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유혹 - 하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26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안정효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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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이 논란의 한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다. 읽으면서, 예수를 지극히 인간적으로(여기서 인간적이란, 따뜻하고 인간적인.. 이런 수사가 아니라 지극히 저속하고 평범한 인간의 속성을 지닌, 이란 의미이다.) 그리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영화로 만들어진 이 작품이 살인을 부를 정도인지는 의문이 들었다. 이미  기독교인들이 생각할 때 불경에 가까울 만큼 '인간적인' 예수는 이러저러한 작품 속에서 많이 언급되었으니 21세기를 사는 나로서는 그런 모습이 그다지 충격적일 것도 없다. 

하지만 2권의 제 33장에서(예수의 나이가 33살이라 33장까지 썼다고 한다.), 즉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그 장에서 전혀 다른 결말을 맞는다. 처형 직전에 그는 죽음으로부터 인간의 평범한 욕망과 따뜻한 일상으로 도망쳐 간다. 감히 입 밖으로 내어 말은 못했으나 인간의 육신을 지녔던 그의 아픔과 금욕을 안타까워했던 사람들은 이런저런 구설과 상상 속에서 그의 세속화된 모습을 떠올려 보았음직하다. 내가 충격적이라 하는 것은 두 아내를 거느리고 모든 욕망을 다 누리고 늙어가는 범인으로서의 예수가 아니었다. 늙어 죽기 직전의 예수에게 나타난 사도 바울과 제자들은, 십자가에서 도망가버린 그를 맹비난한다. 당신은 거기서 죽고 부활했어야 했다, 그래야만 세상에 대한 종교적 의미를 가졌을 터인데 도망가 버렸다, 아니, 이미 사람들에게 우린 그렇게 떠들고 다녔다, 그러니 당신이 이렇게 도망쳐 안온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밖에 나가서 떠들지 말라! 

예수에게 종주먹을 들이대는 추악한 사도 바울과 늙은 유다는 마치 예수를 이용해 종교를 팔아먹는 오늘날의 종교인들 같다. 어쩌면 예수는 숭고한 하늘의 의지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의 언행과 당시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그가 그렇게 죽어주어야만 했다고 몰아세운 어떤 세력들 (꼭 제자들뿐이겠는가, 민중들은 아니라 할 수 있는가 말이다.) 때문에 죽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하늘의 명에 따랐든 민중의 요구에 따랐든, 제자들의 정치적 책략에 희생되었든 인간으로서 예수는 참으로 외로운 사람이었다. 게쎄마니에서 홀로 마지막 기도를 드릴 때의 외로움(성서 속의 이야기대로)은 어리석은 제자들로 인한 것일지 모르겠으나 카찬차키스의 예수는 그보다 교활하고 계산적인 제자들로 인해 서럽도록 외로웠을지도 모른다.  

처음에 나는 작가가 예수를 달리 조명했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가 정말 달리(제대로) 비춰 말하고 싶었던 이는 예수도 유다도 아닌 그 주변의 무리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어쩌면 전능한 하느님의 아들임에도 그가 2000년 전도 그랬고 지금까지도 세상을 구원하지 못하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런 말도 불경한 것이리라, 기독교인들이 보기엔. 예수가 와서 죽으심으로 인해 인간들은 이미 구원받았고, 그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 했으니 내 말은 틀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는, 내가 아는 예수는, 이 땅에서 겪는 아픔과 가난은 어떻든지 간에 하늘나라에서 천국을 누리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는 진정으로 가난하고 핍박받는 이들을 가슴아파했다. 그가 있다면, 이 지구 곳곳에서 처참하게 살다가 죽어가는 모든 이들을 위해 가슴을 쥐어뜯고 있을 것이다. 결코 예수는, 하늘나라 권좌에 앉아, 그래, 조금만 참아라, 나를 믿으면 네 고통 다 잊고 여기서 행복할 것이다, 어서 오너라, 하지는 않을 것이란 말이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예수가 그립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그의 고통에 함께 했던 내 마음이 지금도 묵직하게, 그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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