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자란 세계는 입대신 눈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사는 무뚝뚝한 침묵의 세계였다.
그곳의 사람들은 다정하고 부드러운 말을 건네는 것을 쑥스럽고 어색한 것으로 여겼고
말을 많이 해야 하는 것조차 불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들은
예쁜 새 옷을 잘 어울리게 입은 사람을 보고 해줄 수 있는 최대의 찬사가 그저 '괜찮네'이고
좋은 상을 받아오면 말 한마디 없이 그냥 있다가 다음 날 조용히 벽에 걸어두는 게 전부이고,
우울한 사람을 위로해야 할 때 가만히 등을 쓰다듬는 대신 괜히 어깨를 툭 치며 장난을 거는,
마음은 있지만 표현이 서툴고 전하는 방법을 모르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마음에 드는 아이에게 연필 한 자루 사탕 한 알을 숨겼다 전해주는 대신 몰래 다가가 머리를 잡아 당기고 고무줄을 끊고 치마를 휙 뒤집는 짓을 일삼던 장난스러운 아이들처럼,
나도 그렇게 서투르게 살았다.
돌아서면서 바로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좋은 사람에게는 늘 퉁명스럽게 대했고 못되게 굴었다.
마음 속으로는 이미 그 사람의 때 묻은 발가락까지 좋아할 준비가 되었으면서도
겉으로는 늘 털털한 척 장난을 걸고 시비를 걸면서 약올리고 상처를 냈다.
마음에 담긴 것, 그 안의 말들이 조금이라도 새어나갈까 전전긍긍하면서 항상 바짝 보초를 서야했던 피곤한 시간들. 결국 내가 먼저 지쳐 나가떨어지기가 일쑤였다.


여섯 살 때까지 시골에서 살았던 나는 할머니에게 업혀서 컸다. 공립고등학교 교사였던 부모님은 4년마다 학교를 옮겨 다니셔야 했는데, 대가족을 이끌고 이사를 다니는데 지치자 아예 적당한 곳에 집을 장만하고 할머니에게 나와 형제들을 맡기셨다. 그리고 내가 태어난지 얼마 안되었을 때 조금 먼 학교로 발령받으신 부모님은 그 때부터 거의 주말에만 집에 오셨다.

엄마 아빠라는 말보다 할머니라는 말을 먼저 배워야했던 나는, 할머니가 손주를 키우면 버릇이 나빠진다-는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해야 하듯 많이 늦되고 모자랐으며 순하고 말없는, 할머니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하는 쑥맥으로 자랐다. 자기보다 어리고 조그만 아이에게 얻어 맞고 우는 덩치 큰 아이, 엎어지면 코 닿을 데 있는 유치원에도 혼자 못 가서 아침마다 안 가겠다고 우는 아이, 친구에게 인형을 빼앗기고도 오히려 '한 번 만져보면 안 될까' 하고 말하던 바보같은 아이. 그게 바로 여섯 살의 내 모습이었다.

엄마 아빠는 어린 내게 낯선 존재였다. 하지만 동시에 항상 보고 싶고 그리운 사람들이었다. 무뚝뚝한 성격의 부모님은 나름의 방법으로 나를 사랑하셨겠지만, 그걸 알기에 난 너무 어렸다. 그래서 매주 월요일 새벽마다, 엄마 아빠가 조용히 일어나 할머니에게만 살짝 인사를 하고 서둘러 가실 때마다 어쩌면  '버려지는' 느낌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더 착하고 좋은 아이라면 부모님이 나를 두고 가버리진 않을거라 생각했던 것일까. 주말이 되면 나는 유치원에서 칭찬받은 그림을 가져다 자랑을 하고 글자를 이만큼이나 배웠다고 시범을 보였으며 잔돈을 많이 모은 저금통을 엄마에게 선뜻 주기도 했다. 마치 공지영의 소설 '착한 여자' 에 등장하는 그 바보같은 주인공처럼, 내가 더 잘할게. 가지마. 내가 더 착할게. 제발 나를 버리지마. 매달렸던 그 주인공처럼. 나는 '착한 아이'가 되기 위해 정말 최선을 다 했다.


하지만 나는 이젠 더이상 '착한 아이'가 아니다. 그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이기적인 인간일 뿐이다. 하지만 매 순간 어떤 결정 앞에서 애매모호해지는 내 성격 속에는 아직도 작게 그 '착한 아이'가 살아남아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서재를 시작하면서 내가 가장 경계한 것이 바로 내 속의 그 녀석이다.
나는 나만의 공간이면서도 한 없이 열린 이 곳이, 몇몇 사람들일지언정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있다는 그 사실이, 나를 변형시킬까 두려웠다. 그리고 실제로 무난하기 위한, 잘 쓰기 위한 압박감이 당연하다는 듯 나를 찾아왔다. 즐겨찾는 분이 다섯 명이 되었을 때, 난 내가 생각해도 진짜 과감하게 그 압박감들을 모두 한 방에 내다버렸다. 그저 이 곳은 내 방일 뿐이다, 굳게 아로새겼다. 누구의 눈치도 절대 보지 않겠다고, 정말로 다짐을 했다.

무뚝뚝한 나의 부모처럼 나는 겉으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재미없는 인간이지만
좋아하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기보다는 아이스케키를 하며 히죽대는 인간이지만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모자란 스스로를 지켜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받기 위해서 무조건 애쓰고 노력하지는 말자고
모자라면 모자란 그대로 존재하자고, 그런 다짐으로 나는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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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8-14 07: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딧불,, 2004-08-14 0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정말 타스타님 말씀처럼 어찌 이리 제가 쓴 것만 같은..

냉정하고 이기적이다가도 한번씩 '착한 여자' 컴플렉스에 허우적대는 것이 저랍니다ㅠㅠ

비로그인 2004-08-14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에도님, 글 잘 쓰시네...

2004-08-14 1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연엉가 2004-08-14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돌이 얼매나 잘 쓰는데...그런데 이제까지 내가 눈이 아파서 죽는 줄 알았다는것 아니겠수....이제는 그냥 안 꼴치고 봐도 잘 보이는구먼^^^^

어디에도 2004-08-14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뭐라뭐라 댓글을 쓰다가 휙 삭제를 해버렸네요. 전 댓글 남기는 것이 왜이리 어렵나요. 그저 님들 것만 보고 헤벌쭉 웃다가는 제가 할 말을 자꾸 까먹어요.
짧고도 강력한 응원을 속삭여주신 님,
그리고 반딧불님, 복돌이님, 책울타리님의 옆구리 근질근질한 칭찬. 고맙숩니다.
아우 저는 점심 안 먹어도 배가 부르려고 해요.(흑, 실은 아직 점심을 못 먹었다는... 책울타리님 서재를 일부러 안 가고 있다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