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로자 - 만화로 보는 로자 룩셈부르크
케이트 에번스 지음, 폴 불 엮음, 박경선 옮김, 장석준 해제 / 산처럼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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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에는 언젠가 읽으리라고 꽂혀 있는 오래된 책들이 있다. 루카치 미학이나 박상륭의 잡설품, 끝끝내 안 읽고 되팔아 버린 최인호의 소설 등등... 그 중 30년은 넘은 것이 <로자 룩셈부루그의 사상>이다. 아마도 이 책에 대한 부채의식 때문에 만화 <붉은 로자>를 샀나 보다. 하지만 읽으면서 내내 씁쓸하다. 늘 바쁘게 살(아야 직성이 풀리는)고 있는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상념이 이걸 해서 뭐에 쓰나?”이다. 책을 읽다가도 공부를 하다가도 그 쓸모를 생각했을 때 밀려오는 허무감이 있으면 흥미가 떨어진다. 한참 좋아하던 건축학 이야기도 그랬고 그림그리기도 그랬다.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 영어공부도 나이가 들수록 이걸 어디에 써먹으려나 싶으면 어두운 그늘이 드리운다. 심리학 책을 열심히 읽고 있지만 퇴직을 10년 정도 남기고 있는 지금, 언제까지 상담업무를 맡을지 모르는데 심리학 공부를 더 하면 어디에 써먹을까싶다. 그러고 보면 나는 효용과 효율을 중시하는 사람인가 보다. 사실 인생 별거 없는데, 인생이란 거 자체가 쓸모가 있는 건 아닌데. 그냥 아무 소용없는 즐거운 일에 매진해도 되는데..

그런 깨달음을 얻어가고 있는 나이가 되었음에도, 그럼에도, <레드 로자>는 참 쓸모없는 책 같아 보인다. 특히 이 만화는, 로자가 활약했던 당시의 시대와 사회적 정황을 시시콜콜 묘사하고 있다. 지금은 논하는 게 의미도 없는 19세기 자본주의의 맹점을 되짚는다. 나는 열심히 살았던 활동가들의 삶 이야기를 즐겨 읽고 감정이입하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 시대로 돌아가 살 수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우리가 되짚고 싶은 것은 그들의 삶의 태도와 열정이지 그 당시의 이념적 오류를 짚으려는 것이 아니다. 1990년대라면 80년대 운동권의 잘못을 반성하고 새길을 모색할 것이지만 21세기에 19세기 유럽의 공산주의 운동의 논리와 오류를 짚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로자는 지식인 활동가이다. 전형적이다. 공부한 자들은 글로 선전선동하고 조직을 규합한다. 희생에 비해 성과는 별로 없다. 남은 것은 조직이 아니라 그들이 남긴 이론과 글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사회주의자들도 그랬다. 이론조차 남기지 못한 20세기 대한민국의 학생운동가들도 있다(그들 대부분은 정치권에 편입되었으나 일부의 성과 정권을 창출한 이들이 분명 있으니 를 제외하면 정치권 언저리에서 녹아 사라지고 있고 아직도 한국만의 특별한 정치이론으로 정립되지는 못한 것 같다). 로자도 지금은 사라져 버린 듯 보이는 유렵 공산주의 운동의 밑거름이 되었을 뿐이다.

물론, 자본주의 형태를 띄고 있으나 노동자들의 민주주의적 권리를 보장하는 데에는 맑시즘과 사회주의적 요소들이 기여한 바 크다. 자본주의라고는 하지만 사회민주주의적 요소가 강한 나라들도 많고 그런 유럽의 문화에는 로자 같은 이가 기여한 바가 크다. 그게 아니라는 게 아니라 이 책이 짚고 있는 시시콜콜한 로자의 이론들과 행적들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것이다. 가끔 대학 때 부르던 운동가요를 부를 때가 있다. 죽은 이를 추모하는 노래, 혁명을 노래하는 것. 피의 저항과 가진 자들에 대한 저주와 다짐들, 당시에는 전두환에 대한 적개심과 자본가들에 대한 경각을 드러내는 데 유효했으나 이제는 낡은 방식이 되었다. 그런 노래를 울컥하며 부른다는 게 허무하기 짝이 없게 느껴지는 것이다. 고작, 대학 동문들과 술자리에서 추억을 소환하는 데에는 유효하겠지.

 

작가는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 접근하는 걸까. 나는 이 책을 끝까지 읽을 필요가 있을까. 가끔 인생이 허무하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죽는다는 것은 육신이 사라져 다시는 그이를 볼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겠지만 그가 도모하던 모든 일들이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는 뜻이라는 점이 더 허무한 일이다.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나 역시 내가 꿈꾸던 일, 하려던 일들이 갑자기 사라져 버릴 것이다. 오히려 남은 이들에게 내가 계획하던 일들이 짐스러울 것이다. 물론 로자의 죽음은 그렇게 무가치하지 않았다. 그가 죽은 1919년 이후에도 그의 삶은 수많은 이에게 영향을 주었다. 1980년대 대한민국 젊은이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은 아니다. 게다가 이런 방식으로는 더더욱. 로자 룩셈부르그에 대해 더 연구해 보아야 할 필요조차 못 느끼게 만드는 나쁜 방식이다. 이제는 새롭게 그 사람에 대해 다가가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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