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떨어뜨린 점 하나

    








  * 얼마 전 읽은 선현경의 책에서 딸 은서에 관해 얘기한 부분이 참 좋았다. 그런데 엄기호 책을 읽다보니 '사회는 우리에게 언제나 이름을 부여하고 그에 걸맞은 생활 방식과 내용을 강요한다.... 이 삶의 형식이 인간이 견디며 살 만한 것인지를 나의 경험을 가지고 드러내고 증언해야 한다.'는 부분에서 나는 쉽게 누군가를 '~답다'란 식으로 규정하는건 아닐까란 생각이 드는거다. 아이라면 뭔가 잘 모르는데서 오는 엉뚱함과 살짝 어리숙한 모습을 기대하듯이 말이다. 그렇다고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너는 어떻게 느끼냐고 매번 물어보기도 그렇다. 다만 누군가의 말을 들어보기 전에 속단하는건 지양해야할 듯. 

 엄기호의 여느 책처럼 이 책 역시 격하게 공감하고 소문내고 싶은데 내 깜냥에 전체적인 균형을 잡고 요점을 간추린 리뷰를 쓸 수 없으니 막 이런식으로 노출하고 앉았는거다. 맥락에 안 맞는 인용이라고 뭐라해도 할말 없음. (면피용 멘트)

'가족 관찰기'는 언젠가 내가 써보고 싶었던 기획. 마을 탐방이나 실패한 사람들의 인터뷰, '꿈꾸는 피아노'라고 피아노를 연주하고 싶지만 실력이 안 되는 사람들의 연주회 등등을 꿈꿔왔다. 누군가 쓱쓱 하는 일을 나는 궁리만 하고 있다.


  

 은서의 명랑한 말들은 참 귀엽다.





 지민이가 그림 일기를 쓴다. 지희보다 훨씬 글씨도 잘 쓰고 그림 디테일도 살아있다.(옥찌 미안) 미니핀 강아지의 발톱 모양이 인상적이었는지 한참을 고민하더니 까미를 그린다. 지민이가 계속 그림을 그렸으면 좋겠는데 이 녀석은 군인이 되겠단다. 군인이 돼서 우리나라를 크게 만들겠다고 한다. 헐~ 군인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너도 다칠 수 있다. 전쟁은 우리나라를 크게 만드는게 아니라 사람들을 다치게 한다.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군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인데 이 사람들은 절대 싸우지 않을거다라고 설득해봐도 소용이 없다. 지금으로선 받아쓰기 20점 맞아선 군대 못간다고 으름장 놓는게 다.

 


 지희의 그림은 되게되게 재미있진 않다. 꽃과 나비, 나무, 하트 위주이고 사람들도 대부분 비슷하게 생겼다. 그리기 귀찮을 때는 눈알도 대충 그려버린다. 그렇지만 가끔, 속마음이 슬쩍 삐져나오면 지희가 무척 사랑스럽다. 호기심 많고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인 동생 때문에 철이 일찍 들어버린 지희지만 가끔 한번씩 이모를 챙겨주면, 친구한테 책을 소개해주는 맘을 보면 왜 나는 이렇게 나이가 많은데 지희만큼도 못할까 싶어 철푸덕. 


 그나저나 나는 '아직도 예쁜 이모'




 


 지민이 가방에서 발견했다.

이 사진 제목은 '고뇌하는 연필' 혹은 '갖은 고통을 당한 연필'?



 드드드디어 고추가 열렸다. 무기질 비료가 든 흙이 아니라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흙으로, 스티로폼 화분이 아니라 뿌리가 깊게 내릴 수 있는 화분으로, 모종이 아니라 씨앗으로 해야 한다는, 하고 싶다는 바람은 저만치 미뤄두고 고추를 키우기 시작했다. 우선 내가 뭔가를 키울 수 있는지 궁금했는데 마침 a가 선물로 고추 모종을 사온 것이다. 그런 고추가 이만큼 자랐다. 아, 뿌듯해라.

 한동안 잎에 생기는 빨간 거미 응애 때문에 골치를 앓았다. 응애 퇴치가 아니라 이 거미랑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기 때문이다. 담뱃물을 뿌리라는 둥, 물엿을 희석해서 뿌리면 된다고 했지만 응애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고추도 살리고 응애도 살리는 방법을 찾고 싶었지만 얄팍한 검색 능력 때문인지 도통 찾을 수가 없었다. 응애가 고추를 다 못쓰게 만드는건 아니었지만 잎이 노래지고 구멍이 나니 혹시나 고추를 못살게 구는건 아닐까 싶어 미운 맘이 새록새록 커지기도 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짠하고 무당벌레가 나타났다. 



 고추 자라는 것만큼 무당벌레가 짠하고 나타났다가 응애가 사라지니 다시 어디로 가버린게 더 신기하고 기특하다.



 고추래요~ 와, 꽃이 피더니 그 자리에서 고추가 난다. 무척 달뜨고 즐거운 일이다. 물론 ㄲ님 가든에 비하면 아주 손바닥만한 성과지만 그래도 고추를 막 응원하고 싶다. 다음에는 맛은 좀 밍밍하지만 건강한 흙에서 뿌리를 깊게 내릴 수 있게 해줄게.



 얼마 전 사람들과 농촌으로 이사간 친구 집을 방문했다. 딸이 넷인 친구는 딸들이 아파트에서 차를 피하며 노는 모습이 안타까워 농촌으로 이사를 했단다. 등교 버스에 학교에서 다 지원해주니 학교 다니는 것도 그 전보다 훨씬 수월해졌고 아이들도 마당과 들에서 뛰어노니 더할 나위 없이 좋단다. 물론 집과 마당 텃밭, 리모델링까지 해서 꽤 많은 귀농자금이 들었지만.



 시골 마을에서 살면서 언제 행복했냐는 질문에 '봄이네 살림'은 이렇게 말했다. 해 잘 드는 마루에 앉아 빳빳한 기저귀를 차곡차곡 개킬 때라고. 마당에 널린 이불을 보니 나도 그러고 싶어졌다. 누군가 나중에 어떻게 살고 싶냐고 묻는다면 빨래 얘기를 할 것 같다. 


  마루에 앉아 빨래를 개우고 있으면 a는 이유 없이 강아지처럼 땅을 파고 옥찌들은 뛰어논다. b는 어느 방에선가 잠을 자고 있을테지. 가끔 가족들과 친구들이 놀러오면 돗자리 펴놓고 맛난거 나눠먹으며, 맛난거 사주라고 조르며(응?) 살고 싶다.    



 유정란 계사에서 본 병아리. 혼자 나와서 돌아다닌다. 요즘은 뭐 먹인 달걀보다 유정란이 대세 같다. 유정란이 드물던 시절에 닭들을 배밭에 풀어놓고 길렀다는 분의 농장에선 닭 냄새도 죽음의 냄새도 나지 않았다. 유행을 타던 오리는 다시 가격이 떨어져서 오리 농가는 줄줄이 빚더미에 올랐다고 한다. 언제까지 소비자들의 입맛에 따라 생산하고 유행따라 품목을 바꿔서 투자비 보전도 못한채 손해를 봐야할까. 적어도 생명을 다루는 농부는 공산품을 생산하는 사람들과 다른 대우를 받아야할 것 같은데,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건가. 농부가 안전하고 건강한 먹거리를 생산해서 존경받았으면 좋겠다. 최근 어느 지자체에서 경쟁력이 있다며 가격이 싼 음식점을 소개했다. 대부분 중국산이나 저품질의 식재료로 만든 음식이라고 한다. 싼 게 비지떡이다. 농산물의 경우는 거의 맞는 말 같다. 


 먹거리 불안이 가중되면서 생협들이 커지고 있다. 생산자들이 원가보전할 수 있는 가격, 직거래 판로 마련, 소비자에게는 안전한 먹거리를 제공해주는 기획은 애초의 의도를 잃고 표류하고 있다. 몸집이 커진 생협들은 소비자의 입맛에 맞춘 수익성 사업쪽에만 신경을 쓰고 있는 듯 보인다. 먹거리 생산자들의 입장은 고려되지 않은 채 '공급업자'로만 치부되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한 생협에서는 방사선검사기기를 들여와 농산물의 방사능 수치를 검사했다고 한다. 어떤 품목의 수치가 높게 나왔고 해당 생협에서는 그 품목의 농산물 구입하지 않았다고 한다. 소비자들의 안전한 식생활을 위해서라지만 생협을 믿고 그 품목을 키운 농가는 어떻게 되는걸까. 몸집을 불린 생협은 유통업자로만 기능하는걸까. 생협 공동체가 그간 이뤄온 성과와 노력을 잘 몰라서 이런 무식한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런식으로 가면 안 될 것 같은데.

 


 

 쓰다보니 페이퍼 주제는 저 산으로 간 것 같지만 마지막으로 넣고 싶은 그림. 지희의 그림은 그렇다치고 지민 그림에서도 a는 그림 분석을 멈추지 않았다. 작은 벌레는 옥찌들이고 큰 벌레는 엄마다. 저기 사악해보이는 뱀은 아치다. 그럴리 없다며 지민에게 물었더니 답변이 명쾌하다. 작은 벌레는 옥찌들, 큰 벌레는 크니까 우리 중에 제일 큰 할아버지, 분홍뱀은 자기 약올리는 형아란다. 그럼 그렇지. 그림 분석이라니, 그림 분석이라니!



 

 최근 늦바람이 든 친구는 연달아 방탕지수 최고점을 갱신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나는 공감하고 북돋는 사람이 아니라 아치인지라 친구의 무의식을 분석했다.  자신을 잘 알고 있다고 믿는 현실적인 네가 억압된 욕망을 분출했다는 식으로. 아이, 낯뜨거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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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6-04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모는 아직도 예쁘다'는 꽤 문학적인 표현이잖아요!!

Arch 2012-06-04 20:15   좋아요 0 | URL
아! ^^
난 완전 옥찌만 편애하고 말았어요.

이진 2012-06-04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꺄 그림일기 내가 갖고 싶다. 한 어린이 그림일기 모아서 책으로 내면 아무도 안사겠죠? ㅋㅋㅋ
이번 페이퍼는 산만한듯 하면서도 다 아름답고 풋풋한 이야기와 사진 뿐인걸요.
이불을 널어논 폼(?)이 산뜻해요!

Arch 2012-06-04 20:19   좋아요 0 | URL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모아놓은 그림일기를 보여드릴게요. 옥찌들한테 허락맞고(허락맞고, 이거 헷갈렸는데 허락받고래요!) ^^
그쵸, 산만하죠~ 저도 이걸 따로쓸까, 이야기를 더 만들어낼까 고민했거든요. 그런데 사진 넣기도 귀찮고 해서 그냥 페이퍼 하나에 다 넣어버렸어요.
이불 널고 싶어요. 햇빛 잘 드는 마당에서 뽀송뽀송 말리고 싶어요.

숲노래 2012-06-04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협은 여러모로 장단점이 있어요. 생협에 공급하는 분 가운데에는 '처음에는 농약 안 쓰다'가, '공급 물량이 안 되어 농약과 비료 몰래 쓰는' 분도 더러 있기도 해요. 그러나, 생협도 Arch 님이 쓰신 글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니, 서로가 서로를 힘들게 하는 셈이에요......

고추는 '이어심기(연작)'만 안 하면 잘 자라요. 고추는 '다섯 해를 쉬고 다시 심으면' 병이 없이 잘 커요. 그러나, 고추는 환금작물이라 다들 마구 심으니 자꾸 병에 걸리거나 잘 안 커요. 고추 심은 자리에 이듬해에 감자를 심고, 이듬해에 배추를 심고, 이렇게 돌려심기를 하면 어느 밭이나 다 잘 된답니다. 시골 사는 분들도 다 알지만, '돈' 문제 때문에, 또 '입(식성)' 때문에 자꾸 이어심기를 하신다더라구요.

..

기저귀 보송보송 말라 갤 때마다 참 느낌이 좋긴 한데... 기저귀 빨고 아이들 치닥거리 하느라 하루 해가 언제 넘어가는지도 모르지요 @.,@

ㅋㅋㅋ 제 얘기입니다.... ㅠ.ㅜ

Arch 2012-06-04 21:58   좋아요 0 | URL
저는 기저귀를 빠는 것도 아닌데 조카들 돌보다 보면 잘 시간이 돼버려요. 흑

생협 얘기는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었는데 공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잘못 판단하거나 현실적인 부분까지 다 헤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렇지만 지리산닷컴 이장님이 하는 말처럼 너무 크지 않게, 작은 규모의 공동체나 직거래 판로가 있는게 좋지 않을까란 생각은 들어요.

고추! 정말 다섯 해를 쉬고 다시 심으면 병이 없나요? 그런게 신기해요. 그럼 5년을 기다려야겠네요.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궁금해요. 돌려심기 한다고 어떻게 작물을 먹는 벌레가 없을 수 있을까.

nada 2012-06-04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울 집 고추는 뭐하는 거지!
아직 꼭지만 달려 있는 채로 그냥 있어요.
으아, 샘나! 화나!

게다가 호박도 암꽃은 하나도 없고 수꽃만 잔뜩...ㅠㅠㅠ
여기저기 자랑하고 왕창 폼 잡았는데, 요즘 슬슬 불안해집니다.
그래도 나름 공부하고 연구하면서 공들였는데..ㅠㅠㅠ

아치님, 페이퍼 3개치를 이렇게 글 하나에 다 집어 넣다니요.
고추 얘기만 할라고 했는데, 귀농이며 빨래며 제가 좋아하는 얘기들이 가득하잖아요!
손빨래 하고 나서 만족도가 제일 큰 건 역시 흰 옷이에요.
흰 옷이 잘 어울리는 여름, 빨래가 잘 마르는 여름이 너무 좋아요. 히.

Arch 2012-06-05 14:15   좋아요 0 | URL
아이, 가든 있는 분이 스티로폼 상자에 담긴 모종을 부러워하다니! ^^ 꽃에서 열매가 열려서 신기했어요. 고추에 꽃부스러기가 남아있거든요. 꼭지부터 나왔나, 그건 잘 모르겠어요.

어떻게 호박 암꽃과 수꽃을 구분할 수 있나요. 수꽃만 잔뜩 나다니. 유성생식, 그런거죠? 아닌가. 수분, 씨방, 이건가? 농부님들 얘기를 들어보면 3년 정도 자기 농사를 지어봐야 감이 잡힌다고 하더라구요. 꽃양배추님 실망하지 말아요. 잘하시면서~ 저는 꽃양배추님의 새우 소묘를 보고 꽃양배추님은 나랑 뭔가 아주 다르다는걸 느꼈어요. 텃밭도 잘 될거라고 믿어요.

아, 나도 바싹 마른 여름 빨래가 좋아요. 빨래에서 텁텁하지만 은은한 여름 냄새가 나거든요.
알라딘에선 사진이 한꺼번에 안 올라가길래 하나씩 다 올렸는데 쓰다보니 주제가 없어서 나눌까 하다가 아냐아냐 사진을 다시 올리기는 진심 귀찮았더랬죠. 나중에 귀농, 빨래 얘기 더해요.

nada 2012-06-05 15:54   좋아요 0 | URL
암꽃은 밑에 호박이 달려 있어요.
수꽃은 그냥 꽃만 있고.
암꽃하고 수꽃하고 만나야 열매가 튼튼하게 맺히고 안 떨어진대요.
벌이 잘 안 오는 곳에서는 인공수정도 시켜준다나 봐요.
아직까지는 암꽃 전무..ㅠㅠㅠ
어쩌겠어요. 기다려야지.
이러다 암꽃 하나 피면 완전 방방 뛸 것 같아요.
나중에 소식 전할게요~~

Arch 2012-06-05 17:48   좋아요 0 | URL
신기해요. 식물들도 암꽃, 수꽃이 있다니!
꼭 소식 전해주세요.

카스피 2012-06-05 0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그림일기 오랫만에 보니 상당히 재미있네요^^

Arch 2012-06-05 14:16   좋아요 0 | URL
^^

숲노래 2012-06-05 0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추는 '고추잎마름병'이 가장 끔찍한데, 이 병원균이 '5년 묵히'면 죽는다고 해요. 그래서 고추는 '같은 땅에서 4년을 쉬고 5년째에 심으면' 병에 걸리지 않아요.

텃밭이든 너른 밭이든 땅뙈기를 알맞게 나누어 서로 돌려가며 심으면 서로서로 잘 어우러지며 병이 생기지 않아요. 저희는 아직 더 깊이 배우지 못했지만, '푸성귀와 나무'에 따라 벌레를 막는 관계가 있어요. 그래서 고추밭에도 둘레에 '어떤 나무'를 심거나 '어떤 다른 푸성귀'를 심으면 벌레나 병을 막기도 한다고 해요.

'작물을 먹는 벌레' 문제는 '한 가지 푸성귀만 잔뜩 심을 때'에는 언제나 되풀이돼요. 여러 푸성귀를 골고루 심어야 하고, '벌레들이 꺼리는 풀이나 푸성귀'가 사이사이 있으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Arch 2012-06-05 14:16   좋아요 0 | URL
작물들끼리 서로 그런 작용을 하는 게 참 신기해요. 신기하면서 정말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의심스럽기도 하고 그래요.