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수인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김주원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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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그림자>를 읽는 내내 그 신비로운 분위기에 압도되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하지만 결국 서평을 쓰지 못했다. 내가 좋아하는, 무덤과 같은 옛 책들의 높은 서가, 바르셀로나의 돌 깔린 거리들, 끔찍하고 아르다운 전설 같은 이야기가 서려있는 고택들... 그런 이미지들은 가득하지만 복잡하게 얽힌 줄거리는... 그리고 거기에 담긴 메시지는... 일단 기억하고 정리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이야기들 중 중심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었다. 그리고 분명 중요한 역사적 시기와, 그 시기를 살던 사람들의 아픔과 정치적 악행이 담겨있음에도 그것을 거시적으로 통찰해줄 철학이 있었던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나는 비록 서평을 쓰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바람의 그림자>가 주는 몽환적인 분위기가 너무나 그리워서(그러니까 뭐랄까, 서사보다도 서정이 더 강한 느낌, 마치 시를 읽고 난 것같은 느낌이 좋았다고나 해야 할까) 결국 영문판 책을 샀다. 원어로 읽으면야 더 좋겠지만 스페인어를 모르니 할 수 없이 영문으로... 그렇다고 영어를 술술 읽는 것도 아니지만 어쩐지 한국어로 다시 읽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그 분위기에 근접할 것 같은 생각이 든 것이다. 진도는 별로 나가지 않지만 지난 번 읽은 <더 리더>처럼 그냥 읽는 게 아니라 번역본을 남길 생각이다. 아주 오래 걸리기는 하겠지만 내가 처음 번역에 손을 댄 작품이 될 것이리라 믿는다. 그리고 번역이 끝나면 서평도 쓸 수 있겠지.

 

그러던 중, 그렇게 어렵사리 다시 <바람의 그림자>를 읽던 중, <천국의 수인>이 나왔단다. 표지는 전작에 못 미치지만, 여전히 람블라 거리쯤으로 보이는 비에 젖은 돌과 가로등이 묘한 그리움을 부른다. 그러고 보니 사폰의 '문체'가 좋았던 것도 같다.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작품에 빠져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결과는? 역시, 줄거리가 기억에 남지는 않는다. 왜 루이스 사폰에게는 독재정치의 어두운 역사가 그냥 배경사진처럼 해석이 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정치나 역사는 다양한 시공간에서 반복 변주된다고 보는 사람들 중에는 그것에 거리를 두고 '쿨'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쩌면 이 저자도 그런지 모르겟다. 나처럼 매 사안마다 눈물을 흘리고 분개하고 거리에 나가는 사람과는 좀 다른 부류인지도 모른다.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보면서도, 영화를 만든 사람이 역사적 사건이나 정치적 아픔을 다루면서도 거리를 둔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비슷한 시기에 읽은 <천국의 수인> 역시 그러했다. 역사는 겉돌면서 그 안에 담긴 고뇌와 사랑, 같은 좀더 원초적인 것들에 집중한다고나 할까. 그래서 더 좋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나처럼 그래서 아쉬운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게 기억에 남는 장면은 다른 것이다. 작가가 '글쓰는 이'로서 작품에 진하게 개입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부분.. 주인공인 다니엘의 어머니를 죽이고 결국 나중에 문화부 장관이 되는 악당 교도소장 발스에 대한 부분이다. 소설가로서 다니엘의 어머니를 사랑한(어쩌면 다니엘의 아버지일지도 모른다고 의심되었던) 다비드 마르틴에 대한 열등감으로 마르틴을 괴롭혔던 그가 결국 시기심에 못이겨 진정한 작가라 할 수 있는 이를 죽게 만들고 나중에는 '문화의 아이콘' 노릇을 하게된 장면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에겐 문화예술인 출신의 장관조차 드물긴 하지만, 어쩌다 그런 지위에 오른 자가 있더라도 진정한 예술성 때문이 아니라 소위 '명성' 때문인 경우를 많이 보지 않는가. 문화권력으로서 그가 행한 악행은, 소설 속에서 묘사된 것만큼 극단적이지는 않더라도 우리의 문화현장에서도 곳곳에서 비슷한 장면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들은 어느 현장이나 비슷하게 일어날 수 있다. 수업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아이들을 사랑하지도 않았던 교사가 교장이 되는 학교, 신실한 신앙심을 가진 이가 종교의 수장이 되지는 않는 현실... 리더가 된다는 것이 정신적 귀감이 되는 일 말고도 실제의 행정을 잘해낼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되는 게 현실이라고 인정해도 이건 좀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발스를 보면 그래, 그건 독재정권 직후의 스페인만의 문제는 아니었구나 공감되는 바가 참으로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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