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낮동안은 즐거웠다. 하지만 저녁쯤 체력이 방전되고 신경이 좀 날카로워져 옥찌들한테 퉁명스러웠다. 옥찌들을 재우고 나는 왜 이렇게 생겨먹어서 잠깐의 화를 못 참는지, 언제쯤 어른이 될지, 그런 날이 오긴 올건지 답답하고 속상해서 침울해져 있었다. a가 맛있는 케잌을 사오고 a,b와 가사 분담 심층토론을 하면서 속상한 맘은 '내일은 잘할 수 있겠지' 정도로 일단락된 줄 알았다.
야식을 다 먹고 방에서 뒹글대며 a랑 k팝 스타를 보던 중이었다. 백아연 잘하네 못하네, 경연보다 듀엣곡이 더 좋네 어쩌네하는데 a가 옥찌가 그린 그림 얘기를 한다. 물감으로 그린 그림이었는데 가운데 키가 큰 꽃이 있고 양 옆에 녹색 꽃, 그보다 조금 큰 빨강 꽃이 있었다. 양 옆에 있는 꽃들은 키가 큰 꽃쪽으로 줄기가 꺽였다. 꽃들은 풀밭 위에 단단하게 자리 잡았고 위에는 잘못해서 물감을 떨어뜨렸는지 빨간 점 하나가 찍혀 있었다.
- a야, 저 그림 이쁘지
- 응. 엄마랑 옥찌들 그린거네.
- 응? 저건 그냥 꽃 그림이야.
- 봐봐. 녹색 꽃은 지민이, 빨강 꽃은 지희잖아. 지민이가 엄마쪽으로 좀 더 기울인거 보면 맞네. 평소에도 그렇잖아.
- 그럼 난? 난 어디있어?
- 저기 잘못 찍힌 점, 쪼오기 있네.
잉? 그냥 꽃 그림인데 그걸로 심리분석을 하는 쩨쩨한 a가 얄미웠다. 그러고 그만인줄 알았는데 자려고 누웠다가 갑자기 엉엉 소리를 내며 울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잘못 찍힌 점 하나라니. 예쁜 꽃은 못 되더라도 꽃 시늉나는 그림이라도 될 줄 알았는데. 아무리해도 나는 고작 이모일 뿐인거야, 그런데도 그동안 전전긍긍하면서 성격을 고쳐야겠느니 아이들과 어떻게 지내야하나 고민하는 꼴이라니. 설움이 복받쳐 다시 엉엉 울었다. 영문을 모르는 a가 울지 말라고 토닥이고 웃긴 얘기를 해도 속상해서 더 크게 울었다.
아, 이만큼 나이 먹으면 다 잘할 줄 알았는데. 아닌 밤중에 눈물바람이라니.
다른 이모들보다 조카들을 더 돌보는 것도, 그러면서 유난을 떠는 것도 다 나다. 순전히 이모 입장이다. 전에도 썼지만 혼자서 심심하다고 징징댈 때보다 옥찌들이랑 있으면서 즐겁고 재미난 일이 많은데 나는 내가 뭔가 대단한걸 해주는양 우쭐댄다. 실제로는 옥찌들 때문에 내가 얼마나 자기 객관화가 덜 된 들 자란 어른인지 옥찌들 때문에 하루에 몇번이라도 더 웃을 일이 생기는지 까맣게 잊고 있는거다.
얼마 전에 한 농부의 강연을 들었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같이 사는 분이었는데 그분은 어머니와 같이 농사를 짓는다고 했다. 1시간이면 할 일을 어머니와 4시간에 걸쳐 하는 그이는 효율로 보자면 터무니없는 짓이지만 어머니와 함께할 수 있는 일을 같이 하는게 좋다고 한다.
아침 7시에 일어나 정해진 일과를 소화해내라고 아이들을 닥달하는 나로선 상상할 수 없는 맘이었다. 정해진대로 일과를 소화하는건 애초에 내가 옥찌들과 같이 지내기로 하면서 계획했던게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무슨 꼭 지켜야할 일처럼 생각하고 아이들을 몰아세우고 있다. 옥찌들이랑 같이 있고 싶고, 아이들이 자라는걸 옆에서 보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은 효율과 좋은 결과만을 바란다. 고민은 얕고 진심은 전달되지 않으며 한번씩 혼자 열폭할만하다.
잘못 떨어뜨린 점 하나면 어때. 준비물을 혼자 챙기는게 속상했던 지희랑 같이 알림장을 보고(물론 훈장도 아닌데 훈계조지만) 숙제를 같이 하고 지민이의 엉뚱한 상상이 신기해 가만히 이 아이의 눈을 들여다볼 수 있는걸. 바람이 불면 바람 부는대로 좋고, 비가 오면 같이 우산을 나눠쓸 수 있어서 좋다. 다음에도 이런 비슷한 일로 혼자 열폭할 수도 있을거다. 그때는 지금처럼 엉엉 울진 않았음 좋겠다. 진심으로 동네 창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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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차 잠옷 입은 지민. 누나 따라서 영어 공부한다고 알파벳 시험 보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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