설이다가 에이, 다음에~ 하고는 늘상 토토로만 줄창 봤던건데, 어제 밤 실행에 옮긴 결과, 조울증의 주기 중 울의 상태에서 이 영화를 보지 않은 것을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어제는 편안한 조증 상태에서 밥먹고 술먹고 (둘다 얻어 먹어)기분이 좋았고 집에 와서 씻고 보니 웬일로 맥주도 냉장고에 얌전히 앉아 있어 혼자 캬캬 거리며 맥주를 따고 컴퓨터 앞에 앉아 이 영화를 척 돌리기 시작했는데.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안되어 곧장 희희낙락의 시간은 끝이 났고 그에 이어 바로 마시는 맥주가 그대로 눈을 통해 다시 빠져나오기라도 하는양 계속 줄줄줄의 향연이 시작되었다. 나중에는 너무 슬프고 가슴 아프고 안되었고 속상하고 해서 목에서 꺽걱 소리가 날 지경이었는데 약간의 술기운이 감정의 오바를 가져왔을 지언정, 이 영화는 아마 근 5년 아니 10년안에서라도 나를 가장 많이 울게 한 영화로 단숨에 기록되었다.

주인공은 세이타와 세츠코 남매다. 세이타는 중학생 정도의 나이, 여동생인 세츠코는 다섯 혹은 여섯 살 정도이다. 배경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일본의 어디. 전쟁 때문에 엄마가 죽고 군인인 아빠도 죽고 결국 고아가 된 그들이 친척집에 맡겨졌다가 점차 냉대와 구박을 받고, 둘 만 방공호 속에서 지내면서 굶고 훔쳐먹고 굶고 하면서 겨우 살아가는, 죽는, 뭐 그런 이야기.

나는 전쟁의 가장 극단, 반대말은 아이들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누구도 납득할 수 없는 전쟁의 광기와 끔찍함을 아직 세상이 뭔지 납득은 커녕 미처 다 알지도 못하는 나이의 아이들이 겪는다는 건 지독하게 잔인한 일이다. 허나, 그래서, 나는 영화나 드라마에 아이가 나오면, 나도 모르게 잔뜩 긴장을 하고 실눈을 뜨게 된다. 흥, 얄팍할 수도 있어. 어린 아이가 주인공에다 전쟁이 배경이야?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웃다가 결국 맑고 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 장면 보여주려고? 흥! 내가 이번엔 그렇게 순순히 같이 울어줄줄 아시나? 하는 같잖은 반항심으로 말이다.

물론 <반딧불의 묘>는 그딴 알수 없는 반항보다는 무조건적인 기대감과 신뢰가 바탕에 깔려 있는 상태로 보기 시작했지만, 솔직히 주변 인간들이 울었다는 말에 약간은 경계하는 마음이 생겼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초반부터 그딴 마음은 눈사람 녹듯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미 나는 줄줄 울고 있었다. 그리고 한 번 시작된 눈물은 다 마셔버린 맥주병을 다시 채우고도 넘칠 만큼 멈추질 않았다. 함께 넘쳐버린 먹먹한 감정들은 밤사이 내내 나를 들쑤시고 떨게 만들었다.

새삼스레 전쟁의 무모함이니 잔혹함 같은 것들을 말하는 건 뭣도 모르는 내가 하기에는 너무나도 벅찬 일이고, 애써서 말하려 한다고 해도 어떤 단어로도 표현이 부족할 것이다. <반딧불의 묘>를 보고 그 배경이 된 전쟁에 관해서나, 스토리를 통해 나타내고자 한 감독의 의도나 덧붙여 많은 이들이 칭찬해마지않는 그 섬세한 동작과 표정의 표현에 관해서조차 나는 잘 모르기 때문에 뭐라고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내가 설사 잘 안다고 해도 그것에 관한 많은 정보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나는 역시 할 말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마음을 진정으로 흔들고 움직일 수 있는 힘을 만났을 때, 진정으로 감.동.했을 때는  진짜 할 말이 없어진다. 그저, 부르르 떨면서 맘껏 울면 그 뿐. 그리고 그러한 순간 순간들이 주는 힘으로 어쩌면 계속
살아 갈 수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다연엉가 2004-07-07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그냥 퍼갑니다.

2004-07-08 2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4-07-16 2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늘 책을 주문하면서 이전 주문 날짜를 보고 깜짝 놀라버렸다. 헉, 3월 30일.
오늘이 6월 12일이니 무려 두 달 반이 지났다. 아무리 책을 안 사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주문을 하는 편이었는데, 책만 널름널름 사 놓고 안 읽더라도 내내 사고 싶은 책이 차고 넘쳐서 죽을 지경이었는데, 아- 지난 두 달 반동안 나는 무슨 짓을 하고 살았는가.

우선 안 좋은 일과 좋은 일이 번갈아 가며 일어나는 통에 경기도와 전라도를 계속 순방했고, 이사 비스무리한 걸 하고 난 후 적응 기간이 약간은 필요했었고, 나부랭이잡일도 시작해서 정신이 좀 나가있기도 했고. 뭐 생각해보니 평소 게으른 본성에 비추어서는 나름대로 약간은 바빴다고 쳐줘도 될 것 같다. 게다가 몸이나 정신이 왔다갔다 하는 동안 퍼마시고 깨고 또 퍼마신 술의 양은 얼마이며, 퍼먹고 깨어나는 데 소비한 시간은 또 얼마인가. 어쨌거나 이제라도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책과 친해지려 마음을 먹고 주문을 하기는 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여름이 왈칵 와서는 내 앞에 몸을 부려 놓고 있다. (젠장)여름만 되면 나는 정말 괴롭다. 왜냐하면 나는 더우면 원래 바보에서 더 바보가 되는 것도 모자라 아예 괴물이 돼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쨍한 여름 길에서 하얀 얼굴로 긴 머리를 휘날리고 가는 사람을 보면 그게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아니 저 사람은 땀도 안나나, 왜 저렇게 보송하냐? 아니 머리털이 목을 휘감고는 어깨 위에 와락 얹혀 있네. 우- 정말 안 덥나? 입으로는 연신 궁시렁대면서도 그 사람이 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질투의 눈길을 거두지 못하고 계속 쳐다보는 나는, 막상 머리모양이나 옷이 그 사람보다 훨씬 간편함에도 불구, 혼자서 얼굴은 불타오르듯 시뻘겋고, 온 몸은 땀이 줄줄 흐르다 못해 파리끈끈이 마냥 끈적대고, 옷은 후줄근한 물수건처럼 축축축하고...... 아마도 더워서 곧 죽기 2초 전의 인간 모습이 이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난 바로 더위먹은 괴물딱지가 되어버린다.

몸이나 머리나 모두 작동정지인데 오직 차갑거나 시원한 것만을 갈구하는 센서에만 미친 듯이 빨간 불이 들어와 깜박여대는 상태, 정말 싫다. 뇌가 흐물흐물해져서 비틀어짜면 육수가 찍 나올 것 같은 끔찍한 상태, 정말 너무 싫다. 진짜 여름이 싫다. 엊그제 읽은 소설 속 한 구절처럼, 아아아아아아아아 나는 언제까지 여름 내 수모를 당하는 기분으로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오전에 어느 분이 쓴 글을 보고, 알라딘 서재에 대해 생각하느라 머리 속이 복잡해졌다. 아직 이 공간을 어떤 의미로도 충실히 규정짓지 못한 상태에서 여전히 갈팡질팡 하는 나지만, 그 일련의 사건들을 접하게 되니 나도 모르게 참 마음이 아팠다. 그런 일을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나는, 과연 앞으로 얼마만큼의 진실을 스스로 대면할 수 있을런지...... 생각을 서둘러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는 소설을 좋아한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책 중에서 소설만을 편식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소설에 빠져 있다. 물론 한 때 그 치우침이 싫어서 일부러 소설이 아닌 책 만을 골라서 읽었던 적도 있지만 결국 그것들을 읽다가도 이내 머리를 식힌다느니(아니 뭐 대단하게 어려운 책을 읽은 것도 아니면서) 한번에 많은 지식을 섭취하면 까먹어서 안된다느니(실은 진도가 안나가서 그런 것이면서) 하면서 다시 소설책을 집어들곤 했었다.

언젠가는 거의 소설만 읽고 소설만 사서 쟁여놓는 나를 보고, 소설은 한 번 스삭 읽고 나면 그만인데 돈을 주고 사는 것은 조금 아깝지는 않으냐, 고 물어온 사람도 있는데,  단 한 번만 읽고 쳐박아 둔 소설은 거의 없고 최대 스무번도 넘게 읽은 것도 있는데 라고 내가 대답하자 그 사람은 뚱그런 눈모양과 함께  '왜에?' 라는 영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인지 말인지를 발사해서 내 입을 다물게 만들었었다.

사실 스스로에게도 내 지나친 편식이 썩 달가운 성향은 아니다. 더군다나 소설이 다분히 감정적인 글이라고 분류될 때, 내가 소설만을 편애하는 이유는 결국, 바로 내 자신이 지극히 감정적인 혹은 감상적인 인간이기 때문일거라는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과 맞닥뜨리게 되기 때문이다.     

언젠가 친구에게 내 어줍잖은 괴로움을 토로한 적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쓴 글을 보면 그 글이 신변잡기적인 것이든 그 이상의 전문적인 것이든 각각의 특성을 잘 살려서 두루두루 잘 쓰는데, 내가 글 못 쓰는 건 둘째치고 왜 도대체 내가 끄적이는 글은 무슨 주제로 써도 늘상 일기스럽기만 한 것이냐, 왜 나는 이다지도 논술을 못한단 말이냐, 진정 무식해서 그런 것이냐 아니 무식은 둘째 치고 왜 아예 논리라는 게 없는 것이냐 등등의, 친구와 하등 상관도 없고 친구가 해답을 알리도 없는 질문들을 토해내며 연신 친구를 괴롭혀 대었는데, 한참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그 아해가 휙 던진 한 마디에, 나는 간만에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넌 논리가 없는게 아니라, 객관성이 없는거야. 내가 볼 때 넌 무슨 일에서든 결코 객관적이 될 수 없는 사람이거든. 그러니까 글을 써도 주관적인 글 밖에 쓸 수가 없지. 지극히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거, 그게 바로 네가 말하는 일기 아니냐? 관심없는 건 보지도 듣지도 않는데 무슨 수로 네가 읽기도 싫어하는 류의 글을 쓰고 싶다는 거냐?

 

아, 솔직히 나는 그 친구가 그렇게 예리한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었다. 정곡을 찔린 아픔에 잠시 어리둥절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 친구의 말대로라면 글이 문제가 아니라 내 자체가 구제불능이 아닌가. 무슨 일에서든 객관적이 될 수 없다니!! 정말로 강력하게 부인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내가 그토록이나 이기적인 인간으로 살았었나 하는 생각이 새삼스레 커다란 덩어리로 가슴에 와 박혔고 내가 내 안에만 갇혀서 혼자 무식을 들이파고 있었다는 사실이 고스란히 제대로 실감이 났다.

내 이기심의 깊이를 파악한 그 날, 난 달라져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역시나 별반 달라지지 못했다. 여전히 감정적인 글을 쓰고 소설만 읽으며 나쁜 눈으로 한 곳만 바라본다. 하지만 그 날 친구가 가한 일침 덕으로 난 내가 구제불능에서 조금은 구제가능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요즈음, 조금씩 더 노력 중인 나에게 힘차게 손을 내밀어 준 알라딘에, 고맙다는 말을 몰래 남기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알라딘 서재를 알게 된 후 이곳저곳 잘 꾸며진 서재들을 방문하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서로 참 따뜻하게 엮여져 있구나, 하는 것이었다. 알라딘에 처음 블로그가 생겼을 때 그저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이려니 하고 단순하게 생각하며 가끔 일기 비슷한 글이나 끄적이던 나에게, 그 모습은 나의 무지함에 일격을 가하는 동시에 문득 부러움으로 다가왔고 그 순간적인 기분에 와락 고무된 나는 그 날로 은밀히 물밑작업에 착수,  비록 남들처럼 멋지거나 훌륭한 서재는 아니더라도 페이퍼도 쓰고 리뷰도 많이 올려서, 유일하게 활동하던 인터넷 동호회 하나를 맘 속에 잠궈둔 이 후 냅다 방구석에 처박았던, 내 관계맺기의 가능성을 다시 넓혀보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계획이 생각으로만 그쳤다는데 있다.

일단 서재의 핵심인 리뷰를 쓰자면 우선 당연히 책을 읽어야 하는데, 몇 달 째 정서산만이 극을 달리면서 책을 한 권 읽는데 (젠장)몇 주일씩 걸려버리니 도저히 건덕지가 없었다. 그래서 예전에 읽은 책이라도 다시 쓱 보고 리뷰를 쓰리라 하며 책꽂이에서 한 권 씩 꺼내보며 고르는데, (젠장)내용이 기억나는 게 없어 그것조차 새로 다시 읽어야 할 판이었다. 안되겠다 싶어 페이퍼에 집착하리라 마음을 가다듬고 모니터를 노려보며 손가락 운동을 열심히 해댔지만,  소소한 일상을 멋진 글로 승화시키는 능력은 원래 없으니 기대도 안했지만, 글 하나 쓰는데도 계속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다 막 이틀씩 걸려버리고 하니 슬슬 만사가 귀찮기 시작했고, 결국 책도 안 읽히고 글도 안 써지니 혼자 허부적대다 술마시고 노래하고 잠이나 자게 되고, 한 순간이나마  넘쳤던 희망과 불굴의 의지는 반복된 좌절과 번뇌 속에 그렇게 조금씩 마모되었다.

내가 다른 서재를 내 서재보다 더 자주 들랑거리며 글들을 읽어대는 동안 난 그저 유령처럼 둥실 날아다니며 일부러 발자국은 안 남겼다. 아니 못 남겼다고 하는 편이 더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사소하게나마 인사를 남기는 것은 그 서재 주인에게 제 서재에 한번 오셔도 좋지요, 하고 말을 건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코멘트를 달고 싶다가도 왠지, 밥이나 반찬은 커녕 물한모금도 없는 집에 손님을 부르는 것 같은 마음이 자꾸 들어 그저 나중에 한 상 차리면, 하는 얼토당토 않은 생각으로 계속 미루기만 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결정적인 문제는, 나의 산만함이나 게으름, 소심함 같은 단점이 아니라 나라는 인간 자체이다. 관계맺기에 서툴고 그 서툼에 지친 상태, 마음이 닫힌 상태에서는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을진데, 나는 그저 벽 뒤에 숨어서 가끔씩 벽 위로 손이나 내밀어서 나 여기 있다네 같은 짓거리만 반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늘상 그랬듯 포기가 빠른 나는, 처음의 의지 같은 것은 싹 다 잊어버리고 어차피 혼자만의 공간이라는 둥, 내성적 성격의 한 경지인 내게 천지사방으로 열려 통하는 블로그라는건 원래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둥 하며 다시 게으름 속에 스윽 침잠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문득, 가끔씩 이 곳에 오는 사람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도대체 언제까지 숨어있고 싶은 건지 조용히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그런데 뻔뻔한 자식이 대답을 안한다. 그래도, 아마  오래는 아닐 것이라 믿으면서, 가상으로나 실상으로나 내가 누군가에게든 미안한 일은 하지 않는 모습이 되기를 계속 다짐해야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다연엉가 2004-06-08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에도님 벌써 숨어있기는 끝났는걸요.^^^ 괜찮아요...저도 살짜기 와 봤는데 종 종 남길까요^^^^^^^

다연엉가 2004-06-08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글씨 저렇게 작게 적은 거 다 작전이죠^^^ 그래도 저는 컴터에 코를 박고 열심히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