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풍경 - 김형경 심리여행 에세이, 개정판
김형경 지음 / 사람풍경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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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전문상담교사 자격증이 있다. 학교에는 전문상담사가 따로 오시므로 학생을 직접 상담하는 시간이 많지는 않지만 예전에 상담사가 없을 때는 주로 학생 상담을 맡아 했었고 지금도 업무 때문에 상담과 심리학에 대해 꾸준히 공부하고 있다.

김형경을 보면서 나와 닮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심리학을 전공하지는 않았으나 꾸준히 공부해 왔다는 점. 그는 문학으로, 나는 교단에서, 누군가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살고 있다는 것. 그러나 아마도 출발은 자기 자신의 마음을 알고 싶어서였을 거라는 것...

 

이 책은 심리학 책이면서 여행기이다. 둘 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역들이다. 이 책을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혼자 여행한 이야기를, 심리학적 관점에서 여러가지 심리학 키워드와 연관지어 풀어내고 있다. 내 기준으로 좋은 책은 그런 책이다. 일단 아무 생각 없이 읽고 싶은 책. 그리고 읽으면서 많은 부분에 밑줄을 치고,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고, 글에 인용하고 싶어지는 책. 이 책 역시 그 두 가지를 다 만족시켰다. 여기서 던져주는 키워드들을 모아 우리 학교 선생님들을 위한 상담연수 자료를 만들었다.

 

김형경은 독일 뮌헨 국립과학박물관을 둘러보고 말한다. “여행할 때 좀 더 일찍 이런 체험들을 했더라면 인생이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느낀다. 그런 여행이라면 매우 성공한 여행일 것이다.

그가 말한 버스 타고 한 바퀴는 좋은 여행 팁이다. 물론 나 역시 자유여행을 즐기면서 종종 써먹는 방법이긴 하다. 나는 그이처럼 오랜 기간 혼자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여행을 해본 적은 없으므로 김형경이 사용한 방식 여행지에 가면 노선표와 지도를 놓고 가장 멀리, 골고루 돌 수 있는 버스나 전철을 타고 종점까지 갔다가 오는 것 을 해보지는 않았다. 그래도 구애 없이 버스를 타거나 트램을 타고 여기저기 다녀본 경험이 꽤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아주 드물게 그런 여행의 기억들이 있다. 생각에 잠겨 창밖을 볼 수 있는, 목적지가 불분명한 여행의 여유 혹은 불안, 나 역시 그런 여행을 좋아한다.

 

김형경은 여행을 원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자신의 터전에서 멀리 떠나는 이유는 일종의 방어적 행동이라고 본다. 즉 여행은 총체적인 방어행위라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말에 몹시 격하게 공감한다. 왜 한국 여자들은 그렇게 해외여행을 좋아하는 것일까? 남편은 국내여행보다 해외여행을 선호하는 나를 의아해 한다. 나 역시 스스로가 궁금하긴 했었다.

나는 바로 여기에서 충족되지 못한 것, 현실의 불안과 불만에 대한 방어와 보상심리가 여행에 녹아 있다고 생각한다. 존중받지 못하는 삶, 묻혀버린 삶의 불만이 먼 이국의 땅에서 차라리 아무도 나를 모르는 땅에서 온전히 내가 나라고 여겨지는 충만을 느끼게 하는 것은 아닐지. 농담 삼아 한국 남자들이 해외여행을 싫어하는 것은 좁아터진 비행기 좌석 탓이라고 어떤 한국여자들과 웃으며 이야기 나눈 적이 있는데, 해외여행에 관한 한국 남자, 혹은 여자들의 심리는 한번쯤 짚어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이 책이 말하는 심리학적 기제들 중 유독 마음에 남았던 것들을 좀 정리해 보련다. 아마도 그것은 내 안에 있는 것들일 가능성이 높다. 가령, 김형경은 과도한 자주성을 의존성의 뒷면이라고 본다. 중독은 의존성이 가장 심화된 형태이며 대개 취약한 정신이 중독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도박이나 게임 같은 부류의 중독이 아닌 인정 중독도 중독의 하나이다. 어렸을 때 칭찬과 격려에 인색한 부모, 지지해 줄 줄 모르는 냉담한 부모, 감질 나는 방식으로 사랑을 주는 부모에게 양육된 경우에도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란다.

책에는 네가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네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탐욕스럽다고 보인다면 스스로에게 물어라. ‘내가 지나치게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타인이 나를 시기한다고 생각되면 나는 타인의 소유물 중에서 무엇을 파괴하고 싶은가?’ 누군가 나를 미워한다고 느껴질 때면 내가 지금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모든 사람이 다 내 모습의 반영은 아닐 것이다. 가령 나는 일머리가 게으른 사람(능력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비열한 사람을 싫어하는데 그건 분명 내가 싫어하는 가치관을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내가 격렬하게 싫어하는 사람 중에서 자기 자신에게 지나치게 긍정적인 사람과 피해의식이 너무 강해서 세상 모두가 자기를 비난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사람의 모습에는 분명 내 모습이 비추어져 있는 것 같다. 물론 이 둘은 동전의 양면이기도 하다. 앞서 말한 인정욕구의 뒤집어진 표현이기도 함을 심리학 공부 따위 하기 이전에도 이미 알고 있었다.

 

좀 새삼스러운 감은 있지만 위 대목은 인생을 성찰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내가 만약 남 험담을 하고 있다면 절반 이상은 결국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일 수 있다는 자각에 이르면 말로 짓는 죄업에 좀 더 조심하게 될 것이다.

물론 아직 마음은 아니다. 마음으로 누군가 싫고 미운 것조차 참고 싶지는 않다. 여태껏 내가 주로 미워했던 사람들이 대개는 강자였던 점을 생각하면 미움과 분노가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열쇠였기도 했다는 생각이다.

나는 슬픔과 분노가 건강한 에너지가 될 수 있으며 부끄러움과 더불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감정이라고 믿지만 그래도 분노는 가장 믿을 만한 사람에게 표출되어 친밀한 관계를 그르치고 생을 퇴행시킨다.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내면화된 분노는 자살로 이어진다.’는 구절에 동의한다. 특히 ‘5분 이상 화가 난다면 그것은 나의 문제다.’라는 대목에서는 고개를 많이 끄덕였다. 특히 내 나이쯤 먹으면 더더욱 어지간한 개인적인 분노에 대해서는 스스로 감정을 조절하고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니, 어린 친구들도 정신적으로 성숙한 아이들, 안정된 양육을 받은 아이들은 함부로 화내지 않는다. 쫄지도 않지만 함부로 분노하지도 않는 그런 어린 남자아이들도 많이 봤다. 하물며 어른임에랴. 분노의 감정은 당연히 느낄 수 있지만 그 화를 잘 낼필요가 있다. 화를 표현하는 방식을 말함이다. 그리고 적정히 표현하고 난 분노는 5분 이내 처리할 수도 있어야 한다. ‘화가 나서 나도 모르게 그만...’이라는 변명 속에서 자녀나 학생들 앞에서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는 어른들을 많이 보았다. 부끄러운 일이다.

 

요즘 구스타프 칼 융의 이론을 공부하고 있는데 아직도 그가 말하는 무의식과 개인화의 관계가 정확히 뭔지 모르겠다. 이것을 김형경은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정리한다.

 

모든 개인의 내면에는 자아가 형성되는 시기에 선하고 옳고 정의롭다는 성향을 간직하기 위해 무의식에 억압해 둔 그 반대 성향이 있다..... 건강한 자기애란 바로 그 병리적 자기애를 인식하고 그것을 의식 속으로 통합하는 행위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

 

이것은 나 자신에게도 필생의 과제일 것이다. 융은 무의식이 건강하게 의식화되지 않으면 그저 운명에 불과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내가 누군지 정확히 찾고 더 나은 나로서 살기를 원한다면 내 안에 숨겨진 것들을 들여다보려 애써야 할 것이다. 나만이 아니라 자아가 형성되고 있는 사춘기의 내 학생들을 위해서도 그 작업을 도와주어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론과 기법은 공부를 하면서 채워갈 문제이지만 지지자로서, 도와주는 이로서 나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태도일 것이다. 김형경은 지지는 모든 형태의 정신 치료의 중요한 요소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아이들은 조금 비틀거리다가도 자신을 전격적으로 지지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기 발로 일어나 걸을 수 있게 된다. 아이들이 너무 지쳐서, 너무 나빠져서 돌이킬 수 없고 돌아올 수 없게 되기 전에 얼른, 그 옆에서 서 있다고 마음으로 알게 해 주어야 할 것이다. 분명한 지지 앞에서 훈육도 설득력이 서지 않을까.

프렌체스코 성자의 이야기는 교사로서의 나 자신에 대해 다신 한 번 생각하게 한다. 내가 가르치는 모든 아이가 천사라고 착각하지 말라던 어떤 동료교사의 말 앞에서, 모든 아이가 천사 아닌 것은 맞는데, 그래도 교사는 마치 자기 학생들이 어떤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품으려 애써야 하는 건 아닌지, 항변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내 앞에 있는 이가 너무나 단호해서 오히려 나는 그 말을 못하고 쩔쩔맸더랬다. 다시 그런 논쟁이 벌어진다면 무슨 시대에 맞지 않는 낡은 성직관을 펼치느냐, 안선생, 꼰대 다 되셨구만.’ 이런 비아냥을 듣더라도 이젠 새들에게 설교하는 프란체스코 성자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아이들은 천사도 아니고 우리 교사들 역시 성자가 아니다. 하지만 우린 새도 아닌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새보다 훨씬 큰 뇌와 그보다는 잘 알아듣는 말귀의 소유자들. 우리가 들려주는 이야기와 그들에게 보내는 지지가 그래도 아이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안으로 끌어당기지 않을까? 어른들에 대한 상처와 불신을 조금이나마 어루만져 주고 세상에 대한 증오를 눅지게 해주지 않을까? 100번의 따스한 말에 99번의 냉소로 답할지라도 돌아서 먼 훗날 내 마음을 조금은 느껴주지 않을까? 그게 그렇게 힘든 일일까? 새들에게 설교하는 것도, 쇠귀에 경을 읽어주는 것도 아닌, 인간에게 들려주는 따스한 말들, 그렇게 힘이 드는 일일까? 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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