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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 이데아총서 9
발터 벤야민 지음 / 민음사 / 1992년 8월
평점 :
그는 독일계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카발라적 전통, 브레히트를 통한 유물론적 사관에 이르는 독창적인 이론을 알레고리적 언어로 이미지화 해낸다. 덕분에 이미지와 추상화된 사고를 연결하는 지점에서 다소 애를 먹는 나같은 직선적인 독자는 독해에 다소 시간과 정성이 필요한 책이랄 수 있다.
'서사극이란 무엇인가'에서 보여준 브레히트 이론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비판적 시각, '좌절한 자의 순수성과 아름다움'에서 보여주는 카프카에 대한 이해를 비롯해 프루스트와 보들레르에 관한 문예 비평,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생산자로서의 작가'에서 보여주는 예술의 정치적 기능에 대한 고찰- 모두가 신선하고 자극적인 글들이다. 저자가 주로 활동하던 시대가 1920-30년대라는 것을 알고, 그의 이론이 재조명되기 시작한 것이 1960년대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반세기를 훨씬 아우르는 그의 예리한 통찰과 지적 안목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흔히들 프랑스의 철학자들이 자유로운 사고와 글쓰기를 통해 다소 모호하고 혼돈스러운 개념을 쓰고 독일 철학자들은 그에 반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책을 통해 자기 선입견을 다시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란 생각도 든다. 독일에서 나고 자란 저자가 사용하는 언어는 다분히 신비주의적이고 이미지 중심적이다. 그러면서 다소 극단적인 유물론적 예술관까지 아우르고 있으니 카발라나 막시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면 이 텍스트를 완전하게 소화하는 일은 무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의 빼어난 논문들은 여러번 숙독할 가치가 충분하고,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하다. (의외로 유머도 있다!) 특히 카프카를 '좌절한 자의 순수성과 아름다움'이라 표현한 것은, 이제껏 감히 누구도 시도하지 못할 만큼 뜨겁고 진한 카프카에 대한 저자의 이해와 애정(또는 우애?)이 느껴져 사못 감탄을 자아낸다.
그러나 1940년 2차 대전 중, 마흔 여덟의 나이에 저자는 망명길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자전적 프로필에서 밝힌 스스로의 '파괴적 성격'이 드디어 인생이 자살할만한 값어치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인지, 자살 외에는 전쟁 중 적국 체류의 불안과 절망을 끝낼 방법이 없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슈테판 츠바이크와 더불어 나를 놀라게 한 이 세기적인 천재는 자기 목숨마저 스스로 거두어들였다. (어째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은 대체로 자살하는 경향이 있을까. 유독 독일 작가들만 이렇게 자살을 택하는 것일까?) 자살이 외부를 비롯해 자기 내면과의 단절을 의미한다고 할 때, 모든 천재들의 문제는 결국 커뮤니케이션의 단절에서 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대를 질러 태어났건 느리게 태어났건 신은 그들에게 재능과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고독을 함께 주셨다.
여담이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나에 대해 하나 분명하게 깨달은 점이 있다. 그것은 내가 '동화'와 '이입'에 지나치게 가까이 서 있는 인간이어서 작품과의 '거리를 두고 조망'하는 오락을 누릴 수 없으리라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결국 분석적, 학문적인 태도를 취할 수 없게 되고 내가 느끼는 동화와 감정이입을 재현하기 위해 창작하는 일을 할 수 밖에 없으리라는 것이다. 나는 이제 나의 한계를 분명히 알았고, 이번 일로 학자가 되겠다는 꿈 하나는 가지치기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