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나라에서 십년넘게 살다 보니 자주 혼잣말로 나오는 푸념이 있다. '이건 영어도 안 되는데 한국말도 안 된다'는. 얼핏 들으면 이해가 안 가는 아니 오해받기 딱 좋은 대목이라 그냥 혼잣말로 혹은 동변상련인 이들끼리 농담삼아 하는 푸념이다. 허긴 나도 여기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누군가의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영어가 안 되는거야 그렇다치고 아무리..한국말이 안 될라고.대체 한국에서 살아온 세월이 몇년인데 여기서 고작 몇년을 살았다고 한국말을 버벅거리게 된다는게 이해가 되지 않지 않았으니까. 같은 한국사람인 줄 알면서 영어로 얘기하는 사람들에 대해 심한 거부증세를 보였으니까. 헌데 여기 살아온 햇수가 늘어나면서 그런 엄격했던 잣대의 눈금은 점점 헐거워져갔다.  

영어를 잘 하고 싶은 맘에 의식적으로 삼사년동안 영어만 쓴다면 한국사람들하고 섞이지 않고 지내는 이들한테서 흔히 보여지는 모습인 우리말 할 때 엄..엄..할 수 있겠구나...하는 정도까지 이해하게 된 건 학교가는 시간에만 영어에 노출되어있는, 집에 돌아오면 가족들이랑 늘 한국말을 하는 나 자신조차도 언제부턴가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나 친구들이랑 통활할 때 적당한 우리말 표현이 생각나지 않아 더듬거나 그게 뭐지..그거 있잖아...로 상대방의 도움을 받는 증세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 대해 짜증날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특히 영어를 전혀 모르는 팔순넘으신 나의 오마니랑 통화할 때 전처럼 주고 받던 표현들로 얘기하려고 할 때 마땅한 어휘가 생각나지 않는다. 나이탓인가...여기 산 짠밥탓인가..하다가 나 역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영어와 우리 말을 적당히 버무려 쓰는데 많이 길들여져있구나. 한국에서 삼십년넘게 살았고 여기선 겨우 10년 살았는데 이런 증세가 나타나는 걸 보니 이젠 남한테 뭐라고 할 주제가 아니다 싶어진다.  

기실 미국에서 오래 된 사람들은 대화에 영어단어를 섞어 쓰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없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의식적을 하는 이들이 더 많은 지도 모른다. 기억나는 그림이 몇개 있다. 미국 온 첫해였나. 그때 살던 가족 기숙사 빨래방에서 들었던 한 한국 아주머니가 아이들한테 하던 말씀을 아직도 기억한다. "얘들아..too late이야.. hurry up해야지.." 그때 한국에서 갓 온 내 반응은 도대체 영어야 우리 말이야...였다. 제대로 된 영어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우리말도 아닌 표현들은 여기선 많이 들을 수 있다. 어떤 분들은 한문장을 말씀하실 때 조사를 빼고 다 영어단어로 채우시기도 한다. 그런 모습들이 그닥 좋아보이지 않았던 탓도 있고 무엇보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입장에서 우리 (남편과 나)는 의식적으로 그러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 집에서 우리말만 쓰게 하는 아들내미한테도 제대로 된 한글을 가르쳐주고 싶은 맘에서다. 그럼에도 가끔 서로에게 그런 증상이 보이면 넘어가지 않고 서로 지적해준다. 그런 증세는 부끄럽게도 남편보다는 내가 더한 듯 싶다. 무심결에 우리 말을 찾기 보다는 그냥 영어단어를 집어 넣어 얘기하는. 아들한테 그러지 말라고 해놓고 어느새 내가 그러고 있는게다. 그럴 때마다 반성하게 된다. 그래도 나도 모르게 물건이 떨어지면 '에구머니" "어머나"가 아니라 "읍쓰"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걸 보면 나도 어쩔 수 없다 싶다.  

영어와 한글을 적당히 버무려 쓰는 것에는 나보다 여기서 자라고 공부하는 아들이 몇수 위다. 처음 학교보낼 때 (여기의 유치원 전 과정, pre-school) 알파벳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고 그냥 학교에 보냈는데도 영어에 노출되는 시간이 많은 탓인지 영어로 말하는게 훨씬 편한 아들과 친구들이 말하는 걸 들으면 알게 된다. 심할 때는 가령 "game에서 attack했는데.. win했어요" 라던가 "thirsty한테 water drink되요?"라는 식으로 조사만 빼놓고 영어단어로 문장을 채우던 어느 교포분의 화법과 다르지 않다. 물론 그럴 때마다 우린.. 아들의 표현을 제대로 된 표현으로 바꿔서 얘기해주고.. 고쳐서 다시 말하도록 한다. 아들과의 대화에서 그런 교정(?) 절차는 아주 일상적인 것인 우리집 그림이다. 허나 맘 한편으로 이렇게 자꾸 고쳐주는게 오히려 우리말에 대한 흥미를 떨어뜨리는게 아닌가 은근 걱정을 하기도 했었지만 그렇게 하길 한글공부를 시작한 4살 이후부터여서 그런지 아들은 바로 잡아 주면 고쳐서 얘기하곤 한다. 물론 한번에 고쳐지지는 않는다.  

기실 재밌는 건 그런 교정을 아들만 받는 건 아니라는 거다. 아들도 엄마의 잘못된 언어 습관을 얘기해주곤 하기에 하는 말이다. 언젠가 신호등을 보며 얘기하는데 듣고 있던 아들이 하는 말, "엄마..저건 초록색인데.. 왜 맨날 파란색이라고 하세요?" 그러고보니 내 아주 오래된 습관중에 하나다. 모르긴 해도 나만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특히 사십이 넘어가는 나이의 사람들은 같은 증세가 아닐까 싶다. 아들의 지적에 그래..맞어..왜 신호등 색은 초록이 아니라 파란색이라고 하게 되었는지 스스로 의아했던 적이 있었다. 또 한번은 바깥에서 논다고 나가는 아들한테 문 닫고 나가라고 하니까 신발을 신던 아들이 날 쳐다본다. 알고 보니 도대체.. 문닫고 어떻게 나가라는 거냐는 게다. 그렇게 한 두번 지적하던 아들, 엄마의 그런 표현들이 쉽게 고쳐질 증세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는지, 아니면 자기도 익숙해졌는지..요즘은 별로 토를 안 단다. 혹 나중에..우리 아들도 누군가에게.. 문닫고 나가라는 앞 뒤 바뀐 말을 엄마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면 이 또한 스스로 자꾸 경계해야 하는 말 습관중에 하나다.  

남의 나라에서 살면서 우리 말을 제대로 쓰는 것에 대해 좀더 철저하게 의식적일 필요가 있음을 자주 깨닫는다. 더우기 아이를 키우는 부모 입장이라면...더 더욱. 영어와 한글을 그렇게 섞어서 쓰곤 하는 우리들의 무의식적인 표현들이...아이들로 하여금 영어보다 우리 말에 대해 둔감해지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기실 여기서 생활하는 아이들한테는 우리말보다 영어가 편한 건 당연할게다. 아들이 또래 친구들하고 놀 때 보면 알 수 있다. 어릴적엔 그렇게 익숙해진 뒷끝에 집에 돌아와서도 자기도 모르게 아빠, 엄마한테도 영어로 얘길 할 때도 있으니까. 그럴 때마다 그냥 넘어가지 않고 다시 우리 말로 얘기하도록 지적하곤 했다. "아들, 아빠 엄마가 미국사람으로 보이냐??"..며 장난을 섞어 유도하기도 하고. 그럴라치면 그제서야 아차하는 얼굴로 씩 웃고는... 우리말로 다시 얘기하곤 했다. 물론 요즘은 그런 과도기가 지났으니 집에서는 확실하게 우리말로 얘기하고 있다. 그래도 한국에서 사는 친구들에 비하면 아직은 많이 서툴다. '요'자를 빠뜨린다거나..했을 때도.."어른하고 얘기할 때 붙이는 거는 존댓말써야지" 하고 지적해 주면 아들은 잊어 버렸던 '요'자를 끝에다 붙여 다시 얘기 한다. 가끔은 어미를 바꾸지 않은채로...그냥 끝에다 '요'만 달랑 붙인 덜된 말로. 예를 들어 "엄마..가자요" 라던가.."모모 했다요"처럼 말이다.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12살인데도. 아들..뭐뭐했다요..는 언제 졸업할래..하고 물으면 그냥 씩 웃는다. 우리말이 많이 어렵다면서. 매일 매일 저녁시간에 하는 30분 한글 공부 때마다 아들은 어려워요..를 입에 달고 한다.  

그래도 기특한 것은 어려워도 하기 싫어도 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는 게다. 그렇게 하기 싫으면 좀 쉬자고 해도 아들은 그냥 하겠단다. 그 이유는 자기가 '한국사람'이니까..한글을 모르면 안 된다는게다. 내 아들이지만 참으로 기특하다. 주변 사람들중에 우리가 너무 엄하다고 하지만...말하는 습관에 대해서 만큼은 우리 자신한테나.. 아이한테나.. 좀더 엄격해질 필요가 있다 싶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이나 우리 모습에 관대하게 넘어 간다면 먼후일 아이들은 영어로 얘기하고 아빠 엄마는 우리말로 얘기하다가 결국 최소한의 대화만 나누게 되는 '의사소통 불능'의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는 걸 알기에. 그게 흔하게 보아온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모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사소한 것에서부터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닌게다. 더군다나 그 나라의 말을 능숙하게 잘 한다고 해서 그 나라 사람이 될 수는 없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가끔 여기서 지내다보면 영어를 잘 한다는 이유로 마치 미국사람이라도 된양 처신하는 이들이 있다. 물론 영어를 배우기 위해서, 혹은 공부를 하기 위해서 온 유학생들에겐 '영어'가 목적일게다. 허나 영어가 다가 아닌 것을, 모르고 있는 듯 해 안타까울 때가 많다.  

우린 그렇게라도 일상적으로 '길들여 질수 있는' 말들에 민감해지고 익숙해 지지 않으려고 경계하는 것이 남의 나라 땅에 살면서 우리의 아이한테..그리고 우리 자신한테 뿌리가 '한국인'임을 잊지 않게 해주기 위해서다. 우리 자식을 영어만 잘 하고 자기가 어느 나라 사람인가를 모르는 속칭 겉은 노랗고 속은 하얀 '바나나'로 키우지 않기 위해 부모로서 포기하지 말아야 할 최소한의 것이라는 생각에서 일상적이고 사소한 것이라도 그 경계의 끈을 놓치 않으려 하는 게다. 그래야...우리아들이 남의 나라땅에서 소수인종으로 살게 되더라도 주류와의 '다름'에 대해 움추리기 보다는 그 '다름'을 자부심을 갖고 장점으로 받아들일 줄 알길 소망하면서 말이다. 그건 남의 나라땅에서 자식을 키우는 부모들이 자식들한테 심어줘야 하는 자존감의 뿌리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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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러울게 없는 말이지만 여기서 산 짠밥이 한해 한해 보태어질 수록 절감하는 건
언어는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는 거다.

다른 나랏말을 배우는데 있어 일상생활의 기본적인 수준의 표현들은 반복적인 'practice'로 익혀질 수 있지만
그게 어느 정도의 수준에 달하게 되면 누구나 부딪히는 벽이 바로 '문화차이'일게다.

물론 우리같이 머리가 다 굳은 후에..쉽게 말해..늙어서 남의 나라에 온 이들한테는
그나마 연습만으로 해결 될 초급표현들도 조차도 쉽지 않을 때가 많지만..

미국대학은 외국학생들의 영어실력을 평가하는 잣대로 TOEFL 점수를 요구한다.
이 시험이 수업을 따라 갈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름하는 듣고, 말하고, 쓰기를 평가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허나 몇년 전까지만 해도 이 시험은  'listen and comprehension', 'written expression', 'reading'이었는데
최근 시험의 형식이 Internet으로 바뀌면서 본래의 의도대로
흔히 우리가 말하는 문법(writeen expression)이 빠지고 'writing'이랑 'speaking'으로 바뀌었다.

평소 나 역시 ETS의 독점과 횡포에 침을 튀기는 이들 중에 하나지만  이전 시험형식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과
시험형식의 변화엔 긍정적이다.  그건 과연 이전의 시험형식으로 그 사람의 영어실력을 제대로 평가하기엔
문제가 많다데 생각이 같기 때문이다. 그건 여기서 토플은 고득점이라는데 일상생활에 필요한 표현조차
쉽지 않아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기에 하는 얘기다.
그에 비해 점수가 낮아도.. 별 무리없이 대화할 수 있는 친구들을 주변에서 많이 봤기에..

허니 학생을 뽑는 학교 입장에서 보면 높은 토플점수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게 된거고 
그런 학교의 요구에 따라 ETS는 아시아 권 국가들의 점수밭인 문법을 빼고
취약지구라고 할 수 있는 '말하기'를 필수로 집어넣은게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얘기하자면 
듣고 쓰고 읽기의 경우...기실 어느정도 짠밥이 되면 저절로 귀가 뚫리게 마련이다.
처음엔 연음(slur)때문에 안 들리던 말들이 들리게 되고 그러기 위해 제일 좋은 교재가 바로 TV다.
나같이 TV랑 안 친한 사람도 온 신경을 집중시켜가며 봤으니까..결국 그 버릇 남 못 줘서 오래 못 간 나에 비해
TV랑 상당히 많이 친한 남편의 경우 지금은 나보다 훨씬 잘 듣게 된 게 TV 교재(?)덕이라는 건 인정한다.
읽고 쓰기의 경우도 학생이라면 질리도록 읽게 되는 페이퍼나 교재들덕에  
점점 더 매끄럽고 다양한 표현들로  페이퍼를 쓸 수 있게 될게다.

물론 writing 역시 speaking만큼이나 쉽지 않지만.
그러나 말하기의 경우... 
더군다나 쉬운 일상의 표현들이 발목을 잡는 경우가 허다하다.
성문종합영어 세대인 나는 여전히 문법이나 '쓰기영어'에 익숙해있어서 그런지
처음 여기 왔을 때.. 제일 어려웠던게..presentation할 때였다.
 

그때 긴장한 나는 페이퍼에다 썼던 표현들을 그대로 읽다시피 했었다. 그때 듣던 친구들의 반응은
대체...제가 무슨 얘기를 하는 건가..하는 그런 얼굴들을 쳐다보면서 목까지 빨갛게 달아올랐었다.
그 다음부터는 문어체들을 구어체로 옮겨 발표도 가능한  일상적인 쉬운 표현으로 하려고 했었다. 
제일 어려운 건 토론(discussion)이다. 특히 미국 젊은 친구들이랑 토론할라치면...
그네들의 입에서 쏟아지는 그 암호같은 slangs을 이해하기가 정말 힘들었다.

물론 얼굴의 두께가 만만찮은터라... 겉으론 전혀 동요하지 않은 척...
니들 하는 말.. 다 이해한다는 느긋한 표정의 포카 페이스를 하고 앉아 있긴 했지만...
머릿속은 그네들의 속사포같은 영어가 엉켜....토론의 갈피를 잡는데.. 진땀을 빼기 일쑤였으니까.

그런 우리 노땅들에 비해...아이들의 영어 익히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
누구말대로 그네들은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그대로..따라하고...더듬거리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고
아무한테나.. 어설픈 영어를 주절대기 일쑤인.. 아이들을 보면... 어떻게 해야 하는 지...
그 '자세'들을 알 수 있다.

우선... 아이들은 영어에 대해 '무식'하다면
무엇보다 '용감'해질 필요가 있다는 새삼스런 진리(!)를 환기시켜준다.
여기서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은 한번쯤은 겪어보았을게다.  
자기 아이가 또래 미국얘나 미국 사람들한테 보란듯이 덜된 영어를 떠들어대는 것을
그때.. 무슨 얘긴지 도통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미국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괜히 그네들의 부모들 얼굴이 더 화끈거릴데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이런 그림은 제대로 된 영어를 구사하기 이전에 아이들이 거치는 필수과정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시행착오를 통해 아이들은 또래얘들과 어울리는데 필요한 표현들을 익히게 되고
아주 짧은 시일안에 미국 친구들과의 의사소통에 전혀 문제가 없을 정도가 된다.
시행착오를 쪽 팔려하지 않는 이 배짱... 부럽기 짝이 없는 덕목아닌가...
지금이 만으로 12살인 아들이 어렸을 때 친구나 어린 또래얘들이랑 놀 때
녀석들이 쏟아내는 엉터리 영어를 듣고 있다보면  웃지 않을 수 없다.

그네들은 자기네들이 문법적으로 옳은 표현을 써야 한다는 거나
자기의사를 표현하는데 사용되는 모든 단어를 다 알아야 한다는 식의
어른스런 강박관념 같은건 별로 키우지 않는듯이 잘 모르는 표현들은 거침없이 우리말로 대신 쓴다.
그리고 재밌는 것은 그 말을 들은 미국얘들은 그런 broken 표현들을 알아 듣는다. 별 무리없이.. 
 

몇가지 예로...단어가 딸리는 한국 꼬마들은
Can you 묶어 this?,
where is my 신발?,
Are you going to 산책?,
I'm gona 달려...
등과 같은 되도 않는.. 웃지 못할 표현들을 거침없이 내뱉는다.
그럼에도 미국얘들은 이를 별개 단어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 하나의 context속에서 이해하기 때문인지..
그네들의 질문과 요구를 다 이해하고..끈을 묶어주고..신발을 찾아주고.. 고개를 끄떡인다. 
 

그래서..우린 짠밥영어를 무시할 수 없는거다.
이곳에서 짠밥이 오래되다 보면.. 하나하나.. 그 낱낱의 표현들이 다 들린다기 보다는
맥락속에서 주고 받을 수 있는 대화를 짐작하게 되는 능력이 쉽게 눈치밥에 관한한
고수가 되기 때문일게다.

남편의 지론...
영어를 포기하니 들리더라는 얼핏 듣기엔 '선문답'같은 말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우린 모든 표현들을 다 들으려고 개개의 단어들에 집착하다  
결국 그 말의 흐름을 놓치는 경우가 많은데....그의 말대로 디테일을 적당히 포기하고 들으면...
오히려 굵은 줄기들을 잡을 수 있다는 그의 말은 얼핏듣기엔 잘난 척한다는 비난을 면키 어려울 듯 싶지만
한편으로는 공감가는 대목이다. 나 역시 소소한 표현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리고
한 발자욱 물러나 전체 맥락을 이해하면 진짜 잘 들린 적이 있기에 하는 얘기다.

허나 우리처럼 머리굳은 어른들의 말하기는 어찌되었건간에 쉽지 않다.
아이들처럼 적극적인 자세로.. 틀려도... second language니까 그럴 수 있다는
느긋함을 갖고 열심히 떠들어 대다보면...언젠가는 삼박자가 골고루 갖추어진 제대로 된 영어를
구사할 수 있지 않을까 ...(I hope so..)

이제 우리 아들내미는 영어에 제법 익숙해져서인지
가끔 우리의 한국 본토배기 발음을 교정해주기에 이르른다.
요즘들어 조예준은 엄마의 r과 l 발음이 틀리다며 엄마의 구박에도 굴하지 않고 열심히 교정해준다.
내 귀엔 별 차이가 없구만... 구신같이 잡아내는 녀석이 처음엔 신통하다
요즘은 귀찮아 지기에 이르렀다.
아마.. 이 녀석도 적어도 영어 '발음하기'에 관한 한... 엄마보다 자기가 한수 위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듯하다.

그러나.. 난 아이들은 점차.. 그 수준이 높아질수록 문화적 코드의 차이를 느낄 거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십년을 살았다고 해도 native를 따라가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그런 문화적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일게다.

그럼에도 그런 차이만 어려울 정도의 '경지'에 이르려면... 얼마나??
아마도 내 수준을 볼 때 여길 뜨는 그 순간까지도 제대로 된 '영어'를 구사하는게 쉽지 않을거라는 걸 안다.
물론 글쓰기의 경우.. 자꾸 읽고 쓰니까.. 조금씩 나아지는 걸 느끼겠지만
더더욱 집으로 돌아가면 한국말만 써야 하는 결혼한 사람의 경우...
영어를 잘 하게 되는 건.. 요원한 '희망사항'으로만 남을 듯 싶다.

그럼에도...가끔 내가 영어를 못 하지 않는다는(?) 착각이 드는 건......
이건 순전히 짠밥탓이고.. 적당히 두꺼운 내 얼굴탓일게다...
말그대로 착각임에도 불구하고...영어 표현 공부를 접은 게 얼마나 오래되엇던가.
해서 매번 방학 계획에 난 새삼스럽게.. 영어 말하는 연습을 집어넣었다.
그러나 난 안다. 그게 단순한 표현부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얘네들이 쓰는 표현들과는 다른 어딘가 어색하다는 걸....그리고 그게 서로 다른 문화에서 살아왔다는게
가장 큰 이유라는 걸...그걸... 깨기는 쉽지 않다는 걸...여길 뜰 때까지...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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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돈도 없이 유학은 왜 왔데?"

누구는 그렇게 얘기했었다. 우리가 아는 누군가가 돈 없어서 고생한다는 식의 뒷담화가 오가다 보면 으례 누군가의 입에서 툭 하니 던져지는 저 말을 들으면 우리가 바로 그 돈도 없으면서 더군다나 장학금받을만큼 똑똑하지도 않으면서 유학이런 걸 온 주제들이라서 그런가..입맛이 쓰다. 허나..현실적으로 보면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돈도 없는데 누가 억지로 공부하라고 등떠밀어서 온 유학이 아닌바에야 그만한 고생할 각오는 하고 와야 하는거니까. 우리도 그랬으니까. 자기가 하고 싶어서 왔으니까 그 정도의 고생은 감내해야지..그렇게 고생할 지 예상 못했냐는 식의 그런 말들의 이면엔 유학이란건 주머니가 넉넉한 자들만이 꿈꿀 수 있고 해낼 수 있다는 다는 식 편견이 보인다. 적어도 내눈엔. 허나 그렇다고 가진 돈도 없고 장학금을 받을 만큼 똑똑하지도 않은 우리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유학이란 걸 꿈꿔보지도..시도해보지도 못한다는 건가..하는 맘이 불끈한다. 기실 그런 편견을 깨주는 가난하지만 성실하게 유학생활을 버쳐나가는 청춘들이 주변에 많다. 가진 것 없고 학교에서 돈 받아서 올 만큼은 안 되었지만 그래도 하고 싶다는 그 맘 하나만 갖고 버티는. 그 맘이 진짜 공부하고 싶은 열정이건..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해보고 싶다는 바람이건 간에 일단 안되는 형편에도 불구하고 저지를 수 있는 용기..그리고 무엇보다 저지르고는 감당못해 우왕좌왕하거나 공부하고 싶은 맘보다 바람이 더 많다보니 결국은 공부를 접고 불법체류자 신세로 사는 이들도 있긴 하지만 꾸준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결국은 졸업하고 좋은 직장을 잡거나 공부를 계속하는 이들이 적쟎다. 물론 워낙 없이 저지른 일들이니까 초반 고생은 피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렇게 어느 정도 힘든 시간을 겪고 나면 다 길은 있게 마련이다. "다 길은 있다"...남들은 똥배짱이라고 부르지만 밖에서는 안보이지만 그 안에 들어서면 길이 있고 방법은 다 있다는게 내 세상사는 믿음들 중에 하나다. 실제로 처음엔 자기돈으로 학비를 대야 했지만 나중에 좋은 성적으로 장학금을 받거나 학교에서 일할 기회가 생겨 조금씩 나은 조건에서 공부할 수 있다. 시간이 좀 걸리긴 하지만...그래도 내돈 들이지 않고 부모님한테 더 이상 손 벌리지 않고..남의 나라 돈으로 공부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예들이 우리주변에 많으니 혹 형편이 안되서 유학을 접는 누군가가 있다면 난 꼭 그 얘길 해주고 싶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허나 현실적으로 그런 이들이 많진 않다. 물론 지극히 내 개인적인 경험에서 하는 얘기다. 중서부 한 주립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생활하고 겪은...그리고 이 남부로 내려와서 아직도 공부라는 하면서 보고 듣고 겪은..어찌보면 지극히 제한적인 경험이긴 하지만. 우리 주변엔 그렇게 고생스럽게 공부를 하는 한인유학생들 보다 여유있는 학생들이 더 많았으니까. 그런 이들의 눈엔 학비를 벌기위해 여름방학동안 뉴욕에서 웨이터를 하고 동네 야채가게에서 점원일을 하고 졸업할 때까지 학교 조교일을 하고 근로학생(student worker)으로 학교에서 청소일(janitor)을 하고 가죽옷 가게에서 아르바이를 했던 우리 부부의 유학생활이 유난스러워 보였는지...어떤 이는 우리한테 '수기'를 쓰라고 권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보내주는 돈으로 혹은 이미 갖고 있는 돈으로 넉넉하게 혹은 불편하지 않을 만큼 남의 나라에서 공부를 하는 그네들 눈엔 우리의 유학생활이 퍽이나 남달라 보였던게다. 허나 그렇게 살았던건..주머니가 넉넉하지 못해서도 있었지만.. 이 나이에..연로하신 부모님들한테 용돈도 보태드리지 못하는 데..우리가 자급자족해야 해야 한다게 우리의 생각이었다. 물론 장담할 수는 없다. 시댁이나 친정이 넉넉하셨다면..정말 힘들었을 때 금전적인 도움을 요청했을 수도 있을테지만 어느 정도 다 지나온 요즘에 와서는 힘들긴 했지만 그렇게 도움받지 않고 우리끼리 해낼 수 있었던 게 더 값진 경험이었다는데 남편도 나도 공감한다.  

허긴 유학생들 대부분이 상당히..좀..그럭 저럭 '있는 집' 자손들인 건 분명했다. 특히 장학금없이 등록금이나 생활비를 다 부모님들의 원조에 의존했던 학부생들 대부분은 다들 여유있어보였다. 그래도 우리랑 가까이 지냈던 젊은 친구들중엔 그런 부모님들이 보내주신 돈을 헛되게 쓰지 않으려고 낭비하지 않고 알뜰하게 지내는 친구들도 있지만 많은 친구들은 그런 여유를 즐기면서 지낸다. 새차를 뽑고 방학마다 미국 여기 저기 놀러다니고 때론 가까운 카지노에 가서 게임을 즐기면서. 누군가 그랬다. 학교 타운에서 차장사(car dealer)하는 이들사이엔 학기초가 되면 새로 정착하는 한국사람들이 최고의 고객으로 친단다. 이유인즉은 방금 시장에 나온 새모델을 그것도 신용카드가 아닌 뭉텅이 현금을 내고 구입하는 대부분이 외지에 자녀들만 두고 가는 한국부모님들이라니 그네들한테야 봉이나 다름없는게다. 소비가 미덕인 자본주의 나라에와서 자기 돈으로 그렇게 누리고 산다는 데 누가 뭐라 하겠는가. 그건 가타부타 할 얘기는 전혀 아니다. 허나 그런 여유로운 경제적 뒷받침이 자식의 유학생활에 그리 긍정적인 도움을 주는 것 같진 않다. 그건 공부보다는 놀꺼리..술문화나 밤문화 혹은 도박문화랑 더 친근한 유학생활을 보내게 하는 원동력(?)중에 하나가 바로 그런 금전적인 여유로움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큰 자식이니 이제 혼자 힘으로 해보라고 절제된 생활을 가르치려고 하시는 멋진 부모님들도 계시다.  

물론 그런 부럽쟎은 환경속에서도 세상경험을 한다는 차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제법 철이 든 젊은이들도 있다. 한 처자는 집 형편이 그렇게 힘들지도 않건만 자기힘으로 해보고 싶다며 졸업할 때까지 아르바이트를 쉬지 않고 했다. 물론 우수한 성적과 함께. 허나 남의 나라에서 공부를 하면서 아르바이트까지 해내려면 그것도 한두달이 아니라 끈질기게 해내려면 왠만한 절박함갖고는 쉽지 않다. 남편이 여름방학 3개월동안 뉴욕에서 웨이터를 하면서 학비를 벌었다는 말에 관광도 할겸 경험삼아 자기들도 한번 해보겠다며 남편의 조언을 받고 뉴욕을 떠났던 청춘들중 실제로 일해서 학비를 벌었던 이들은 한명도 없었다. 오히려 돌아오는 그네들 손엔 뉴욕 명품가게에서 구입했음직한 물건들이랑 그곳에서의 여행했던 뒷얘기들뿐이었다. 남편말대로 절박하지 않은 이들이 버티기엔 쉽지 않은게 유학생활중의 아르바이트일게다. 더군다나 그런 놀거리가 많은 대도시에서는 더더욱.

이에 비해 결혼을 해서 가정을 갖고 있는 대학원생들은 생활력이 강하다. 거의 대개가 입학할 때부터 학비를 면제받고 일주일 20시간씩 조교일을 하면서 공부를 한다. 지역마다 다르겠지만 적게는 한달에 800불에서부터 많게는 이천불넘게까지 받는 그 조교월급으로 생활을 한다. 남편이 학생이었던 시절 우린 한달에 평균 천오백정도 되는 돈으로 한달을 살았다. 한국돈으로 백오십만원정도되는 돈으로. 그 금액엔 내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보탠 삼백불정도의 돈이 포함되었다. 그 돈에서 생활비랑 공과금을 빼고 나면 남는 돈은 한 사오백불정도. 한국돈으로 환산하면 오십만원남짓한 돈으로 한달 생활비를 해야 하니 식비빼고 나면 남는 돈으로 한달을 살기란 참으로 빠듯함에도 한국집에서 보조없이 우리처럼 자력으로 살아야하는 유학생들은 특히 그 안사람들은 그런 빠듯한 가계를 꾸려가느라 알뜰하기 그지없다. 같이 모여앉아 얘기하다보면 어디서 세일을 싸게 하고 어느 가게가 물건을 더 싸게 파는지를 알려주는 알뜰주부들이 늘 있었으니까. 아마도 대부분 주립대학에서 공부하는 대학원생들의 대부분은 다들 비슷한 형편들이었을게다. 

그런가 하면 혼자 몸도 아닌 온 가족을 데리고 온 대학원생인데도 조교자리없이도 한국 집에서 보내주는 돈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하며 여유있게 살다가 졸업하는 있는 집 이들도 많았다. 그런 집들은 경제적인 여유로 인해 한국에서 처럼 온갖 과외를 다 가르친다. 재즈댄스에다 바이올린 피아노 등등 해서 많게는 여덟까지 종목(?)까지 과외를 시킨다는 집도 있었으니까. 특히 그런 집에선 자기 아이들한테는 세일하는 옷은 절대 안 사입고 방학때 되면 여기 저기 놀러다니는. 해서 주변 다른 가족들이 참으로 많이 부러워했었다. 물론 그네들도 그 나이에 더군다나 혼잣몸도 아닌 온 가족들이 지내기 위한 생활비에다 한학기 생활비를 다 보조받으면서 살아야 하는 속내도 나름 안 편했을게다. 그렇게 시부모님들의 지원을 받아가며 살던 한 친구의 속앓이를 들어본 적이 있던터라 어찌보면 한국 부모나 형제한테 손 안 벌리고 자력으로 살아내는게 몸은 고되더라도 맘은 편하겠다 싶었으니까.

그렇게 여유로운 유학생활이 아니라 고생을 할 각오로 오는 누군가 있다면 고생할 맘의 각오 말고 반드시 필요한 마음 가짐이 있다. '절대로 딴길로 새지말기. 잠시 샛길로 새더라도 제자리로 돌아오기.' 그런 다짐이 필요한 건 공부를 하겠다고 남의 나라를 밟은 적쟎은 젊은이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샛길로 새서는 원래 자리로 돌아오지 않는다데 있다. 아니 한번 새면 돌아오지 못한다는게 더 맞는 말일게다 . 그 한 예로 뉴욕에서 아르바이를 했던 남편을 통해 들은 바에 의하면 대도시인 그 곳에서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한인 젊은이들 많다고 한다. 대부분이 한국가게에 사업체에서 일하는데 불업취업인 셈이다. 원래 그들이 미국땅을 밟은 목적은 공부다. 영어공부를 포함해서. 헌데 그들의 하루 일과 대부분은 공부대신 아르바이트에 쓰인다고 한다. 어떤 이는 아예 공부를 접은 채로. 특히 그렇게 하루 일하고 나서 손에 현금 쥐는 맛을 들린 청춘들은 일이 끝나면 돈을 쓰러 나간단다. 놀거리가 많으니 유혹이 그만큼 많은게다. 그런 모습을 보고 온 남편...주변 청춘들한테 그런다. 차라리 도시보다 이런 공부밖에 할게 없는 시골에서 하는 유학생활이 더 낫다고. 그건 너무나 많은 청춘들이 왜 자기가 여기에 왔는지 원래 이유를 잊어버리고 하루살이같이 살고 있다고 한다. 불법체류신세를 감당하면서말이다.

허니 유학을 막연하게 꿈꾸고 있는 누군가에게...기꺼이 고생할 맘이 있다면..딴길로 새지 않을 각오만 있다면.. 더군다가 젋다면 저질러보라고 권하고 싶다. 물론 일장일단은 있다. 벌어서 해야 하므로 돌아가다 보면 남들보다 시간이 더 걸릴 수도 있고..그 과정에서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힘들 수도 있다. 여기까지 와서 배운 영어가 남의 나라 땅 하나도 밟아보지 않고도 훨씬 잘 하는 이들에 밀릴 수도 있다. 그렇게 힘든 과정에서 얻는 경험이라는게 과연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각자 판단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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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떠나오기 전에 먼저 와서 공부하고 있던 대학원 동기한테 물은 적 있다. 거긴 평균 한달 생활비가 어느정도 드냐고. 그때 동기녀석의 대답은... 수준(?)에 따라 많이 차이가 난다..였다. 그땐 그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씀씀이에 따라 줄일 수 있는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감이 안 왔다. 허나 막상 살면서 드는 생각은 내가 했던 그 질문이 참 대답하기 뭐했던 막연한 질문이었겠다는거다. 왜냐하면 그 녀석말 그대로 우리의 눈높이에 따라 생활비가 많이 절약될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좀 더 나은 품질의 먹거리를 생각할 주머니의 여유가 있다면 우리가 살던 동네에서 흔히 말하는 '돈 좀 있는' 사람들이 간다는 유기농(organic)가게에서 계란한줄에 월마트보다 세배가 넘는 돈을 주고 사먹으면서 살수 있는 반면 우리처럼 주머니 사정이 빠듯한 헝그리(hungry) 유학생들은 그저 만만한게 월마트(WalMart)이다. 가격이 싼 것도 이유가 되지만 또 다른 이유는 그 안에서 필요한 대부분의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말 그대로 원스톱(one-stop) 쇼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차가 없는 경우엔 그런 월마트은 더 없이 유용하다. 여기 저기 안 들리고 한 걸음에 일주일치 장을 다 볼 수 있으니까. 헌데 그런 한번에 해결할 수 있다는 잇점만 아니라면 기실 월마트보다 더 싸게 파는 곳들이 참 많다. 그 대부분은 월마트같은 대형 체인점이 아니라 동네(local) 가게들이다. 우리가 살던 그 동네에서는 먹거리를 주로 팔던 알디(ALD)라는 가게나, 동네 야채가게, 일반 공산품은 Dollar Tree, Dollar General (우리로 치면 천냥하우스)에 가면 아주 착한 가격의 물건들을 구입할 수 있다. 물론 품질에 대해 그닥 기대를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허나 그런 가게들이 몰려있는 것도 아니어서 싸는 이유로 그 가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기가 가난한 유학생들에겐 결코 쉽지 않다. 길에다 쓰는 시간이랑 기름값등을 따진다면 그닥 효율적인 장보기가 아닌 셈이다. 허니 한곳에서 대부분의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월마트이 우리처럼 가난한 유학생들한테는 제일로 만만한 장터다. 지금도 우리는 월마트가 제일 편하다.  

어느 동네든지 싱싱한 야채나 과일을 아주 싼값에 파는 동네(local)가게는 다 있게 마련이다. 한국에서 챙겨온 총알이 다 떨어져서 남편이 일년동안 아르바이트 했던 곳도 그동네 자그마한 야채 과일가게였다. 거기서 알게 되었다. 좀 상한 야채나 채소를 한묶음으로 모아서 1불에 내다놓으면 가난해뵈는 흑인들이나 중국학생들이 거의 다 사간다는 것을. 그 가게는 학교랑 가까이 있는데다 2불이나 3불어치만 사도 싱싱한 야채나 과일을 제법 한봉지 사갈 수 있어 차없는 가난한 외국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와서 자주 애용하곤 했었다. 짐작컨대 부자들이 잘 간다는 유기농가게의 가격과 비교해 보면 이런 작은 동네 가게를 이용하는 것도 생활비를 크게 절약하는 한 방법이다. 허니 동기녀석의 말대로 아주 저렴하게 살려고 작정만 한다면 크지 않은 금액이라도 식품비에서도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 수 있다.

기실 가장 많은 돈을 절약할 수 있는 건 '집세'에서다. 남편과 나는 아들내미가 없고 우리둘만 있었다면 트레일러하우스(trailer house: 자동차모양의 이동식 주택)에서 살았을게다.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다지만 한달 집세가 삼백불정도라니 몫돈을 절약할 수 있었을테니. 허나 정작 거기서 살아본 이들에 따르면 전기세가 장난이 아니어서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얘기도 들었고 아이들을 키우기에 주변환경이 그닥 좋지 않다 싶어..가끔은 우리 수준엔 좀 과하다 싶었던 학교 아파트에서 쭈욱 살았었다. 학교 아파트 (on-campus)는 외부 아파트에 비해 안전하고 무엇보다 학교 전기시설을 이용하기 때문에 전기세같은 공과금(utiliity)이 아주 쌌다. 그때 우리가 살던 곳은 방 두 개짜리의 30 평 정도되는 평수였는데 집세는 작년에 550불 정도였고 여름에 트는 에어컨이랑 겨울에 히터등을 포함한 공과금은 전기세랑 전화세 인터넷과 케이블등을 포함해 150불정도였으니까 집세랑 공과금으로 한달에 최소 800불정도가 나갔다. 헌데 그 가족 아파트가 얼마나 널찍하고 무엇보다 아이들 키우기에 좋은 환경이었는지 다른 학교로 전학(?)을 와서야 알았다. 그러기 전까지 우린 학교 가족 아파트라면 다 그렇게 왠만하게 살만한 곳인 줄 알았으니까. 허나 지금 살고 있는 아랫동네로 이사와서야 알았다. 우리가 살았던 그 학교 아파트가 아이들이 뛰어놀기에 부족함이 없는 풀밭과 놀이터 그리고 안전한 동네였는지를.

그렇다고 지금 살고 있는 학교 아파트가 그리 형편없는 건 아니다. 경제적인 면으로 치면 아주 저렴하니까. 건물이 워낙 오래되어 낡고 넓은 놀이터나 같은 쉼터가 없어 좀 삭막해 보이는 주변환경에 적응하는데 좀 오래 걸리긴 했지만 한달 집세(550불)에 전기세뿐만 아니라 전화세, 인터넷이랑 케이블 비용까지 다 포함되어 있으니 너무 착한거다. 그거 하나보고 참는다..아침에 일어났을 때 어디선가 출몰한 바퀴벌레들의 흔적도.. 오래되고 낡은 문들도...처음엔 영 적응이 안 되더니 점점 익숙해져서 그냥 저냥 저렴한 맛에 살아지는 기숙사다. 만일 전화세, 인터넷, 케이블등 공과금을 있는 그대로 다 내야한다면 당분간 내 공부때문에 윗동네에서 따로 떨어져 살고 있는 남편이랑 나랑 사는 데 드는 한달 생활비에 허리가 휘청했을게다.

이런 가난한 우리보다 더 심한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중국학생들이다. 그전에 살던 가족 아파트 기숙사는 평수도 제법 넉넉한 덕에 중국학생들은 그 한 집에서 두세가구가 모여 살면서 생활비를 절약한다고 했다. 물론 걸리면 쫓겨날 감인데 일단 입주를 하고 나면 그런 호구 조사는 안 하는 동네였으니 다들 눈감아 주는게다. 중국학생들 대부분은  학부생이 아니라 학교로부터 장학금을 받는 대학원생들이 많았는데...그럼에도 몸에 배인 절약정신에 집세랑 먹거리에서 절약한 돈을 중국 본토에 남아있는 가족들의 생활비로 보낸다는 말에 우리는 외쳤다. 졌다 (you win)라고. 그런 중국학생들의 무서운 헝그리 정신은 잘 살고 넉넉한 이들한테는 찌질한 모습이었겠지만 늘 주머니가 가벼웠던 우리한테는 적잖은 위로가 되었던게 사실이다. 우린 적어도 저 정도는 아니잖냐..는 그 어줍잖은 안심같은거 말이다..

옷사는 데 드는 돈도 여기선 눈높이에 따라 충분히 절약할 수 있다.  여기서 정상가를 주고 물건을 사는 사람들은 적어도 유학생들중엔 드물다. 태어날 때 은수저물고 나온 있는 집 자제들이야 논외로 치고... 대부분이 거침없이 싸게 파는 세일을 기다린다. 남편과 나는 한국에서 가져온 옷들을 십년이 다 되어가는 데도 아직도 입고 있으니 그 상태가 좋을리가 없지만 일단 편안한게 제일인고로. 그리고 여기서 산 대부분의 옷들은 한 시즌 끝무렵 거하게 하는 할인세일에서 장만하거나 그도 아니면 중고품을 파는 굿윌(goodwill)에서 대충 사서 입곤 했다. 우린 굿윌의 꾸준한 단골이었다. 더군다나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들내미 옷들은 세일을 할 때 다음 해에 맞을 만한 칫수의 옷을 미리 사두었다가 입히곤 한다. 여기서 세일이란 그냥 50% 세일 정도가 아니라 얘네들 표현으로 clearance or crazy sale을 할 때를 말한다. 정상가로 40불넘게 했던 겨울 점퍼를 7불에, 한 여름에 20,30불하던 여름 샌달이 겨울 초입게 가면 5불도 안 되는 가격으로 살 수 있다는 걸 아는데 누가 정상가를 주고 사겠는가. 그런 겁나게 착한 수준의 할인들은 우리같은 가난한 유학생들한테 아주 요긴함은 물론이다. 헌데 그런 세일을 수시로 광고도 없이 하는 경우가 많아 쇼핑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나도 가끔 백화점(mall)을 한번 돌아보곤 했었다. 혹시 아이들 옷파는 가게들이 그런 세일을 하지 않나 해서.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아이들의 경우에 또래 아이들이 있는 가까운 한국이웃들끼리 서로 입던 옷들을 물려주는게 유학생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따뜻한 모습이다. 우리아들내미도 자기가 입던 옷을 누군가에게 물려주고 자기도 이웃 한국형이 입던 옷을 물려받으면서 자랐으니까. 해서 가끔 아들 옷을 입은 동네 꼬마가 아들인 줄 알고 연신 불러댄 적이 한두번이랴. 그렇게 서로 물려주고 물려받으면서 아이들의 옷문제를 해결하는게 유학생 가족 사이에서는 아주 일상적인 일이었다.

우리의 단골 가게는 앞에서 잠깐 얘기했던 굿윌(Goodwill)이었다. 굿윌은 주민들이 기부(donation)한 옷이나 물건들을 받아서 파는 중고품가게다. 여러 주에 지점들이 있긴 하지만 그 상태가 다 좋은 것은 아니라는 걸 여기 남부에 내려와서 찾았던 굿윌가게에서 알게 되었다. 여기에 비하면 중서부 우리가 살던 동네의 그 굿윌가게 물건들은 여기에 비해 훨씬 깨끗하고 가격 또한 저렴했다. 그곳은 옷들뿐만 아니라 그릇이나 생활용품들도 판다. 만일 우리도 처음부터 여길 알아서 정착할 때 필요한 물건들을 굿윌에서 샀다면 좋은 물건들을 훨씬 싼 가격에 살 수 있었을게다. 해서 처음 온 유학생들한테 굿윌을 추천한다. 좋아하는 친구들도 있지만 중고품에 대한 한국사람들의 인식이 그리 긍정적이지 않아서 그런가 그리 즐기지 않는 친구들도 많았다. 그럼에도 이래 저래 우린 굿윌 덕을 많이 봤다. 특히 아들이 책을 한창 읽을 무렵..도서관과 함께 굿윌에서 많은 책들을 샀다. 정상가로는 5불 넘는 책들을 깨끗한 상태로 1불도 안되는 60전에 살 수 있었으니까. 그곳에서 아들의 장난감도 솔찮이 많이 샀다. 대신 굿윌역시 필요한 물건을 찾기 위해서는 수시로 방문을 해줘야 한다.  

해서 우리는 월마트에 장보러 가는 길목에 있는 그곳을 장보러 갈 때마다 수시로 들려 둘러보면서 아들의 책들이랑 장난감들, 아들의 옷들이랑 우리의 옷등을 비롯 여러가지 생활용품을 해결 할 수 있었다. 우리의 굿윌 사랑에 주위 친구들은 고개를 젓는다. 자기네도 한두번 둘러봤는데 우리처럼 재미를 못 봤다면서. 그때마다 우리가 해주는 얘기는..우리처럼 수시로 일상적으로 둘러봐야지 좋은 물건을 살 수 있다고. 해서 우리가 이사올 때 아들이 커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책이나 옷, 장난감같은 물건들을 모은 서너 박스를 굿윌에 기부하고 왔다. 기부할 때 알았다. 기부한다고 해서 굿윌이 어떤 영수증을 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박스만 건네주면 그만이라는 것을. 그것을 받은 그곳 직원들이 옷을 세탁하고 정리한 깨끗한 상태로 매장에다 내다 놓는다. 지금도 기억난다. 굿윌에 들어서면 맡을 수 있는 굿윌 특유의 냄새를. 그건 아주 특유의 상쾌한 세제 냄새였는데 언젠가 굿윌에서 산 옷을 입던 아들이 옷에서 맡아지는 냄새만으로 "엄마..굿윌에서 산 옷이지요..."해서 웃었던 기억이 난다. 허나 지금 사는 동네의 굿윌은 거의 찾지 않고 있다. 굿윌 물건의 수준은 그 동네의 사는 수준과 비례한다 싶다. 왜나하면 이전의 그 잘 사는 동네의 굿윌과 너무 다른 이동네의 이곳 굿윌을 처음 한두번 걸음해본 우리는 그 이후로 거의 찾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주민들의 기부로 운영되는 시스템이니 당연한 지도 모른다.

그렇다..우린 그렇게 눈높이를 내려서...물론 그전에도 그리 높은 수준은 아니긴 했지만..아주 저렴하게...알뜰하게 공부하는 사오년 길게는 육칠년 동안을 그런대로 해낼 수 있다는게 내 생각이다. 물론 학비는 제외하고 말이다. 학교에서 주는 장학금 내지는 조교일자리를 받기만 한다면 여기서 생활하는데 드는 생활비는 어떻게든 절약할 수 있다. 우리가 그렇게 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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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와서 수없이 많이 들었고 내 자신 역시 많이 생각하게 되는 단어가 '차별'(discrimination)이다. 남의 나라살이를 해보지 않은 이들은 모를, 특히 백인위주의 사회에서 살아본 이들이라면 누구나 겪었음직한 차별은 이곳에서의 생활을 접지 않는 한 되새김질 하게 되는 화두일게다. 일상 생활에서의 작은 것에서부터 언론을 떠들썩하게 하는 큰 사건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맞닥뜨리게 되는 차별. 똑같은 피부색을 하고 똑같은 언어를 쓰는 내 나라에서 살 때는 몰랐던, 피부색이 다르는 이유로 차별이란 걸 처음 당했을 때 느낌은 뭐랄까.. 억울함..이라고 설명하기엔 뭔가 부족한.. 허나 그건 개인이 혼자 어찌 해볼 수 없는 단단한 벽과 마주한, 해서 별 뾰족한 수가 안 보여서 당할 수 밖에 없는..그런 느낌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차별에 대한 면역성은 쉬이 생기질 않는다. 적어도 내경우엔. 해서 때로는 작은 것에 대해 분노하는 자신을 달래는 방법이란게 고작해야 남편 혹은 혹은 가까운 지인들한테 쏟아놓는 걸로 푼다. 이 동네에서 사는 한 영원한 이방인일 수 밖에 없는데.. 체념을 할 만도 하건만..그게 쉽지 않다. 해서 혹 소수인종으로 살다보니 그냥 넘어갈 수 있는 것에 내가 너무 날을 세우는게 일종의 피해의식이 아닐까..싶을 때도 있다. 

새삼 이런 '차별'에 대해 끄적대고 있는 건 내가 자주 들락거리는 미국에서 살고 있는 미씨들의 모임 싸이트에서 엊그제 일어난 고속도로 총격사건으로 야기된 인종차별에 대한 논란들을 읽으면서다. 그러고 보니 참 많은 이들이 함께 분노하고 있다. 그건 이땅에 살면서 크고 작은 차별을 겪은 자들만이 공감할 수 있는 분노다. 이미 언론에서 많이 다루었듯이 사건의 개요는 서부 캘리포니아쪽 고속도로상에서 경찰들의 추격을 받던 수지킴이라는 한 여성 운전자가 경찰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차를 멈추지 않고 달리다 경찰이 쏜 총에 어이없이 죽임을 당한..참으로 가슴 아픈 사건이었다. 그 사건에 대한 논란의 핵심은 총을 쏜 경찰이 그 차에 아이가 타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발포를 했다는 것과 만일 운전자가 한국계가 아닌 백인 여성이었다고 해도 경찰이 방아쇠를 당겼을까..였다. 그 기사에 대한 대부분의 댓글들은 과연 백인이었다고 해도 총을 쐈겠느냐...그리고 언론에서 이렇게 묻혀졌겠냐는..'차별'에 촛점을 맞춰지고 있다.

그 사건의 내막에 대해 내가 아는 건 여기까지다. 그 운전자가 음주운전을 했는지 왜 차를 세우지 않고 아이가 타고 있는데도 그렇게 위험한 추격전을 벌였는지에 대해서는 운전자 본인이 아니라면 추측에 불과할 뿐이다. 허나 나 역시 경찰의 과잉 대응 부분에서는 많은 이들이 지적한 대로 만일 운전자가 백인여성이었다면 상황이 많이 달라졌을거라는데 동감한다. 어떤 분은 그런 반응들이 일종의 피해의식탓이라고 대꾸하기도 했다. 아마도 그분은 살면서 차별을 그다지 안 겪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허나 글쎄다..한국사람들끼리만 어울려서 살 수 있는 동네라면 모를까.. 어떻게 그런 걸 겪어보지 않을 수가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든다. 혹 본인이 감지하지 못했던 건 아니었을까. 기실 대놓고 하는 차별보다는 은근한 차별이야 부지기수니 하는 얘기다. 아주 사소하지만 은근 열받게 하는 예를 들어볼까.  다른 미국 사람들이 들어갈 때는 매너좋게 문을 잡아주며 기다리던 한 미국처자가 바로 내 앞에서 보란듯이 문을 놔버리고 가버린다고 해서 그 처자를 쫓아가서 왜 나한테는 문을 안 잡아줬냐고 따질 수는 없쟎은가. 제대로 발음했는데도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을 하고 서있는 점원한테 다시한번 차근 차근 최대한 발음을 정확히 해서 했던 말을 반복해야지 다른 사람들은 알아듣는데 왜 너만 못 알아들는 표정을 하고 있냐고 대놓고 따질 수는 없잖은가.

그런거다. 아주 사소한...허나 어찌보면 그런 가벼운 무게들이...불편한 심기를 밖으로 드러내기는 뭐한..그런 작은 것들이 뭉쳐있다..어느 순간엔가 욱하고 올라는 걸 꾹 눌러야 할만큼 쌓이다 보면.. 모르는거다. 언제 어떤 순간에 어떻게 터져나올지는. 나 역시 남의 나라살이를 하면서 은근 쌓인게 많은가보다. 그 뉴스에 욱해서 성에 차지도 않는 몇개의 댓글로 이 나라랑 이 나라의 험한 경찰에 욕을 한 걸 보면.

사소한 차별에 비해 구조적인 차별은 노골적이지 않다. 그건 대부분의 차별이 사회적 묵인하에서 어떤 기제(mechanism)처럼 제도화되어 차별당하는 이들이 감지하지 못할 듯 하니 말이다. 내가 사는 이곳 남부는 흑인인구가 압도적으로 많다. 정확한 통계치까지는 모르지만 캠퍼스밖에 나가면 흑인들이 많다. 전에 살던 동네는 다양했다. 학교타운이라서 아들이 다니던 학교를 가보면 반친구들이 백인, 흑인. 멕시칸. 동양인..그렇게 적당하게 섞여있었다. 그곳에서는 대부분 아이들을 공립학교(public school)에 다닌다. 선생님들도 좋았고 학교 수준도 좋기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 주(state)에서 뽑는 초등학교 랭킹에 들었다는 말에 좋긴 했지만 그게 아니었다고 해도 별 다른 선택이 없었다. 남들이 다 보내는 그 학교에 보내는 수밖에. 해서 우린 아들학교에 대한 고민은 전혀 하지 않았고 아들도 그곳에서의 학교 생활을 아직도 그리워할 만큼 좋아 했다. 허나 이곳 남부..학교의 선택이 많은 이 동네로 이사 와서야 선택 폭이 많은 만큼 학교들이 좋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걸 알았다. 공립이라고 다 같은 공립이 아니고 사립을 보내는 부모들이 많다는 걸.    

처음와서 아무것도 모르던 우린 아들을 학교 아파트에서 제일 가깝다는 이유로 걸어서 오분거리에 있는 근처 공립학교(public school)에 보내기로 했다. 아들이 학교를 다녀온 첫날에서야 알았다. 대부분의 일반 공립학교 학생 95%가 흑인학생들이라는 걸. 다양한 피부색의 친구들과 공부하던 아들한테 첫날 한명만 빼고 다 흑인친구들이었다는 학급 분위기가 적쟎은 충격이었단다. 학기를 시작한 한달 정도 아들은 하루 걸러 학교를 갔다. 학교 갈 시간마다 때마춰 아파주는(?) 배랑 머리때문에. 허나 아들이 입밖으로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수 있었다. 학교를 가야하는 아침마다 눈에 띄게 부담스러워하는 아들의 모습이 안되서 학교가라고 억지로 등떠밀지 않고 집에서 쉬라고 했다. 나역시 아침마다 아들을 학교에 데려다 주면서 보게 된 학교건물이라던가 주변 환경에 심란했던 차였기에. 그 전에 다니던 학교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낡은 학교 건물이랑 똑같은 교복을 입고 뛰어노는 흑인아이들의 모습에다 흑인 담임선생님은 흑인에 대한 선입견같은 걸 별로 안 키우는 나한테 조차도 편한 그림은 아니었다. 해서 아들이 그렇게 빠지는 날에 내가 수업있을 때는 교수한테 사정얘기를 해서 수업을 빠졌다. 어쩔 수 가 없었다. 여기 온 첫 학기동안 그렇게 빠진 횟수가 두세번 될게다.

다행히도 시간이 갈수록 아들한테는 친한 친구들이 생겼고 어느 날 부턴가 누가 누가 착하다면서 친구얘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점차 알게 되었다. 일반 공립학교에서는 이전 학교에서 아들이 좋아하던 음악이나 미술시간이 없다는 걸. 성적표에는 음악 미술이라고 써있지만 아들말로는 '그냥' 써있는 거란다. 그러던 어느 날은 아들이 조금 놀랐다는 얼굴로 여기 선생님은 아이들한테 "shut up"이라고 소리를 지르더라는 얘길했다. 그말이 안 좋은 말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아들한테는 선생님의 그런 격한 표현이 충격이었던게다. 나 역시 처음엔 그 선생님한테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다 몇번 학교를 들락거리며 들여다보니 이전 학교에 비해 선생님 한명이 담당하는 학생수가 훨씬 많다는 걸 알았다. 이전 학교에서는 보조교사가 한명씩 있었는데 여기에선 보조교사없이 선생님 한분이 스무명이 넘은 아이들을 그것도 말도 안 듣는 아이들을 통솔하다보니 격해질만도 하겠다..는 쪽으로 이해했고 아들한테도 얘기해줬다. 

어느 날은 아들이 자기반에 자기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형아들이 있다고 한다. 그렇잖아도 10월에 태어난 아들은 같은 해에 태어났어도 9월 이전에 태어난 동갑들보다 한 학년이 늦어서 반 친구들의 반은 넘게 한살 아래 동생일터인데 우리아들보다 더 나이가 많은 형들이 있다니. 그 이유는 학업성적을 가늠하기 위해 매학년 올라갈 때마다 치루는 시험에 (남부에만 있는 듯..윗동네 살때는 없었던 시험이다) 낙오된 아이들은 학년을 올라가지 못하고 그렇게 남아있는거라면서 아들은 자기도 그 시험을 치뤄야 한다며 걱정을 했다. 아마 아들이 그렇게 걱정한 시험은 그게 처음이었지 싶다. 학교가 시작한 첫날....아이들의 학업에 대해 여기 부모들은 별 관심이 없다는 걸 알았다. 모든 초등학교들은 (중등이나 고등은 잘 모르겠으므로) 매 학년 시작할 때마다  담임선생님을 소개시켜주고 학교 교실도 보여주고 하면서 일년동안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선생님들이 설명해주고 부모들이 궁금한 것을 물어볼 수 있는 장인 오픈하우스(open house)라는 걸 한다. 이전에 살던 곳에서는 오픈하우스를 하면 학교는 당신 아이들이 생활할 학교랑 선생님을 만나러온 학부모들로 가득찼고 온 동네 사람들 얼굴을 다 볼 수 있었다. 허나 이곳 학교에서 오픈하우스를 한다고 해서 갔더니 선생님들이랑 교장교감선생님들 소개시켜주는 시간도 없이 곧바로 교실로 가라고 해서 갔더니 아들의 학급친구들중에 참석한 부모들은 나를 포함해서 다섯명. 게다가 궁금해서 이것 저것 물어보는 사람도 별로 없어 새로 와서 뭘 모르는 어리버리한 나만 초짜질문들을 해대서 시간이 걸렸지 삼십분도 안되서 오픈하우스는 끝났다.

처음엔 그렇게 적응하는게 힘들던 아들도 시간이 가면서 적응하는 듯 했다. 학교에서 자기가 나름 유명하다면서 허세도 부렸다. 허긴 아들의 학년에 모두 네반이 있는데 그중에 동양인은 달랑 우리아들 하나라니까. 해서 학교가 끝날 즈음 아들을 데리러가면 난 얼굴도 모르는 얘들이 와서 하이 하고 인사를 하고 우리아들이 어디에 있는지 친절하게 알려준다. 그래..시간이 지나면 해결되는구나..하고 맘 한켠으로 안심하고 있었는데 정작 고민은 아들의 공부였다. 자기가 반에서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얘기해주길래...어느 정도는 하겠지..하고 별 걱정없이 지내던 어느날, 아들은 자기가 반에서 2등을 했다면서 자랑스럽게 얘기하길래..우와..하고 축하해주면서 물었다. 몇점이냐고. 그제서야 알았다. 1등은 95점인데 80점대를 받은 우리아들이 2등이고 3등이 70점대라는 걸. 어느사이 우리아들의 공부 눈높이가 같은 반 친구들을 따라 사정없이 겸손(!)해지고 있었다. 이전에 살던 학교에서는 뒤쳐지않고 잘 따라가서 별 걱정 안 했던 아들은 이곳에서도 역시 상대적으로는 앞서가고 있는 듯 보였지만 성적이 점점 하락세였다. 해서 걱정을 할라치면 우리아들 왈..자기는 잘 하는 거라면서 걱정하지 말란다. 허긴 자기 짝꿍은 양(D)고 누구는 미(c)를 받는다니 거기에 비해 자기 수준을 아주 만족스러워하고 있는 아들을 보면서 아무리 공부는 좀 못해도 되니 열심히 뛰어 놀라는 우리도 서서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학기가 다 갈 즈음에 아들의 담임선생님이 얘기 좀 하자더니 "니 아들은 도전이 필요해(He needs challenges)"라는 말을 한다. 말인즉은 이런 일반 공립학교 말고 다른 학교로 옮기라는 거다. 아마도 선생님도 우리랑 같은 맘으로 아들을 지켜봤던게다. 고맙게도.

다른 학교란..이곳엔 아들이 다니던 일반 공립학교 말고 공립은 공립인데 영재반(Gifted Class)이 있는 공립학교나 과학이나 미술등을 특화시킨 공립학교를 얘기하는거다. 이런 공립학교에 들어가려면 시험을 보거나 지원서류를 내야한다. 그것도 한 일년전부터..미리 미리. 시간이 촉박하게 온 우리가 알았더라고 하도 지원하기엔 늦은 셈이었다. 해서 선생님은 강력하게 권한다. 아들을 영재반이 있는 학교나 과학 학교나 예술학교에 보내는게 어떠냐고. 선생님이 그러더라는 말에 왜 그 전부터 아들학교를 옮길 생각을 하지 않는지 의아해했다는 주변 분들은 대부분은 부모가 알아서 그 학교에는 안 보내는데 선생님이 보기에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자기 학생인데 다른 학교로 보내라고 하겠냐며 우리의 무관심(?)을 은근 탓해주셨다. 허긴 여기 대부분 한국분들은 비싼 사립을 보내거나 일반 공립이 아닌 그런 특수공립을 보내고 있거나 정 방법이 없어서 일반공립을 보내고 있다면 거기엘 들여 보낼려고 무지하니 애을 쓴단다. 그 이유는 학업 수준도 수준이려니와 그런 영재반이나 특수 공립학교 대부분의 학생이 백인이거나 아시안들이라면서. 그렇게 얘기해줬는데도 그래도 아직 초등학굔데 지금 친구들 사귀어서 좋아하니까 초등학교는 그냥 보내고 중학교때나 특수학교에 보내겠다는 내 말에 뭘 모르는 소리란다. 그건 대부분의 특수 중학교들이 특수 초등학교를 나온 학생들한테 우선권을 줘서 우리아들이 다니던 일반 초등학교 출신한테까지 순서가 안 돌아온다는거다. 그게 일반초등학교에서 백인이나 동양인들을 보기 어려운 이유였던거다. 그네들은 그런 특수 공립 아니면 한달에 몇백불씩 내는 사립을 보낸단다. 

흑인이 많아서 학교의 질이 낮다는 얘길 하려는게 아니다. 흑인에 대한 차별은 그렇게 초등학교때부터 시작되고 있다는 걸 얘기하고 싶어서다. 지난 학기 힌 수업시간중에 인종의 다양성(Diversity)에 대한 얘기를 토론할 기회가 있었다. 난 이전에 살던 중서부동네랑 다른 이곳에서의 개인적인 경험을 얘기했다. 이곳이 흑인이 다수(majority)임에도 이제껏 한번도 보수적인 공화당의 텃밭이 아닌적이 없고, 학교밖에서는 그렇게 많이 보이는 흑인들이 학교 캠퍼스안에서는 상대적으로 적은 이유가 그런 학교 시스템 자체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흑인들한테 불리한 것도 이유가 되지 않겠냐고. 해서 물었다. 그때 같이 수업을 듣던 친구들한테. 그들 대부분이 백인이었고 외국인은 나 혼자, 다른 주에서 온 친구 서너명을 제외하고는 이 주(state)를 벗어나 본적이 없는 토박이들이었는데 그들 대부분이 초등학교부터 사립을 다녔다고 했다. 참 아이러니아닌가. 다수가 대접을 못 받는 사회..저기 외곽에 가면 볼 수 있다는 전원같은 동네에서 모여산다는..흑인의 숫자에 비하면 턱없이 소수인 백인들에 의해 주도된다는 이 동네가 바로 미국사회의 축소판이 아닌가 싶다. 흑인들이 많은 학교는 피하고 가급적이면 백인들이 많이 가는 영재반이나 특수학교, 사립학교를 보내고 싶어하는 동양사람들의 모습도 그렇고. 그러면서 흑인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사업들, beauty supply 같은 가게들..대부분이 한국사람이나 동양사람들이 꽉 잡고 있는 그림 또한 다르지 않다.

남편과 나는 이런 저런 고민끝에 아들 학교를 남편 학교 근처에서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된지 이제 거의 일년이 다 되어간다. 다행스럽게도 아들은 그 도시에서 달랑 하나밖에 없다는 공립학교에서 아주 잘 지내고 있다. 주가 달라서 그런가..그 동네 사람 대부분은 공립학교를 보내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학교 시설이나 선생님들이 여기보다는 훨씬 좋단다. 무엇보다 음악이랑 미술시간이 있다고 좋아 했다. 반 친구들중에 흑인이 반정도 있고 백인이 반...그리고 동양인은 여전히 혼자지만 아들은 그런대로 무탈하게 학교 생활을 잘 하고 있다. 문밖에만 나가도 삭막하고 험한 동네인 여기에 비하면 거긴 나무랑 풀도 많고 무엇보다 훨씬 안전하다. 한국친구가 없어 아들이 많이 심심해하기는 하지만. 해서 가끔 묻는다. 여기로 다시 오고 싶지 않냐고. 아들은 엄마랑 같이 못 지내는 걸 말고는 거기가 훨씬 좋다며 엄마가 빨리 오란다.

이런걸 보고 있다보면 김우중씨가 썼다는 읽어본 적도 없는 책 제목.."세상은 넓고 할일은 많다"라는 그 제목이 떠오른다. 그 세상이 미국땅이라면 과연 그럴까. 기실 집과 일터 그리고 교회가 일상의 대부분인 교포분들중에 많은 분들은 아직도 여기가 기회의 땅이라고 말씀하신다. 심하게는 "이 축복받은 나라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라고 자신있게 얘기할 만큼. 허나 내 보기엔 소수인종으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면서도 기껏해야 한인 사회에서만 당신들의 목소리를 크게 낼 수 있는 제한적인 삶을 살면서도.. 미국은 여전히 그분들한테 기회의 땅이고 축복된 땅이라고 하시니.. 어쩌면 그런 처세가 여기서의 삶을 덜 고단하게 하려는 맘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렇게 사소한 것 차별에 대꾸하고 속 끓이기보다는. 이왕 여기서 삶의 터를 잡았으니...고민할 필요없이 긍정적인 것만 보고자 하는 맘 말이다. 그러고 보면 남편과 난 아닌가 보다. 여전히 그런 크고 작은 차별에 예민한 걸 보면... 아직도 터를 못 잡은..여전한 뜨내기 삶인가 보다.

* 이번 사고로 돌아가신 수지김 님의 명복과..남은 아기가 건강하게 잘 자라길..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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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동탁 2009-09-16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힘 내세요!!!!!

onthecloudnine 2009-09-18 01:49   좋아요 0 | URL
네..마동탁님. 격려 감사드립니다. 처음 댓글..반갑네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